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산책길로 접어들기 전, 마을에 사는 할머니는 신기하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고 노래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노래임에도 그녀가 보이는 미소는 무엇일까?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낯설음에 늙은 마음에도 빈공간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시선이 할머니의 것과 마주쳤다. 남자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듯 보였다. 할머니는 곧 발길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Is it because I lied when I was seventeen?

 

왜 늘 비는 나에게만 내리는 걸까?

 

그에게 잘 어울리는 한 줄 이었다. 그런 가사를 말하면서도 그에겐 어떤 불만과 증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약간의 무기력이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피학적인 황홀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산책길에 접어들던 또 다른 사람들이 유진과 남자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지나갔다. 유진은 혼자 있을 때의 자신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어쩌면 더 힘든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 앞에선 오기가 솟았지만 정녕 홀로 있을 땐 자신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유진이 보기에 그에겐 일관됨이 있었다. 늘 말이 적었고 잘 움직이지 않았다. 홀로 있을 때나 사람들과 있을 때나 혹은 둘만 있을 때나. 하지만 음악이 주어지면 적극적이고 솔직해졌다. 역시 홀로 있을 때도 사람들과 있을 때도, 혹은 둘이 있을 때에도.

 

음악이 있고 없고에 따라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유진이 지나는 사람들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긴 동안 남자는 트레비스(Trevis)의 곡들을 마치고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로 들어갔다.

 

Do what you want to whenever you want to.

Though it doesn't mean a thing.

Big Nothing.

 

“없음에도 커다란 없음이란 게 있는 건가?”

 

유진이 중얼거리자 남자도 뭐라 중얼거리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거대한 허무(Big Nothing)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

 

유진은 남자가 연주하는 엘리엇 스미스의 곡 중 이 곡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곡은 유진이 듣기에 유일하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곡을 부를 땐 뭔가 자꾸 놓으려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곡만은 뭔가를 잡으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난 빅 낫싱 보다는 스몰 썸싱이 나은 거 같아.”

 

“사는 데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썸싱은 음악적으론 매력이 없어.”

 

“음악이란 게 사는데 좀 더 힘이 되고 그런 거 아닌가?”

 

애당초 동의를 구할 마음이 없었던 유진이 작게 말을 했다. 기타를 내려놓은 남자는 멍하니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삶도 있어. 그런 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야. 그냥 받아들일 수 있어. 그것도 아름다운 거야.“

 

유진은 생각했다. 삶이 빅 낫싱으로 끝날 거라면 억울하지 않을까? 이 사람은 분명 낫싱이 아닌데. 낫싱이 아니면서도 낫싱으로 산다는 거, 자기기만이 아닐까? 하지만 그가 썸싱이 되는 것도 분명 이상했다. 썸싱이란 의미를 찾으면 낫싱의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린다. 낫싱이 아닌 걸 섬싱이라고 하는 것도 틀렸고 낫싱이 섬싱이 되는 것도 거짓이긴 마찬가지였다.

 

생각에 잠긴 유진을 향해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유진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이 앉아있던 벤치 앞 나무 사이로 갑자기 바람이 심하게 불어 하마터면 유진은 종이를 놓칠 뻔했다. 뭔가 심상찮은 내용이 담겼다는 생각에 떨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훑어보았던 유진은 종이를 바람결에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입대영장이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타 국가에 비해 가장 부족한 건 뭔지 알아?

복지? 국방? 국가 경쟁력?

바로 개인을 향한 감수성이야.

 

유진은 언젠가 회사에서 가장 유식하기로 소문난 한 차장이 술자리에서 떠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군의 관계자가 허약한 육체와 연약한 정신을 지닌 이 남자, 비록 병원으로부터 진단서를 발급받을 객관성이 없다고는 해도, 일대일로 대면했다면 직접적인 군대행을 판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그러나 집단은 개인의 특수성 따위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국가란 평균치와 거리가 있는 인간들에게 너무나 건조했다.

영장을 받은 이후로 남자는 침착하고 담담해보였다. 오히려 담대해 보인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집에 누워있거나 하는 시간도 줄었고 더 많이 일했고 더 많이 웃었다.

