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의 환풍기 소리가 그날처럼 크게 들렸던 적은 없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몽과 수와 혜신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유진은 낮에 있었던 의류회사의 제안을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의외로 반응이 무거웠다. 늘 명랑하던 몽까지도. 아마도 어떤 조건이나 회사의 의도보다도 이렇게 밴드가 시작되어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들을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언니만 좋다면 나는 오케이야”
맥주 캔을 내려놓은 혜신이 약간 취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혜신은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지금 회사가 내놓은 제안이 어떤 것이란 걸. 아마 몽도 수도 각자의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혼혈 사장이 괜찮은 사람일거란 막연한 기대하나만 갖고 있는 건 유진 밖에 없었다.
“라인업도 잘 짜야겠고. 플랜도 좀 생각해야겠지.”
수의 말이라고 예상했지만 주인공은 몽이었다.
“휴~그럼 일단은 우리, 해보겠다는 거네.”
유진이 ‘우리’라는 말을 쓰자 공기 중에 안온한 기운이 돌았다. 다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 고는 평소대로 연습을 시작했다.
그들이 밴드의 형태로 들려줄 수 있는 곡은 카피곡이 7곡 정도였고 자작곡이 5곡 정도였다. 자작곡 중 몇 곡은 아직 가사와 멜로디라인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이 실력을 만드는 거야.”
몽의 지론을 떠올리며 유진이 힘차게 마이크를 잡았다.
3
자작곡들은 몽이 쓴 곡들이 대부분이었고 몇 개는 수가 만든 것도 있었지만 유진이 만든 것도 있었다. 무대에 설 생각을 하자 수는 유진이 지은 ‘클레멘트’라는 곡에 흥미가 생겼다.
런던으로 와, 클레멘트
런던으로 와, 노래를 불러
그런 후렴구를 가진 곡이었다. 유진이 언젠가 기타를 치며 막 생각난 멜로디를 흥얼흥얼 하는 것을 수가 들었다. 멜로디가 쉽고 인상적이어서 즉석에서 수가 앞부분을 만들어 완성한 곡이었다. 몽은 곡을 듣고는 비트를 살려서 펑크 스타일로 연주해 보고 싶어 했다.
런던이란 대목에서 옛날의 연인을 생각하며 떠올린 노래가 틀림없었다. 혹시 남자는 클레멘트라는 영국인이었을까? 음악적인 느낌만을 가지기 위해 수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수는 이곡이 좀 더 가식 없는 담백한 곡이 되었으면 했다.
몇 일 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플레잉 하이가 찾아왔는지 머릿속으로 단어가 맴돌았다.
가라. 가라. 가라.
수는 얼마 후 그 단어가 발생지가 바로 형섭의 기타였음을 알았다. 수는 자취방 침대 밑에서 형섭의 마틴 어쿠스틱을 꺼내들었다. 이제 조심스레 기타를 닦고 줄을 갈아 넣었다. 튜닝을 마친 6현의 소리는 형섭이 연주하던 시절 그대로였다. 수는 자신이 아는 곡을 연주하려다 문득 멈췄다. 수는 오로지 형섭의 곡들로 이 기타의 소리를 기억했다. 이 기타에서 형섭의 소리 이외의 것은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형섭의 기타와 유진의 목소리는 유전적인 동질성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그건 기타를 조금 진지하게 다뤄본 사람이라면, 음악이란 걸 조금은 귀 기울여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타네.”
“친구가 맡겨둔 기타죠.”
“음악 하는 친구?”
“음악 하던 친구.”
“지금은 안하는 거야?”
“그럴 거야. 만약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면 이 기타를 찾아갔겠지.”
수는 유진 앞에서 처음으로 마틴을 외부에 선보였다. 클레멘트의 도입부를 연주하자 유진이 바로 알아차리고 기타 선율 위로 목소리를 태웠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템포로 연주했지만 유진은 무리 없이 노래를 했다. 수가 만든 앞부분까지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기타 소리에도 유진은 무리 없이 곡을 소화했다. 충분히 연습이 되어있었다는 뜻이고 이곡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떤 운명과도 같은 울림이 수에게 들려왔다. 몽과 혜신도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걸.
“우리 무대에 서게 되면 꼭 이곡을 해요.”
유진이 처음 보는 기타가 신기한 듯 수의 품에서 기타를 빼왔다. 그리곤 마치 처음 기타를 다루는 사람처럼 조심조심 코드를 잡고 줄을 울렸다.
“그래. 이 어쿠스틱 버전이면 좋겠어.”
유진의 말에 문득 생각난 듯 수가 다시 기타를 빼앗았다.
