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원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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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11월의 거리는 밤이 끝났음에도 어둑했고, 식료품점 주인이 놀랄 만큼 바람이 벌써 날을 세웠다. 길가에 놓인 우유 상자 두 개를 옮기려고 몸을 숙이자, 바람에 앞치마가 날려 그의 얼굴을 가렸다. 』


첫 문장의 온도는 글의 분위기를 말해주기도 한다. 겨울 냄새를 맡으며 서성이던 이른 11월의 가을바람이 그의 얼굴을 앞치마로 가리는 건 ‘고립’의 예고였을까. 초겨울을 거부한 상태로 날을 세운 바람을 이겨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식료품점 주인 유대인 모리스와 점원인 프랭크에게서 묘하게 겹치는 부분을 발견했다. 해함을 실행에 옮겨 고통받는 프랭크와 타인의 고통을 짐작하는 일에도 죄의식에 빠지는 모리스는 ‘해소‘의 길을 찾는다는 점이다. 격이 다른 고통이지만 향하는 곳은 현재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유대인이 믿는 율법에 의해 성실과 선함을 강조하면서 유지가 힘든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모리스는 경제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의 호소에는 적절한 대응 대신 고립에 동참을 권할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만큼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방법은 없다며 모리스는 식료품점이라는 고립을 택한 걸까? 심심한 캐릭터인 모리스에게 점원 방랑자 프랭크를 두어 강도와 강간의 강수로 흔들어 놓지만, 가족도 외면하던 모리스가 믿는 율법에 반응을 보이며 스토리는 애틋함으로 연결된다.


주변 상점들의 발전과 활기로 소규모로 전락하고 마는 식료품점을 지키는 일과 사건, 사고의 소란은 피하고 물 흐르듯 살고 싶은 마음을 풀어낸 소소한 이야기가 매우 현실적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맬러머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두가 유대인입니다. 비록 그걸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맬러머드는 프랭크를 통해서도 말한다.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에 유대인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 웃기다.”


언급을 피하려고 했으나 유대인 하면 홀로코스트가 떠오른다. 솔직히 ‘점원’ 또한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조용한 항변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착오였음을 인정하는 순간은 책을 덮기 직전이었다. 4월의 어느 날 프랭크의 포경 수술로 이틀 동안 다리 사이의 고통이 분노와 영감을 주었으며 이어서 유대인이 되었다는 말에, 유대인의 조용한 항변이 아니라 고립과 고통으로부터 의미 있는 무엇을 발견하지 못한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게 하여 인간적인 면을 추가하게 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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