그러나 영장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에서 유진은 뭔가를 놓아버리고 싶은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자기 파괴적인 징조들을 유진은 세심하게 읽어냈다. 유진이 그런 눈빛을 느낄수록 남자는 자신의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 몸을 움직였고 부지런해졌다.

 

남자는 가끔 기타를 칠 때도 우울한 곡만을 연주하던 패턴에서 벗어나 자신이 학창시절에 연주하던 빠르고 비트가 살아있는 록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마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입대일이 다가올수록 유진을 향한 남자의 행동에도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음악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던 중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유진을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격렬하게 입술을 탐했다. 수줍은 입맞춤 있긴 했지만 이렇듯 격렬한 키스는 처음이었다. 비로소 자신을 향한 애정의 깊이를 확인한 유진은 한편으론 기뻤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그것은 사랑 앞에서 발현되는 용기라기보다 내면에 깔려있는 제어하기 힘든 에너지였다.

 

그런 감정을 감지한 유진도 남자의 에너지를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녀 역시 불안했고 사랑을 갈구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남녀에게 축적된 에너지들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이후 둘의 행동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해져갔다. 음악이라는 규율 안에서 움직이던 유희는 점차 육체의 쾌락까지 아울러갔다. 자신의 집이 비어있던 어느 일요일 오후, 유진은 자신의 방에서 남자를 받아들였다. 명목상은 자신의 기타연주를 봐달라는 것이었지만 둘은 방문이 닫히기 무섭게 서로를 탐했다.

 

이제 서로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둘은 더 과감하게 에너지를 짜내기 시작했다. 유진의 방에 들어온 남자는 두 손으로 유진의 얼굴을 감싸쥐고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리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유진의 상의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딱 한 시간을 예정하고 남자를 불러들였던 유진은 어느새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두 시간이 훌쩍 흘렀음을 알았다.

 

물었고 핥았고 때론 상대를 눌렀다. 때론 상대에게 자신을 맡기며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 들이닥칠지 모를 상황 속에서도 두 육체는 얇은 이불 속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몇 번이나 파정했고 유진 또한 몇 번이고 강렬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을 탐하는 남자를 보며 유진은 다시 한 번 두려움을 느꼈다.

 

심연의 모든 에너지를 던져버리려는 남자는 유진을 만족시킬 때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을 뿜었다. 그리곤 서둘러 유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유진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제라도 자신이 그를 제어해야 함을 깨달았다. 물론 쉽진 않을 것이다.

유진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앙상한 팔을 잡고 집을 나왔다.

욕망이 사라진 육체사이로 바람이 불어들었다. 밤이 성큼 다가온 거리엔 벚꽃 나무들이 꽃잎들의 절반 이상을 털어내고 있었다. 유진은 지난날 벚꽃 나무와 함께 서있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아름다웠던 순간들은 왜 이리도 빨리 가버리려는 걸까?

 

아직 절반 이상이 남은 벚꽃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직 충분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절정의 순간이 이미 지나간 아름다움이었기에 그에 합당한 크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질 않았다. 곧 쓸쓸히 잎을 모두 떨어뜨리면, 다시 벚꽃이 만개할 시간까지, 아름다웠던 벚꽃나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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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끝없는 권태가 밀려왔다.

드리워진 커튼 밖으로 화창하게 맑아있을 겨울 하늘이 눈에 선했다. 직접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없이 차가워진 대기 사이로 불어닥치고 있을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추워졌기 때문일까.

 

전기장판 위에 움츠린 채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어 본다.

차가운 방 공기에 다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먹기도 싫고 뭔가를 하기도, 보기도 싫었다.

끊임없이 틀어놓았던 컴퓨터와 TV도 모두 꺼버렸다.

심지어, 전화 올 곳도 없지만 전화기 조차 꺼버렸다.

 

추운 겨울,

누군가 만나기 위해 옷을 켜켜히 껴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갔던 것이 언제였을까?

 

그렇게 추억을 더듬다 잠이 들고 다시 잠에서 깨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미워하고 헤어졌던 기억들을 더듬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옅은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벽으로 스며드는 외풍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또 얼마나 추위에 떨 것인가.

 

몇 번의 잠과 현실을 오가는 동안 몸은 나른해졌고 정신은 명료해졌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다만 감각은 푹 쉰 덕분에 충분히 날카로워져있었다.

