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뮤즈의 아이들

 

 

Eugenie, Clement

 

 

 

 

 

 

1

 

이지로의 아이언 스윙은 간결했다. 배가 좀 나오긴 했지만 몸매에 비해 폼은 그럴 듯 했다. 분명 정식 렛슨을 받았을 것이다. 스코어가 덜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폼만큼은 아름다워야 한다. 누군가의 골프 철학처럼 이지로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번 날아가는 공은 비슷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물 벽에 붙여놓은 타겟 주위를 맞혔다. 녹색의 그물로 둘러 쌓인 골프 연습장에서 스윙을 하고 있는 건 이지로밖에 없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이도 수 혼자였다. 강남 한 복판에 숨구멍을 뚫어놓은 듯 했다. 그런대로 공기는 상쾌했고 바람도 시원했다.

 

바람이 불자 수는 어떤 냄새에 민감해지는 걸 느꼈다. 이지로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 신경이 쓰였다. 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지하실 냄새가 온몸에 배어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골프장도 아닌 연습장에서 조차 아래 위 골프복은 물론 벨트와 모자까지 차려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본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 뭔가를 준비해야했다.

 

마치 자신의 실력을 시위하듯 말없이 수 십 개의 공을 때려낸 이지로가 땀을 닦으며 수를 향해 다가왔다. 주위를 한 번 살핀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언제까지 그거 할 거냐?”

 

“글쎄요.”

 

수는 별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거’라고 지칭한 이지로의 표현이 거슬렸다.

 

“뭔가가 끝났다면 뭔가를 시작해야 하잖아.”

 

이지로는 수에게 있어 뭔가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순간 수는 두 우주가 평행하게 나아갈 뿐 앞으로도 영원히 닿는 접점이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이지로의 두 번째 문장이 더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고층건물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골프를 쳐보니까 이제야 좀 알겠더라구.”

 

수의 이야기가 없자 곧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점은 이 남자를 미워할 수 없게끔 했다. 타인에게 반드시 들어야할 이야기도 없고 꼭 해줘야할 이야기도 없는 것이다. 그런 쿨함이 수는 좋았다.

 

“힘을 빼라고 하지. 모든 스포츠가 다 그런 거지만.”

이지로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후 담배를 물었다.

 

“처음부터 힘을 빼려고 했지. 그게 될 리가 없었어. 힘을 뺀다는 건 처음부터 힘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닌 거야. 처음엔 엄청 힘을 들이지. 아니, 힘을 줘야 해. 연습하고 나면 어깨랑 팔이랑 손바닥이 모두 엉망이 되지. 그러다 조금씩 흐름을 익히게 되면 거기서부터 필요 없는 힘들을 조금씩 덜어내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꼭 필요한 힘만 남게 되는 거지.”

수는 이지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다음 경쟁 피티는 꼭 필요한 힘만 남을 거예요.”

 

이지로가 기분 좋게 연기를 내뿜었다.

 

“글쎄다. 힘이 빠져가는 건지. 아니면 아예 힘줄이 끊어져 버린 건지.”

 

담배를 비벼끈 이지로는 휴대폰을 한 번 확인하곤 자신의 골프 클럽들을 챙겼다. 골프백엔BMW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락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이지로의 힘 빠진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뭔가 할 말이 생각이 났지만 꺼내 놓지는 않았다. 둘은 연습장을 나와 근처의 호프집으로 간 후 맥주를 두 잔씩 마셨고 2차 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지하실로 내려오자 아무도 없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지로 앞에서 의식되던 미세한 냄새가 한층 더 또렷해졌다. 그 냄새를 확연히 인지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방금 강남을 다녀온 뒤로 이 공간은 한층 낯설게 다가왔다. 수는 문득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보았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과 비교해 피부는 창백해졌고 살도 많이 빠져보였다. 영양 상태도 썩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유진도 몽도 나처럼 매일 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지금 넌 뭐하고 있니?’

 

거울 뒤에서 딱히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집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중엔 분명 이지로의 목소리도 있었다. 딱히 뭘 하고 있는지 말할 거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겠죠?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할 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몇일 동안 기타를 잡지도 않았고 특별히 음악을 듣지도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은 가벼웠다. 처음 이곳에서 가벼움을 느낀 그날 이후로 그 가벼움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아니,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는 지도 몰랐다.

