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전주부분부터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사부님이 일러준 코드와 스트로크를 바탕으로 느릿느릿 기타를 쳤다. 몇 번의 반복 후 유진은 자신의 기타연주에 노래를 얹어보았다. 웅얼웅얼 자신 없이 새어나오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유진은 어느새 기타도 노래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듯 기타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줄곧 유진의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벽에 기대어 앉아 지켜보던 남자는 학원선생님처럼 틀린 부분을 지적하거나 혹은 시범을 보이거나 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숨소리도 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지켜볼 뿐이었다.

마치 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상대를 앞에 두고도 자신 속으로 편안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유진의 생을 통틀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기타가 잘 안되니까. 노래도 잘 안 되네.”

 

유진은 한숨을 섞으며 말했지만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부 앞에서 연주를 할 때면 그 결과가 어떻든 성취감과 더불어 자존감도 커져갔다.

“특이하네. 보통은 남들 앞에서 기타치거나 노래 부르는 거 신경 쓰여 하는데.”

“하하, 그런가?”

 

유진은 기분이 좋아져서 고개를 좌우로 까닥까닥하며 다시 기타를 잡았다. 그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았다. 그래. 그래서 미친년이란 소리를 듣지. 유진은 속으로 자신을 가볍게 비하해보았지만 한 번 솟아오른 마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어느새 남자는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시계는 오후 4시를 넘기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 1시부터 시작한 기타연습은 3시간을 넘겼지만 유진은 하루 종일 이곳에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3월로 접어든 낮은 좀 더 길어져서 햇살은 힘을 잃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싱싱해져가는 느낌이었다. 유진은 일어나 홀겹의 커튼을 쳤다. 방안이 더욱 아늑해지고 모든 소리는 잦아졌다.

유진은 한동안 평온하게 자고 있던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잠깐, 남자 옆에서 자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뭐야, 나를 여자로 생각 안 하는 거야?’

 

평온해져 있는 남자를 보고 약간 기분이 꺾였지만 곧 본래 마음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손가락 밑이 쓰렸지만 여전히 기타를 잡고 있었다. 이런 시간, 이런 느낌을 그냥 흘려보내기 싫었다. 그렇게 반복 연습한 끝에 언제부터인가 기타가 조금씩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에 피오나 애플처럼 감정을 충실히 담아 노래 부르고 있는 자신이 좋아졌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드디어 핵심 가사에 다다르자 유진은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타와 노래와 자신의 감정, 더 나아가 지금의 이 순간을 누구도 빼앗지 못하게 하고픈 결연한 의지까지 하나로 녹아들었다.

마치 우주의 건너편으로 옮겨진 듯 황홀함에 취해 유진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을 때까지 부르고 또 불렀다.

 

5

 

유진은 술잔을 꺾으며 미소를 지었다. 방안에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유진은 자신만 마시겠다며 술을 시켰지만 남자는 기어이 술잔을 털어 넣었다.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을 보고 유진은 당황했다. 남자는 비실비실 웃으며 계속 술잔을 기울였다.

 

술을 마셔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 남자. 술을 마셔도 무섭긴 커녕 오히려 귀여워지는 남자. 그런 게 서울 남자인가? 유진은 그런 남자를 앞에 두고 연신 소주잔을 꺾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남자가 묻자 유진이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실제로 많이 마시긴 했지만 회식자리와 비교하면 결코 과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니 술이 더욱 오르는 것을 느꼈다.

 

테이블 위의 소주병이 어느새 세 병이 되었다. 갈지 않은 불판엔 더 구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자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이어 유진도 술집을 나왔다. 거리엔 장사가 신통치 않았는지 일치감치 불을 끈 가게들이 즐비했다. 계산을 마친 유진이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찾았다.

 

담배를 피우며 일행을 기다리는 중년 남자들 사이로 남자는 길모퉁이에 한 그루의 벚꽃나무와 함께 서있었다. 꽃을 피워 자신을 단장하는 나무가 아니라 한없이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털어내며 자신을 지워가는 나무였다. 유진이 다가오자 남자는 나부끼는 벚꽃 잎처럼 웃었다. 퇴폐를 동반하지 않는 우울함이었다. 유진은 우울이 찾아오면 곧잘 거칠어지고 망가졌던, 그런 남자들 밖에는 몰랐었다.

 

“노래 부르러 갈래요?”

 

남자의 제안은 의외였다. 유진은 회사사람들과 자주 찾던 노래방을 피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노래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노래방은 한산했다. 장사에 의지가 없어 보이는 주인은 어떤 방이라도 좋다는 듯 방 안내도 하지도 않았다.

둘이 들어선 방은 곰팡이 냄새가 나긴 했지만 가격에 비해 방이 넓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노래방하면 늘 레파토리가 정해져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뭘 불러야할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남자가 첫 곡을 부르려고 마이크를 잡았다. 유진은 처음 듣는 팝송이었다. 기타선율로 시작되는 곡은 록을 바탕으로 했지만 발라드 쪽에 가까운 음악이었다. 제법 감정을 잡는다 싶었는데 의외로 남자의 노래는 형편없었다. 목소리 톤은 좋았지만 음정도 불안했고 리듬도 잘 타질 못했다. 일단 가사가 제대로 소화되질 않았다. 남자는 1절 뒤에 정지버튼을 누른 후 천진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 부르는 거라서.......그냥 막 불러 볼게요. 부르고 싶은 거는 뭐든.”

 

그는 마이크를 유진에게 넘기지 않고 다시 다른 노래를 불렀다. 이번 곡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귀에 거슬리진 않았다. 몇몇 소절에선 그만의 감성이 잘 녹아들기도 했다. 밭에서 막자란 못난이 감자를 먹는 느낌이었다.

 

둘은 닥치는 대로 번호를 눌렀고 노래를 불렀다. 불러 보고 싶었던 곡은 다 불렀다. 부르다 감정이 시들해지면 그대로 멈췄다. 단지 소리를 만드는 유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도 없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부르고 싶은 걸 부르는 것이 노래방의 근원적인 욕구일 텐데. 언젠가부터 노래방이란 곳은 자신도 기본적인 노래실력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하는 피곤한 놀이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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