 

그때 뒤집어 쓴 이불 밖으로 이상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방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 가위에 눌린 건 아닐까. 하긴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외로웠던 걸까.

 

들어와 봐야 훔쳐갈 것도 없었다. 지금 자신을 죽일테면 죽여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아래로 떨어질 것도 없었다.

 

나는 청각만을 키운 채 꼼짝도 없이 이불 속에서 머물렀다. 가볍게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소리.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가방을 챙겨주던 누나의 움직임과 닮았다.

 

이젠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큰 누나가 여기로 온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밥짓는 소리일까.

곧 후각을 열어 보지만 구수한 밥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뀐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어떠한 ‘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유’라고 할만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가재도구들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잘 정돈하는 편이라고 자부는 하지만 어제 이후로 모든 물건들이 더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다. 주방의 식기와 팬은 모두 각을 맞추고 있었고 행거의 옷걸이들도 한 방향으로 옷들을 걸어두고 있었다. 개켜진 옷들도 사각의 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침입자는 집안 곳곳을 조사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아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굳이 가져갈만 것도 없는데.

 

얼마 뒤 나는 아주 운좋게 알바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집을 비우고 배를 채우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한동안 겪었던 야릇한 경험은 곧 반가사 상태에서 느낀 착각쯤으로 생각했다. 이후로 집은 늘 텅 비어있었다. 따로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거의 종일 일을 했고 일을 하면서 모든 끼니를 밖에서 때워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전기장판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잤고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미친듯 석달을 일하자 이번에도 여지없이 일자리를 잃었다. 성격탓도 있겠지만 어느 업소의 주인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내 탓으로 돌렸다. 어눌하고 말주변도 없으며 심지어 어두운 성격은 늘 독박을 쓰기에 최적의 캐릭터였다.

 

단지 몇 달 굶지 않을 돈이 있기에 나는 다시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과 TV를 보며 지냈다. 그러자 몇 달전의 그 야릇한 일이 생각났다. 그후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물건은 그때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도 않았다. 나는 무의식중에 물건을 함부로 놔둬 보기도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은 또렷해졌다. 그 새벽에 들었던 소리는 분명 환청은 아니었다. 그 생각에 자꾸 빠질수록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날 하루 인가.

왜 다시 나타나지 않는거지?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곤 문득 깨달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 말이다. 이불 밖으로 들리는 저 소음들이었다. 영혼 없는 인간들이 떠들어 대는 저 상스러운 대화소리와 미세하지만 노트북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가끔씩 울리는 이 전화소리 말이다. 나는 쥐죽은 듯 가라앉아있었던 그날의 정적을 기억해 냈다.

 

나는 당장 일어나 모든 소음들을 제거했다.

문제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많지는 앉지만 주기적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음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을 덮고 귀를 세웠지만 역시 그 미지의 존재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며 잠깐 잠이 들었다 깨었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외부는 그날처럼 고요했다. 그러고 보면 새벽 4시쯤이면 늘 세상은 진공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차도 인간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녀가 온 것이다.

분명했다.

뒤집어 쓴 이불 밖 어딘가에 그녀가 앉아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컴퓨터가 켜지는 소리였다.

나름 고성능 노트북이라 소리는 작았지만 확실했다.

 

그녀가 지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겠구나.

 

나는 숨죽이고 지금의 장면을 상상했다. 불꺼진 방에서 새어나오는 모니터 불빛에 얼굴을 들이밀면 그 모습은 얼마나 괴기스러웠던가. 하지만 전혀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만이 간절했다.

 

저번 방문이 나의 물질적인 것들을 확인하려 했다면

이번엔 내 정신적인 것들을 체크하려는 것일까?

 

나는 갖가지 생각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아주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그리고 내 눈이 서서히 외부의 빛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노트북은 켜져있었고 불빛도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불빛에 빛나는 긴 머리를 어깨 밑으로 드리운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누나.

 

나는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불렀다.

목소리는 터지지 않고 안으로만 삭혀졌다.

온몸에서 두려움 대신 그리움이 샘솟았다.

두려움이란 싸늘한 감정은 봇물터지는 듯 쏟아져 나오는 그리움에 잠겨 들어갔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노트북은 꺼져있었다.

