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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의 세이지 - SF오디오스토리어워즈 수상작품집
본디소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0월
평점 :

원래 감동이 오래가지 않고 바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게 싫어서 단편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조예은작가의 <칵테일, 러브, 좀비> 이후로 단편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을 본 이유는 제목 때문이었다.(읽기 전엔 몰랐다, 이 세이지가 그 세이지가 아닌 줄은)
<온 세상의 세이지>
좋아하는 허브티 이름이랑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읽은 책인데 알고보니 주인공 이름이었다.
갑작스런 인지 부조화로 첫 페이지부터 서 너 페이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러다 곧바로 깊이 빠졌다.
홍사현과 세이지는 '독버섯'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오, 손댈 거면 각오하시오, 피해는 내 탓이 아니오.'라는 말로 그 둘을 설명해버린다.
필요에 의해서 사귀게 된 것처럼 되었지만, 아주 담백하면서도 차갑게 헤어지게 되는데
곧바로 이어진 사고와 세이지에게 폭풍이 순식간에 지나가게 된다.
'어떡해'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어나가다보면 'SF소설이다'라는 걸 잊었냐는 듯이 새 이벤트가 등장한다.
가상현실이라고는 VR기계를 머리에 쓰고 본 경험(누가봐도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림 속이구나 싶은 화면만 보았다) 뿐인데도
순식간에 함께 화면 안으로 들어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이지다운 '안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싶어 울컥했다.
<사랑의 블랙홀>
처음엔 재수하는 딸과 잘 나가는 직장인인 엄마와의 시시콜콜한 다툼과 화해를 다룬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다 우주선이니, mov 확장자 파일을 옛날 디스켓처럼 말하는 것을 보고 공상과학 이야기인가 했는데
파일을 읽고난 다음부터 펼쳐지는 이야기가 앞선 착각들을 바로잡아준다.
온통 시커먼 우주를 유영하는 1인 우주선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는 우빈과
커리어 때문에 딸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모든걸 포기하고 딸을 선택한 것이었던 소영
처음에 단편이 싫었던 이유가 감동을 오롯이 느끼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어서였는데,
요즘 단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동을 잊기도 전에 새로운 이야기에 흡입되는 것 때문이다.
또 빠져버렸다.
또 인상적이었던 글을 적어보자면
<저장>이다.
Save의 저장이 아니라 장례 서비스로서의 '저장'과 그리고 '환생'이 등장한다.
이 글은 뭐라고 해야될까 SF설정은 있는데 이야기를 끌어가는 하나의 장치로만 여겨질 뿐, 이야기의 서사가 더 돋보인다.
군 입대 하기 전, 고작 말 한 마디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틀림없는 '가해'와 '방관', '동조'를 한 아들과
엄마와 할머니, 이 셋의 이야기이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그저 인자한 할머니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손자와 엄마의 갈등으로만 느꼈는데,
'저장'과 '환생'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과 할머니의 숨겨둔 이야기에 사로잡혔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SF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중단편이라 그런지
새로운 그들의 세계를 설명하는데 긴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재빠르게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긴다.
단편의 매력에 계속 빠지게 되는, 아주 재밌는 책이다.
다시 읽어봐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