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끝없는 권태가 밀려왔다.

드리워진 커튼 밖으로 화창하게 맑아있을 겨울 하늘이 눈에 선했다. 직접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없이 차가워진 대기 사이로 불어닥치고 있을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창밖으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일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추워졌기 때문일까.

 

전기장판 위에 움츠린 채 고개를 이불 밖으로 내밀어 본다.

차가운 방 공기에 다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먹기도 싫고 뭔가를 하기도, 보기도 싫었다.

끊임없이 틀어놓았던 컴퓨터와 TV도 모두 꺼버렸다.

심지어, 전화 올 곳도 없지만 전화기 조차 꺼버렸다.

 

추운 겨울,

누군가 만나기 위해 옷을 켜켜히 껴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거리를 향해 걸어 나갔던 것이 언제였을까?

 

그렇게 추억을 더듬다 잠이 들고 다시 잠에서 깨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미워하고 헤어졌던 기억들을 더듬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어느새 옅은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벽으로 스며드는 외풍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또 얼마나 추위에 떨 것인가.

 

몇 번의 잠과 현실을 오가는 동안 몸은 나른해졌고 정신은 명료해졌다.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다만 감각은 푹 쉰 덕분에 충분히 날카로워져있었다.

 

그때 뒤집어 쓴 이불 밖으로 이상하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방 안에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 가위에 눌린 건 아닐까. 하긴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큼 외로웠던 걸까.

 

들어와 봐야 훔쳐갈 것도 없었다. 지금 자신을 죽일테면 죽여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아래로 떨어질 것도 없었다.

 

나는 청각만을 키운 채 꼼짝도 없이 이불 속에서 머물렀다. 가볍게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는 소리.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가방을 챙겨주던 누나의 움직임과 닮았다.

 

이젠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큰 누나가 여기로 온 것은 아닐까?

 

잠시 후 방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 쪽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밥짓는 소리일까.

곧 후각을 열어 보지만 구수한 밥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뀐 것은 없었다. 아무 것도 없던 ‘무’에서 어떠한 ‘유’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유’라고 할만 것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가재도구들에서 약간의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잘 정돈하는 편이라고 자부는 하지만 어제 이후로 모든 물건들이 더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이다. 주방의 식기와 팬은 모두 각을 맞추고 있었고 행거의 옷걸이들도 한 방향으로 옷들을 걸어두고 있었다. 개켜진 옷들도 사각의 귀가 딱딱 들어맞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침입자는 집안 곳곳을 조사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아내겠다는 것이 아닐까.

굳이 가져갈만 것도 없는데.

 

얼마 뒤 나는 아주 운좋게 알바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집을 비우고 배를 채우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한동안 겪었던 야릇한 경험은 곧 반가사 상태에서 느낀 착각쯤으로 생각했다. 이후로 집은 늘 텅 비어있었다. 따로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나는 거의 종일 일을 했고 일을 하면서 모든 끼니를 밖에서 때워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 불도 켜지 않고 그대로 전기장판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잤고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미친듯 석달을 일하자 이번에도 여지없이 일자리를 잃었다. 성격탓도 있겠지만 어느 업소의 주인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내 탓으로 돌렸다. 어눌하고 말주변도 없으며 심지어 어두운 성격은 늘 독박을 쓰기에 최적의 캐릭터였다.

 

단지 몇 달 굶지 않을 돈이 있기에 나는 다시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과 TV를 보며 지냈다. 그러자 몇 달전의 그 야릇한 일이 생각났다. 그후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물건은 그때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도 않았다. 나는 무의식중에 물건을 함부로 놔둬 보기도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은 또렷해졌다. 그 새벽에 들었던 소리는 분명 환청은 아니었다. 그 생각에 자꾸 빠질수록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날 하루 인가.

왜 다시 나타나지 않는거지?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곤 문득 깨달았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점 말이다. 이불 밖으로 들리는 저 소음들이었다. 영혼 없는 인간들이 떠들어 대는 저 상스러운 대화소리와 미세하지만 노트북의 팬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가끔씩 울리는 이 전화소리 말이다. 나는 쥐죽은 듯 가라앉아있었던 그날의 정적을 기억해 냈다.

 

나는 당장 일어나 모든 소음들을 제거했다.

문제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었다. 많지는 앉지만 주기적으로 들리는 자동차 소음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을 덮고 귀를 세웠지만 역시 그 미지의 존재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를 기다리며 잠깐 잠이 들었다 깨었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외부는 그날처럼 고요했다. 그러고 보면 새벽 4시쯤이면 늘 세상은 진공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차도 인간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녀가 온 것이다.

분명했다.

뒤집어 쓴 이불 밖 어딘가에 그녀가 앉아있는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컴퓨터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컴퓨터가 켜지는 소리였다.

나름 고성능 노트북이라 소리는 작았지만 확실했다.

 

그녀가 지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겠구나.

 

나는 숨죽이고 지금의 장면을 상상했다. 불꺼진 방에서 새어나오는 모니터 불빛에 얼굴을 들이밀면 그 모습은 얼마나 괴기스러웠던가. 하지만 전혀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바람만이 간절했다.

 

저번 방문이 나의 물질적인 것들을 확인하려 했다면

이번엔 내 정신적인 것들을 체크하려는 것일까?

 

나는 갖가지 생각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아주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그리고 내 눈이 서서히 외부의 빛과 조우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노트북은 켜져있었고 불빛도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불빛에 빛나는 긴 머리를 어깨 밑으로 드리운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누나.

 

나는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불렀다.

목소리는 터지지 않고 안으로만 삭혀졌다.

온몸에서 두려움 대신 그리움이 샘솟았다.

두려움이란 싸늘한 감정은 봇물터지는 듯 쏟아져 나오는 그리움에 잠겨 들어갔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노트북은 꺼져있었다.

그 어디에도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켰다 끈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신했다.

그건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나가 맞을까? 왜 얼굴을 보지 못했을까. 그 뒤로 몇일 밤 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유는 알고 있있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꺽꺽 소리나는 것을 참으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소리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이 바보야.

눈물을 그쳐.

 

하지만 밤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리움에 눈물을 쏟아내고 지쳐 잠이 들곤 했다. 그날 밤도 그렇게 눈물을 흘렸었다. 몇일 동안 눈물을 쏟아내자 이젠 소리내지 않는 눈물이 가능했다. 그저 눈물이 눈가에 맺히는 정도였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내가 누운 전기장판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소리에 그녀가 달아날 것만 같았다.

다만 그녀가 이불을 걷어주길 원했다.

그렇게 나를 데려가주면 좋으련만.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참았다.

완벽한 적막과 진공의 상태는 그렇게 짧게 유지되었다.

 

제발

제발

가지마.

 

간절한 기도가 이어지고 있을 때

불현듯 나는 나에게 남은 마지막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때 비로소

베개에 댄 귀에서

가늘게 뛰고 있는 내 심장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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