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건 B급이 되어야한다.

 

너무 좋아서 A급이 되면 안 된다. 가슴 속엔 A가 되고 싶지만 결코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지로는 종종 역적의 무리처럼 자신에게 일감을 주는 ‘갑’들을 향해 칼을 꺼내들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갑과 을을 떠나 회사 대 회사로 맞붙는 기회는 짜릿했지만 결과가 나쁘면 타격도 컸다. 한 번 칼을 뽑아서 실패했다면 그 칼은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음 기회를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이지로도 뽑은 칼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1시간쯤 지나자 낮술에 취한 이지로가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내일 들어가기로한 시안 광고 제작물에 대한 최종 컨펌을 위해서였다. 간단히 컨펌을 마친 이지로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기다리게 했던 수를 보며 실실 웃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광고는 분노로 하는 거야. 그렇지?”

 

이지로는 낄낄대며 술잔을 비웠다. 수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증오하는 상대를 위해 억지로 일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비로소 증오하는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가 다시 손을 놓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

 

‘난 시간을 정해 놓고 아이디어를 내지. 길어야 3시간. 딱 3시간만 하고 털어버리는 거야.’

 

이지로의 말들이 떠올랐다. 이지로는 그들이 미웠을 것이다. 자신이 내놓은 아이디어들이 손쉽게 보여 지고 별 생각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들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겐 딱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상 자신의 것을 내놓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이번 피티 건에 이지로는 오롯이 30일을 쏟아 부었다. 그건 오롯이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로는 마시고 또 마셨다. 수도 마실 수 있는 만큼 따라 마셨다. 그날도 역시 2차는 없을 터였다. 이지로가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오면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BMW 7시리즈 한 대가 수와 이지로 앞에 섰다. 돈을 좀 벌었다는 건 알았지만 왜 이토록 대형차량이란 말인가.

 

이지로와 수는 뒷자리에 앉았다. 대리 운전기사는 둘을 태우고 이지로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언젠가 이지로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느 부잣집의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아마도 이 중고 BMW는 그런 목적으로 구입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뒷좌석에 모시고 시내를 질주하기 위해. 그렇게 자신 혹은 아비에게 응어리진 것을 풀어버리기 위해 이지로는 거침없이 돈을 썼을 것이다. 비록 악마에게 꾸어온 돈이기 했지만 이지로에게 돈은 그런 의미였다.

 

최근 들어 그가 많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적인 대화도 없었고 무너진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수를 곁에 두고 싶으면서도 무리하게 그를 당겨서 옆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2차는 없었다. 가까운 지하철 역 앞에서 수를 내려주고 이지로는 BMW는 어디론가를 향해 떠났다.

 

 

 

잔뜩 술이 취해 돌아온 수를 유심이 보던 유진이 물었다.

 

“커피 좀 마실래? 녹차 마실래?”

수가 대꾸 없이 일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불안하지 않아? 이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을 끝내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말이야 세상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가령 수직선 위에 서서 오늘은 이만큼 달려왔다. 그리고 남은 끝을 가늠하며 또 생각해. 이제 이만큼 남았구나.

우리 같은 인간들은 어쩌면, 끝없이 나아가가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과도 같은 거 아닐까? 그것은 바깥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끝없는 삽질이겠지만. 똑같은 회전은 횟수가 더해져도 무의미하다고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매번의 회전은 그때마다 다른 질감인거야.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야.

그러니까. 원을 그릴 것인가. 선을 그을 것인가. 그게 문제겠지?“

 

수가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도 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유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하다 입을 열었다.

 

“수. 커피를 마실래? 차를 마실래?”

 

8

 

달라진 건 없었다.

 

수의 말대로 그저 다시 한 바퀴를 더 돈 것과 같았다. 한바탕 촬영이 끝나고 노동으로 들어온 돈으로 조금 더 잘 먹었고 악기를 손봐줬고 연습실을 보수했다. 각자 벌이를 위해 일을 했고 남은 시간은 모여서 음악으로 놀았다. 하지만 수의 말대로 다시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각자의 질감은 미묘하게 변해갔다.

 

유진은 음악에 대한 몰입이 강해졌다. 오기와 악으로 버티던 지난 모습과는 달리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졌다. 목소리는 무조건 강하지 않았고 강과 약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몸짓과 목소리는 점점 더 미침에 가까워져 갔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멤버들이 내는 소리에 더 예민해졌고 함께 녹아들어갔다.

 

수는 유진을 보며 깨달았다. 크게 지르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많이 노출함으로서 미침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근원을 건드림으로써 진정한 미침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카메라 앞에 선 이후로 그녀의 음악에서 관능이 일었다. 예전에 지녔던 관능은 사실 음악과는 별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걷거나 앉아있거나 말할 때나 발견되었던 것이지 결코 음악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음악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노래 부를 때 드러나는 관능은 상대를 자극하는 욕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런 순수한 관능은 수뿐만 아니라 연주하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가끔 유진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두거나 유진이 없는 곳에서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지로가 제작한 광고영상은 오래지 않아 인터넷에 화제의 영상으로 떠올랐다.

인터넷 댓글엔 유진에 대해 갖가지 소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준비한 신인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유진에게도 은밀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몇 트랜드에 민감한 광고주들은 공식 광고대행사로 모델에 관해 문의했지만 그쪽에선 유진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광고대행사는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건에 대해선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지로쪽에서도 영상의 소유권을 판 이후엔 전혀 협조가 없었다. 유진에 관한 소문만 커졌다.

 

유진 쪽으로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곳도 있었다. 대부분 모델계약을 하거나 전속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유진은 실제로 그들과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건 모호한 조건이었다. 몇 년이든 몇 달이든 트레이닝을 거쳐 앞으로의 진출 방향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것으로 그들과의 접촉을 끝냈다. 음악이 아니라면 그녀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즈음 그녀의 이름은 인터넷의 검색어 순위에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동영상은 곧 내려졌다. 피티를 따낸 광고대행사에선 국내 톱 모델을 써서 장기 광고 캠페인을 계획 중이었다. 그 틈에 끼어든 유진의 동영상은 향후 광고홍보 전략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건 그들이 장기간에 걸쳐 받아낼 막대한 수수료를 삭감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메인 모델은 하나로 가야합니다.”

 

광고대행사의 집요한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주장이 이국 브랜드를 이 나라의 시장에 안착시키는 답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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