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들 전원의 의견은 일치했다. ‘러브 풀(Love fool)’만큼 어울리는 곡은 없다고.

곡을 고르고 부르고 연주하는 건 모두 아이들의 차지였다. 그다음의 일에 대한 결정권은 모두 그들의 차치가 될 것이지만.

 

기본적인 스토리 보드가 주어지고 간단히 회의를 한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유진은 계속해서 카디건스의 '러브 풀(Love fool)'을 불렀다. 비록 유진이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나머지 멤버들이 연주하는 전형적인 뮤직 비디오였지만. 카메라 안에서 발견되는 유진은 각기 다른 유진이었다.

 

감독은 여러 가지 포즈와 컨셉을 주문했고 유진은 적극적으로 따랐다. 몇 분 안되는 뮤직비디오에 저렇게나 많은 이미지 컨셉이 필요할까, 수는 의아했다. 섹시한 스타일에서 귀여운 스타일, 캐주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스타일, 심지어 프레피룩까지, 저녁 무렵 시작된 촬영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도 유진은 부담스러워하거나 지쳐가기는커녕, 오히려 감독이 유진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수는 촬영 도중 틈틈이 모니터 비디오 화면을 훔쳐봤다. 대부분 유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풋티지엔 유진의 시각적인 매력만 존재했다. 아침 무렵 메인 컷과 러프하게 편집된 영상물을 보면 그녀가 불렀던 노래는 소거되어 그녀의 음색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수는 지금껏 소리를 동반하지 않은 유진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의 목소리만 따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좋은 목소리이며 매력적인 톤이다. 하지만 그것이 늘 시각적인 매력과 함께였기에 배가 되었던 건 아닐까. 마치 절반만 존재하는 유진을 보는 것 같아 약간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오로지 수에게만 있었을 것이다. 감독과 이지로 모두 결과물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의구심보다 확신이 필요했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없던 확신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야했다. 촬영 후 이틀이 지나자 감독은 이지로와 수 그리고 사원들이 있는 곳에서 간단한 시사회를 가졌다. 최종 결과물을 확인한 이지로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처음 유진을 보았을 때의 확신은 틀림이 없다고. 다만 그곳에 유진은 없었으므로 유진이 동의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피티는 이지로의 확신의 찬 목소리로 진행되었다. 시종일관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지로가 소구하는 방향은 한 가지였다. 구구절절한 메시지가 아닌 감각에 호소하라. 그리고 그 감각의 결정체는 한 편의 뮤직비디오였고 무엇보다 유진이었다.

 

이지로의 목소리가 멈추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지로가 스텝에게 손짓을 하자 대형 스크린에 뮤직 비디오가 펼쳐졌다. 수는 뮤직 비디오가 흐르는 내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감독은 하얀 배경을 뒤에다 두고 밴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메인으로 찍었고 유진의 단독샷 을 집중적으로 찍었었다.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현란한 편집과 효과가 들어가 있어서 원래의 거친 소스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엔 다양한 광고주의 제품들과 유진의 스타일이 매치되어 있었다. 가끔 혜신도 들어가 있었고 그것보다 더 적게 몽과 수도 표현이 되어있었다.

 

수는 한 번도 그렇게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된 유진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접했던 그녀의 모습은 청바지나 단출한 의상이 전부였기에 비디오 속의 그녀의 모습은 믿기질 않았다. 확실히 그녀에겐 압도하는 매력이 있었다. 신체적으로도 가슴이 크고 다소 굵은 허벅지와 대비되는 가는 목선과 허리, 다리가 그랬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눈빛도 그랬다.

 

하지만 수가 확신하는 그녀의 결정적인 매력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멤버들의 소리도 유진의 목소리는 없었다. 수와 친구들이 담당한 것은 오로지 시각의 영역이었고 음악은 원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빙되었다. 마치 새로운 버전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제품을 바탕으로 펼쳐진 매력적인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이정도면 성공적이야."

 

피티장을 나서며 이지로가 말했다. 드라마에서처럼 기립박수를 치는 모습 따윈 없었다. 그저 묵묵히 들었고 끝나는 순간 형식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다만 화면을 보던 광고주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만족할 뿐이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짧은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지자 광고주의 유일한 질문은 하나였다.

 

“저 메인 모델은 신인 연기자입니까?”

 

7

 

이지로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피티는 실패로 끝났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으로 호출하는 이지로를 수는 피하고 싶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망가졌을 거란, 그래서 보기 힘든 모습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강남으로 갔다. 피티의 승자는 참여했던 두 개의 메이저급 대행사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의류광고의 전형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한 한 회사가 상당한 커미션을 뒤로 제안하는 바람에 광고의 퀄리티와는 상관없는 쪽으로 승패가 갈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광고주의 실권자가 대행사의 사장과 같은 학교 동창이란 소문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완벽한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티가 끝난 뒤 임원진과 실무진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했다. 임원진들은 메이저 대행사에 표를 몰아주었고 실무진들은 이지로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피티 결과가 발표된 직후 한 가지 제안이 있었다. 이지로 측에서 제작한 풋티지를 인터넷 등에서 동영상 마켓팅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물은 이지로의 ‘비 크리에이티브’가 아닌 광고주의 이름을 달고 나가야 했다. 이지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이번 건은 자신의 승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지저분한 거래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도 진작에 알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는 것이다.

 

“일은 계속 되어야한다.”

 

그 와중에서도 이지로는 한 손에 술잔을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타 광고주들을 위한 시안 제작을 사원들에게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이지로는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일은 계속 되어야하지. 자존심이야 어떻던. 그나마 들어간 돈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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