6장. 높은 곳과 낮은 곳

 

 

 

Bill Evans & Jim Hall, Stairway To The Stars

Telepopmusik, Tuesday

Ivy, Baker

Led Zeppelin, Stairway To Heaven

Jimi Hendrix, Voodoo Child

 

 

 

 

 

1

 

맥주라도 한 잔하지 않겠냐고 전화를 건 쪽은 수였다.

혜신이 살고 있던 원룸은 수가 살고 있는 원룸과 멀지않았다. 혜신이 수가 사가지고 온 맥주에 안주거리를 준비하는 동안 수는 천천히 그녀의 방을 둘러봤다.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고 침대 옆으로 한쪽 벽은 장식장과 책장을 겸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책과 기념품, 음악 CD등이 꽂혀있었다. 정돈은 잘된 편이었다. 부엌 싱크대는 정돈이 잘 되어있다기보다 음식을 조리한 흔적이 거의 없었다. 커다란 통유리 앞으로 작은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그 뒤로 빛을 완전히 가릴 두꺼운 암막커튼이 보였다. 방안 어디에도 그녀의 기타는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동화책이 많네.”

 

유일하게 볼거리가 있던 벽면 앞에 선 수가 책 한권을 뽑았다. 제법 만들어진지 오래되어 보이는 책을 펼치자 희미하게 시간의 냄새가 풍겼다.

 

“아이들이 보던 건데. 이모가 버리려는 걸 내가 가져왔지.”

“동화책으로 뭘 하게?”

“뭘 하긴, 내가 보려고.”

“요즘 동화책이 유행이야?”

수가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책을 넘기고 있었다.

“일종의 재활 프로그램이야.”

혜신의 캔 맥주 따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내가 어릴 때 동화책을 못 읽고 자랐잖아.”

 

그러고 보니 수도 그랬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을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다. 한창 자신을 키우기 위해 엄마가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나름 책을 많이 읽고 컸다고는 생각했지만 즐겁게 동화책을 읽은 기억도, 엄마가 동화책을 읽어준 기억도 없었다.

 

수는 처음 혜신으로부터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혜신은 어린 시절부터 아역 배우 생활을 해왔다.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이 되어 각종 촬영장을 누볐다. 밤이 늦도록 카메라 앞에 섰고 먼지가 가득한 스튜디오 안에서 김밥과 과자들을 먹어가며 광고촬영을 했다. 한 컷을 찍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리는 촬영장에서 미성년자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촬영은 새벽까지 이어지기도 했고 세트장 구석에서 쪽잠을 자다가도 호출만 받으면 카메라 앞에서 울고 웃어야했다.

 

“그거 알아? 난 초등학생도 되기 전부터 다이어트를 했다고. 세상엔 먹어도먹어도 더 먹으라고 등 떠미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라던데, 그 나이 때 벌써 칼로리 따져가며 먹었단 말이야.”


혜신이 고칼로리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어나서 여태 살이라곤 붙어본 적이 없어보이는 팔로 맥주 캔을 들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어린 시절이 거세된 셈이군.”

 

수가 ‘우리’라는 말을 썼다. 수와 혜신은 자신들의 신상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던 자신들의 유년 시절은 이미 서로 예상했을 것이다. 어느새 맥주를 들이키던 혜신이 동화책을 한 권 가지고 와서 앉았다.

 

“어제 이 책을 봤는데. 세로로 보는 책이더라.”

 

수가 혜신으로부터 넘겨받은 책을 세로로 돌린 뒤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내용이 별거 없는데도 그냥 멍하니 봐지더라고. 한 장에 건물의 10층씩을 그려놓았어 넘길 때마다 10층씩 나오지 그러다 100층까지 구경하게 되는 거야. 각층마다 샤워하는 개구리, 거꾸로 달린 박쥐에..... 그러고 보니 이런 걸 멍하니 보고 지냈던 시절이 없었던 거 같아.”

 

수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의 물음에도 혜신은 대꾸할 기분이 아닌 듯 멍하니 책에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막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지만 혜신은 벌써부터 힘이 빠진 듯이 졸려보였다.

 

“내가 보기엔 너도 재활이 좀 필요한 거 같은데.”

 

혜신은 맥주 캔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닦았다. 캔을 탁자 위에 놓고 소파에 가로 누웠다. 그리곤 누운 채로 리모컨으로 음악을 틀었다. 곧 아이팟과 연결된 스피커에서 재즈 기타와 피아노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어느 쪽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수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팟 화면 위에 띄워진 앨범 자켓이었다. 수면 위에 부유하는 한 여인은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재즈를 듣는 줄은 몰랐네.”

 

“딱히 잘 알아서, 좋아서 듣는 건 아니야. 그냥 시대에서 벗어난 음악, 이런 거 듣다보면 딴 세상에 있는 기분이거든.”

 

혜신이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잔뜩 웅크렸다. 두꺼운 면 원피스 사이로 살점이 없는 두 다리가 삐져나왔다. 수는 침대 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다가 다시 동화책들을 펼쳤다. 한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그림과 글자들과 음악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더니 어느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치 공기 속을 걸어 다니듯 재즈의 베이스음이 공간을 헤매고 다녔고 혜신은 그 저음 속에 낮게 가라앉은 채 잠이 들었다. 잠 속으로 달아남과 동시에 음악은 장르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재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She's reaching out to touch me

Struggling to breathe

As I feel her she falls into her dreams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었다. 귀에 들어오는 가사가 지금 자고 있는 혜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I like the way the day has begun…

 

마지막 가사가 묘하게 다가 왔다. 한동안 자고 일어나면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하루가 시작 될지도 몰랐다. 현실의 하늘은 노래 가사처럼 곧 밝아 질 것이 아니라 더 어두워 질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어서 쓸쓸하고도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절이 끝날 때마다 트럼펫이 하루의 마감을 알리는 듯한 인상적인 멜로디를 연주했다.

 

He's wasted his time

Now He's wasting away



지금껏 이런 음악을 들었구나. 혜신의 음악적인 취향까지 안다, 라고 생각했던 건 수의 착각이었다. 계속해서 나오는 곡들은 엠비언트가 강한 일렉트로닉 혹은 트립합 음악이 대부분이었다. 수가 등장하지 않았던 인생의 과도기에 그녀가 들었던 음악은 대부분 우울하고 몽환적이었다. 그 음악들은 매력적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을 축축하게 했다. 듣고 있는 내내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눈이 많이 내리고 스산하고 건조한 공기로 가득한, 그런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도 수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을 약으로 먹었는지도 몰랐다. 수가 먹었던 것 보다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약을.

 

처음 맥주 캔을 딸 때만 해도 오랜만에 만난 남녀 사이에 어떤 긴장감이 있었다. 수는 이 집의 어느 곳엔 한없이 늘어지고 쳐지는 공간으로 이끄는 통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새 그 긴장감은 뚫려진 구멍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수 역시도 혜신을 따라 드러눕고 싶었다.

 

저녁은 완전히 밤으로 넘어가 집밖은 불빛들로 가득했다. 수는 불을 켜지 않고 잠이든 혜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담요를 덮어준 뒤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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