그 어디에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켰다 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나가 맞을까? 왜 얼굴을 보지 못했을까. 그 뒤로 몇일 밤 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있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꺽꺽 소리나는 것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소리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눈물을 그쳐.

 

하지만 밤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리움에 눈물을 쏟아내고 지쳐 잠이 들곤 했다. 그날 밤도 그렇게 눈물을 흘렸었다. 몇일 동안 눈물을 쏟아내자 이젠 소리내지 않는 눈물이 가능했다. 그저 눈물이 눈가에 맺히는 정도였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내가 누운 전기장판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그녀가 달아날 것만 같았다.

다만 그녀가 이불을 걷어주길 원했다.

그렇게 나를 데려가주면 좋으련만.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참았다.

완벽한 적막과 진공의 상태는 그렇게 짧게 유지되었다.

 

제발

제발

가지마.

 

간절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을 때

불현듯 나는 나에게 남은 마지막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때 비로소

베개에 댄 귀에서

가늘게 뛰고 있는 내 심장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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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왜? 그런 음악들이 좋은 거야?”

 

“그런 음악들이라는 게?”

 

“들을수록 괴로워지는 음악. 듣고 있으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음악.”

 

자신을 복잡하게 만든 그 음악에 대해 유진은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으나 쉽진 않았다. 풀밭 위에 앉아있던 남자가 멍하니 하늘을 보다 시선을 땅으로 꽂았다.

 

“왜 음악이 좋아? 음악으로 뭘 하려고 하죠?”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제대로 미쳐보고 싶어서. 술 마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미친년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햇빛 쏟아지는 날에도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미쳐보고 싶은 거야.“

 

유진은 한 번도 꺼내놓지 않았던 열망을 의외로 또박또박 말하는 자신이 신기했다.

 

“저기 숫사마귀는 암컷과 교미하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암컷에서 물어 뜯긴다고 해요.”

남자가 풀밭 위에 부동으로 서있는 사마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뻔한 최후가 사마귀에게 고스란히 준비되어 있죠. 그걸 그대로 따르는 건 정말 미친 짓이죠.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의미가 있을 거예요. 아마도 머리가 물어뜯길 때 숫사마귀는 진짜 살아있는 의미를, 그 한순간에 느낄지도 몰라요. 마찬가지인거야. 음악이 자신을 갉아먹어 다 먹어치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살아있는 이유를 느낀다면.“

 

“완전 미친 짓이군.”

 

마음이 상한 유진은 사마귀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다 미치고 싶은 건 마찬가지야. 단지 미치는 모습이 다를 뿐이지.”

 

그는 침착하게 의견을 마무리했다. 요동치는 감정도 없었다. 어린 나이지만 감정의 틀은 이미 단단한 거푸집을 만들었고 그 집은 어떤 자극에도 녹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열정은 그런 단단한 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침착함이 유진을 두렵게 만들었다.

 

 

 

 

유진의 본격적인 음악공부는 그 무렵 시작되었다.

유진은 남자에게서 닥치는 대로 음악들을 소개 받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여자가수든 남자가수든, 옛날 것이건 최신 것이건, 그 음악들은 기본 소양을 넓혀주는 것이었고 동시에 남자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내성적인 남자의 속을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길은 음악밖에 없었다. 음악은 사람을 이해하는 단초에 불과했지만 때론 훨씬 더 믿을 만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포인트를 정확히 공감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의 본성도 함께 이해하는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남자의 음악 스펙트럼은 의외로 넓었다. 남자의 앎은 자신이 끌리는 소리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힙합이나 일렉트로닉같은 음악은 계보나 특징, 주요한 아티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에 심취하지 않는 것은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아직은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진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 사랑하게 될 거라고 그는 말했다.

 

‘순수한 호기심은 얄팍한 취향을 넘어선다.’

 

남자는 자신의 지론대로 취향과 상관없이 유진에게 음악을 알려줬다. 남자가 추천하는 음악들을 들으며 유진은 깨달았다. 좋은 음악들은 장르와 소리, 국적은 달라도 그 속엔 공통적인 질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질서를 느껴내는 것, 그런 능력이 커질수록 자신도 조금씩 성숙한다는 것을.