“이 기타는 클레멘트를 연주할 때만 쓸 겁니다.”
장남감을 뺏긴 아이처럼 유진이 입을 씰룩거렸다. 수는 미소를 지으며 마틴을 하드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최초의 공연 장소는 밴드 멤버들은 물론이고 이사인 드뷔시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다. 홍대도 강남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갔던 섬이었다.
유진은 거기서 시작하면 그 다음 공연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모든 멤버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보컬의 육체적 심리적 상태는 가장 민감하게 배려되어야 했다.
나쁠 것 없어.
어차피 뭘 얻어 보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냥 흘러가 보자고.
몽이 눈웃음을 치며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들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그 자리에서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각자 어떤 계기로 유진에게서 그 이유를 듣게 될 것이다. 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연일정과 형식 등이 구체적으로 잡혔다. 광고 에이전시에는 통보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오로지 드뷔시의 책임 아래 그의 직속 팀이 행사를 관할했다. 관할이라 해보았자 무대에 입을 의상과 간단한 비주얼 컨셉과 아이디어였다. 연습은 한 달 뒤를 향해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어쩌면 한 달 뒤의 섬은 단 한번 밖에 없을 지도 모를 놀이터가 될지 몰랐다.
“밴드 이름이 뭔데?”
수로부터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을 들은 이지로는 회의실의 환풍기 스위치를 올리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곤 곧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고 보니 밴드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드뷔시의 추천으로 강력한 후보명이 있었지만 유진의 반대로 기각되어 있는 상태였다. 수가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자 이지로가 원투 스레이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뭔, 밴드 시작이 그러냐.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것도 없고 그나저나 뭐 독특한 컨셉 같은 건 있냐? 그래도 명색이 광고쟁이가 하나 끼었으면 뭔가 관객과 통할 포인트 정도는 생각했을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런 컨셉도 포인트도 전략도 없었다. 머릿속엔 유진을 비롯한 넷의 이미지가 선명했지만 모 광고에서 나오는 카피처럼, 말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지로가 비어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저 자리, 앞으로 한 달 안에 채울 작정이야.”
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쉬움도 없었다.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불편한 감정이 조금도 올라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이지로가 다시 새 담배를 물었다.
“그거 마치고 돌아오면 저 자리는 없을지 몰라. 그래도 만약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면 일단 여기로 와봐. 그때 저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서 일하고 있다면 나도 어쩔 수는 없지만.”
이지로는 반쯤 태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수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오랜만에 낮술이 먹고 싶다고는 어느 막걸리 집으로 갔다. 와인잔이 나오는 그런 퓨전식 업소는 아니었다. 강남 한복판에서도 약간의 그늘만 있으면 편안하고 기분 좋은 술집들이 버섯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이지로는 잘 나가는 곳도 잘 알았지만 그렇게 잘나가지 않는 곳처럼 보이는, 사실은 더 잘나가는 곳까지 알고 있었다.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터를 잡고 장사했음직한 할머니가 막걸리 두 병을 내 왔다. 그리곤 창가의 가스불 앞에서 부지런히 부치던 전을 마저 부쳐냈다. 막걸리 한 되를 마시고도 둘은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오래된 브라운관 TV에서 나오는 케이블 방송사의 뉴스를 보며 술을 마시고 담배피고 다시 마시고 담배피기만 반복했다. 막걸리가 모두 떨어지자 이지로는 대리 운전을 불렀다.
“하긴 그래. 그 나이에 밴드를 시작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밴드가 만화에서처럼 짜잔하고 등장하는 건 더 우스운 거야. 그러니까 니들은 지금 음악으로 픽업된 게 아니라 비주얼로 픽업된 거잖아. 순수한 이상으로 뭉쳐진 밴드라면 분명 이랬겠지. 우린 음악을 승부하겠어. 하지만 어차피 현실은 이런 거야.”
이지로는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담배를 피우고 빈 담배 갑을 구겼다. 그리곤 일어섰다.
“거기서부터 들어가라. 어떤 회사의 브랜드 홍보로 이용되든, 비주얼로 오디션을 봤든,
그냥 거기서부터 들어가면 되는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알잖아. 할리데이비슨을 생각하라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리운전 기사가 왔다. 벌건 대낮에 이지로는 자신의 BMW 키를 대리운전기사에 맡기고 사라졌다. 수는 거리를 걸었다. 길을 걸으며 이발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창 너머에 세워진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쳐다보는 인쇄 광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지로와 함께 무릎을 치며 좋아했던 할리데이비슨 광고의 카피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I'll do it some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But there is no Some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