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이면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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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와 착 달라붙는 첫날의 일들과 여러 감정은 내 기억에서 잊힐 날 없이 살아 있을 것이다」



자그마한 하얀 꽃송이가 가득한 남색 옷차림의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다짐이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은 세상을 여행하지 않도록 그는 막으려고 노력했다. 그 세상 어느 곳에 숨어 있을 무서운 것을 만날까 두려워서이다. 하지만 그 세상을 막기란 불가항력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노력을 거둬들인다. 새로운 세상의 황홀함에 저항할 수 없어, 그는 청춘의 마음이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도록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금지된 사랑의 괴로움 속에서도 인생 최고의 축복이라 여기며, 그녀를 향한 생각을 가슴속에 내버려 두는 대신 밖으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러나 한때 그의 목보다 그녀의 발이 보호받아야 마땅하다며, 목에서 커다란 스카프를 풀어 그녀의 새하얀 발 위에 덮어주었던 그는, 시간의 흐름과 그에게 맡겨진 사명을 되새기며 그녀를 향한 마음도 조금씩 기억 속에 덮기로 한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에게 이상함을 금할 수 없어. 왜냐하면 지나온 시간에 내 행복을 이루었던 중요한 부분은 나에게 일어난 실제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어떤 것에 대한 희망 또는 기대였기 때문이지. 지금에 와서도 내 삶은 아직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네. 진정한 행복은 여전히 앞날에 표류하고 있어. 나는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고 희망하지. 그리고 기다리고 있어」



진정한 행복은 행복이 시작되기 전, 부푼 기대감으로 둘러싸인 상상 속에서 극대화된다. 그래서 헛된 꿈과 희망일지라도 품고 사는 건 나쁘지 않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썸을 타고 있을 때가 설렘과 떨림의 복잡한 감정으로 인해 온종일 바보처럼 웃게 만드는 힘이 있지 않은가. ‘그림의 이면’은 고전답게 예의 바른 썸과 바보처럼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불타는 마음을 전달하는 「그림의 이면」이다. 절제 속에서도 너무나 강렬했던 그의 구애와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춘 고백에 힘을 쏟는 그녀의 애잔함이 가슴 아프게 그려진다.



「그림의 이면」의 고전적 사랑의 형태가 현시점에서도 설득력있게 다가온 것은, 아름답고도 절제된 문체 속에 예의를 갖춘 도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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