봄이 지나 여름이 다가오자 남자의 건강도 좋아졌다. 유진은 가끔 남자 앞에서 엄청난 수다를 떨었다. 유진은 남자와 함께 숲길을 거닐며 그동안 듣고 느낀 것들을 가감 없이 표현했다. 남자는 묵묵히 유진의 말을 들었다. 어떤 특별한 동의도 지적도 필요 없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유진은 자신의 말이 남자의 몸을 통과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함께 있지만 동시에 함께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에게서 기타를 배울 때처럼, 그것은 소외감으로 다가오지 않고 편안함으로 다가 왔다. 타인과 마주 하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느낌. 그런 순간마다 유진은 혹시 사랑이란 게 이런 건가 반문해보기도 했다.


남자는 엘리엇 스미스와 지금은 영화음악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뮤지션 이병우가 참여했던 ‘어떤날’을 가장 좋아했다. 또 가끔은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렸으나 최근엔 활동을 멈춘 기타리스트 황석호의 연주곡들을 하루 종일 듣기도 했다. 가끔 기타로 그의 연주를 따라 쳐보기도 했다. 그가 사랑한 음악들은 비슷하게 우울했지만 그 우울함은 조금씩 엇갈렸고 그 엇갈림 속에 특유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져 나왔다.

 

마치 고목이 되어 버린 듯, 남자는 언젠가 잎사귀를 피워보았던 때를 추억 하듯 말했다. 유진이 여름공기를 마시며 커가는 나무와 같다면 남자는 어쩐지 성장을 멈춰버린 나무 같았다. 그러나 가을에 들어서자 육체적으론 완연한 회복세를 보였다. 다리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유진이 챙겨준 덕분인지 몰랐다.


남자는 밥을 먹지 않고 늘 라면 따위를 찾았다. 유진은 억지로 밥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계란이나 파는 물론이고 콩나물, 숙주 등을 넣은 라면과 국수를 만들어 주었다. 긴 얼굴을 따라 턱까지 내려온 긴 머리줄기를 한쪽으로 쓸어 넘기고 면발을 후후 불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짠하면서도 좋았다.

 

겨울이 되자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일을 떠나는 날이 늘었다. 두 사람은 일을 하러 나가면 이틀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유진은 그가 없을 땐 음악을 들으며 그를 생각했다. 그가 부재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었지만 그와 연결된 음악이 부재의 틈을 훌륭히 메꾸어 주었다. 함께 있을 땐 시골길을 쏘다니며 그동안 들었던 음악들을 이야기했다. 또한 유진은 자신이 연습했던 곡들을 남자에게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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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을 나서자 입구 근처에서 어떤 주정뱅이 영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노래방에서의 흥이 아직 살아있었다. 유진이 두려움을 핑계로 남자의 팔을 세게 부여잡았다. 살이 거의 없는 남자의 팔이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울 아버지도 술만 먹으면 그랬어. 뭐, 영어도 모르는 사람이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 그러면서 골목을 헤집고 다녔었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클레멘타인. 알고 보면 그거 참 슬픈 곡이죠. 그 곡 한 번 불러 줄까?‘

 

유진은 술에 취한 남자의 눈에 자신이 또렷이 비치고 있음을 보았다.

 

“오 마이 달링,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유진이 가사를 인용하며 대꾸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팔을 잡고 걷는 유진은 자신의 얼굴이 빨개지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원래 빨개지는 스타일은 결코 아닌데도. 남자는 무덤덤해 보였다. 둘 다 얼굴색이 잘 바뀌는 편이 아니었지만 남자의 경우가 더 심했다. 도통 속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의지로 뭔가를 들려주겠다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유진은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 남자의 방을 찾았다.

 

냉기가 도는 방안에서 둘은 잠깐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곧 유진이 한켠에 세워두었던 기타를 내밀었다. 잘 닦아놓긴 했지만 여전히 낡은 티를 벗지 못한 기타는 여전히 남자와 잘 어울렸다.

짧은 전주가 흐르고 잠시 후 술기운에 힘겹게 노래를 뱉어내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렸다. 초반부는 전혀 새로웠고 노래가 후반부에 들어선 후에야 유진에게 익숙한 구절이 귀에 들어왔다.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가사는 그러했으나 낭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자신이 상상한 분위기, 멜로디, 곡의 흐름, 그 어떤 것도 예상과 달랐다. 우울하고도 나약한 심성으로 가득 찬 노래는 남자와 기분 나쁜 정도로 잘 어울렸다.