2

 

30층.

 

이렇게 높은 곳까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유진은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앨리베이터 속에서 유진은 빠른 속도로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높은 산을 자신의 발로 오른 적은 있었어도 타자의 힘으로 밀어 올려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38층에서 문이 열리고 유진이 발을 내딛자 폭신한 카펫 감촉이 느껴졌다. 비서는 곧 유진을 알아보고 소파에서 잠시 기다리기를 권했다. 사무실 문 틈 사이로 미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음악은 클래식 음악 같기도 했고 재즈 같기도 했다. 유진은 자신이 음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비서의 안내로 유진은 방에 들어섰다. 하얀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유진을 맞았다. 가볍게 남자의 손을 쥐며 유진은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삭발을 한 듯 짧은 머리, 턱과 코밑과 볼을 덮은 짙은 갈색 수염이 하얀 얼굴 위에 강렬한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서양인의 체구였지만 눈빛은 어쩐지 동양인 같아 신비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어눌하긴 했지만 또렷한 한국어로 말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간단한 회사와 자신에 관한 소개만 했을 뿐인데, 유진은 단박에 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아챘다. 회사생활을 하며 몸으로 체득한 기술이었다. 그것은 바람기와는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버리고 마는 순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확신하자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당돌한 질문도 무리 없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저에게 원하는 게 뭐죠?”

 

유진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다른 곳에 두려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남자는 순간 프랑스어로 자신에게 뭔가를 타이르듯 이야기하면서 이내 자세를 고쳐 잡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요. 내 머릿속엔 트리니티의 제품을 좋아하는 한 여자가 산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 여자를 그리고 있지요. 그래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을 땐, 전 그 사람에게 그 옷을 먼저 입혀 봐요. 그리고 반응을 물어보죠.”

 

“재밌네요.”

 

유진의 대꾸에 남자는 한층 더 힘을 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상상하다 보니 뭐랄까. 그 여자 말고도 항상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올라요. 뭐라고 해야 되지. 상상 속의 팬들? 그냥 돈과는 상관없이 우리 제품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냥 우리 제품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 그런데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요?”

 

유진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도 상상 속의 팬이 있지 않나요?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해주고 무조건 응원해 주는 가령 콘서트를 열면 맨 앞줄에 나와서 당신을 응원할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요.”

 

아직 정식 무대에 서보지 않은 유진이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와 코드가 비슷하거나 나의 코드를 이해해줄 그런 사람들. 함께 노래를 불렀던 그와 수와 몽과 혜신, 섬에서 본 일본인 아줌마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기타리스트. 그런 사람들이 떠올랐다.

 

“전 생각했어요. 우리제품을 좋아할 사람들과 당신의 노래를 좋아할 사람들이 어쩌면 아주 비슷할 거라고요.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리가 상상한 팬들을 위해 우리는 비주얼을 제공하고 당신들은 오디오를 제공하는 셈이죠.”

 

“왜 하필 우리들인가요? 우리의 음악을 들어본 것도 아니고 인지도가 높은 가수도 많은데요. 그들을 쓰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이지 않나? 더구나 이 브랜드의 메인 모델도 정해진 거고요.”

 

유진의 질문에 남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혹시 소리를 듣고 형상을 그리기도 하나요? 아마 음악을 하는 분이니까 그렇겠지요. 저는 형상을 보면 그 안에 잠재된 소리가 들립니다.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저는 제 감각에 확신을 가졌어요. 제가 제안하는 건 일종의 실험이라고 보면 됩니다. 과연 내 감각이 맞을지 아니면 에이전시가 제시하는 확률과 통계가 맞을지.”

 

남자가 이어서 이야기의 본론을 제시했다. 회사 측에서 의상은 물론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를 꾸며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대형 공연도 아니고 세밀하게 기획된 이벤트도 아니었다. 게릴라식으로 진행하는 대신 자유롭게 노래할 기회를 주고 회사에서는 라이브한 반응을 살피겠다는 것이었다. 정식 광고대행사가 제시한 전략과 상반되어 있기에 본사의 이사로 있는 이 남자의 단독 판단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의 말대로 실험 정도일 것이다.

 

유진은 회사를 나오면서 제일 먼저 몽을 그리고 수와 혜신을 차례로 떠올렸다. 자신의 판단과 비슷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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