 

Dreadful sorry

Clementine

 

곡의 마지막에 ‘착‘하고 기타 줄을 찰지게 내리치며 남자가 힘을 주어 가사를 토해냈다. ‘쏘리’라는 말과 ‘클레멘타인’이라는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 마이 달링 클레멘타인’이란 가사가 중간에 나오긴 했다. 유진이 기대했던 낭만적인 느낌은 고사하고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해가는 느낌.

 

‘왜 클레멘타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걸까?’

 

곡이 끝나고 유진은 한동안 멍했다. 어때요? 라고 쑥스럽게 묻는 남자에게 하나의 감정으론 설명할 수 없었다. 처음에 느낀 것은 생소함이었다. 그 다음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이었다. 그 다음은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준 최초의 남자를 만났다는 뿌듯함도 있었다. 반면에 자신을 낭만적인 상상에서 찾지 않고 생소한 우울함 속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러웠다.

 

‘클레멘타인’이란 곡을 부른 남자는 유진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이어서 기타를 쳤다. 아마도 유진에게 ‘클레멘타인’이란 한 곡을 들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몰랐다. 남자는 연주했던 곡과 매우 비슷한 곡들을 몇 곡 더 불렀고 유진은 말없이 들었다.

엘리엇 스미스.

 

방으로 돌아온 유진은 남자가 불렀던 곡들의 원곡을 모조리 들어보았다. 유진은 의외로 건장하고 남성다운 엘리엇 스미스를 사진으로 보았다. 그의 음악은 주로 어쿠스틱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포크와 록의 느낌이 섞여있었다. 예상대로 그의 음악은 우울하고 절망적이었다. 노래 대부분은 쳐지고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듣다보면 단순히 하강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무한히 아래로 향하면서도 스쳐 지나치기 어려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피요나 애플과 엘리엇 스미스.

 

유진은 이번엔 두 노래를 번갈아 들었다.

둘 다 쓸쓸한 느낌이었다. 피요나의 음악엔 어떤 의지가 느껴졌지만 엘리엇의 음악은 그 의지마저도 놓아버린 듯 했다. 유진의 마음 한 구석으로 두려움이 스몄다. 정확히 말하면 무방비인 자신에게로 밀려들어오는 두려움의 속도에 당황했다. 맑고 화창했던 마음에 갑자기 엘리엇 스미스라는 먹구름이 빠르게 퍼져서 순식간에 마음을 뒤덮고, 어느새 마음에 소낙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는 일련의 장면들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남자도 분명 거기에 매혹되었을 것이다. 비를 맞아서는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고 있는 느낌. 밤새 잠을 뒤척이던 유진은 새벽녘에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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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전주부분부터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일러준 코드와 스트로크를 바탕으로 느릿느릿 기타를 쳤다. 몇 번의 반복 후 유진은 자신의 기타연주에 노래를 얹어보았다. 웅얼웅얼 자신 없이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유진은 어느새 기타도 노래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듯 기타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줄곧 유진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지켜보던 남자는 학원선생님처럼 틀린 부분을 지적하거나 혹은 시범을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자신 속으로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유진의 생을 통틀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기타가 잘 안되니까. 노래도 잘 안 되네.”

 

유진은 한숨을 섞으며 말했지만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부 앞에서 연주를 할 때면 그 결과가 어떻든 성취감과 더불어 자존감도 커져갔다.

“특이하네. 보통은 남들 앞에서 기타치거나 노래 부르는 거 신경 쓰여 하는데.”

“하하, 그런가?”

 

유진은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좌우로 까닥까닥하며 다시 기타를 잡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그래. 그래서 미친년이란 소리를 듣지. 유진은 속으로 자신을 가볍게 비하해보았지만 한 번 솟아오른 마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어느새 남자는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시계는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한 기타연습은 3시간을 넘겼지만 유진은 하루 종일 이곳에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월로 접어든 낮은 좀 더 길어져서 햇살은 힘을 잃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싱싱해져가는 느낌이었다. 유진은 일어나 홀겹의 커튼을 쳤다. 방안이 더욱 아늑해지고 모든 소리는 잦아졌다.

유진은 한동안 평온하게 자고 있던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잠깐, 남자 옆에서 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뭐야, 나를 여자로 생각 안 하는 거야?’

 

평온해져 있는 남자를 보고 약간 기분이 꺾였지만 곧 본래 마음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손가락 밑이 쓰렸지만 여전히 기타를 잡고 있었다. 이런 시간, 이런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기 싫었다. 그렇게 반복 연습한 끝에 언제부터인가 기타가 조금씩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에 피오나 애플처럼 감정을 충실히 담아 노래 부르고 있는 자신이 좋아졌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드디어 핵심 가사에 다다르자 유진은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타와 노래와 자신의 감정, 더 나아가 지금의 이 순간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하고픈 결연한 의지까지 하나로 녹아들었다.

마치 우주의 건너편으로 옮겨진 듯 황홀함에 취해 유진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5

 

유진은 술잔을 꺾으며 미소를 지었다. 방안에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유진은 자신만 마시겠다며 술을 시켰지만 남자는 기어이 술잔을 털어 넣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을 보고 유진은 당황했다. 남자는 비실비실 웃으며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마셔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남자. 술을 마셔도 무섭긴 커녕 오히려 귀여워지는 남자. 그런 게 서울 남자인가? 유진은 그런 남자를 앞에 두고 연신 소주잔을 꺾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남자가 묻자 유진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실제로 많이 마시긴 했지만 회식자리와 비교하면 결코 과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니 술이 더욱 오르는 것을 느꼈다.

 

테이블 위의 소주병이 어느새 세 병이 되었다. 갈지 않은 불판엔 더 구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이어 유진도 술집을 나왔다. 거리엔 장사가 신통치 않았는지 일치감치 불을 끈 가게들이 즐비했다. 계산을 마친 유진이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찾았다.

 

담배를 피우며 일행을 기다리는 중년 남자들 사이로 남자는 길모퉁이에 한 그루의 벚꽃나무와 함께 서있었다. 꽃을 피워 자신을 단장하는 나무가 아니라 한없이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털어내며 자신을 지워가는 나무였다. 유진이 다가오자 남자는 나부끼는 벚꽃 잎처럼 웃었다. 퇴폐를 동반하지 않는 우울함이었다. 유진은 우울이 찾아오면 곧잘 거칠어지고 망가졌던, 그런 남자들 밖에는 몰랐었다.

 

“노래 부르러 갈래요?”

 

남자의 제안은 의외였다. 유진은 회사사람들과 자주 찾던 노래방을 피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노래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래방은 한산했다. 장사에 의지가 없어 보이는 주인은 어떤 방이라도 좋다는 듯 방 안내도 하지도 않았다.

둘이 들어선 방은 곰팡이 냄새가 나긴 했지만 가격에 비해 방이 넓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노래방하면 늘 레파토리가 정해져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뭘 불러야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남자가 첫 곡을 부르려고 마이크를 잡았다. 유진은 처음 듣는 팝송이었다. 기타선율로 시작되는 곡은 록을 바탕으로 했지만 발라드 쪽에 가까운 음악이었다. 제법 감정을 잡는다 싶었는데 의외로 남자의 노래는 형편없었다. 목소리 톤은 좋았지만 음정도 불안했고 리듬도 잘 타질 못했다. 일단 가사가 제대로 소화되질 않았다. 남자는 1절 뒤에 정지버튼을 누른 후 천진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 부르는 거라서.......그냥 막 불러 볼게요. 부르고 싶은 거는 뭐든.”

 

그는 마이크를 유진에게 넘기지 않고 다시 다른 노래를 불렀다. 이번 곡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귀에 거슬리진 않았다. 몇몇 소절에선 그만의 감성이 잘 녹아들기도 했다. 밭에서 막자란 못난이 감자를 먹는 느낌이었다.

 

둘은 닥치는 대로 번호를 눌렀고 노래를 불렀다. 불러 보고 싶었던 곡은 다 불렀다. 부르다 감정이 시들해지면 그대로 멈췄다. 단지 소리를 만드는 유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없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부르고 싶은 걸 부르는 것이 노래방의 근원적인 욕구일 텐데. 언젠가부터 노래방이란 곳은 자신도 기본적인 노래실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하는 피곤한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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