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병동은 종합병원 안에서 좀 특별한 곳이다. 육중한 철문과 자물쇠로 다른 공간들과 격리되어 있다. 병실 창문에는 쇠창살이 처져 있고 유리창은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다. 만약의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병실 문들은 안에서 잠글 수가 없다. 요즘은 구석구석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여, 간호실에서 한눈에 모든 것을 살펴 볼 수 있게 시설해 놓은 곳도 있다.
정신과 병동에는 여자 간호사도 있지만 남자 간호 보조원들도 있다. 자해의 위험을 대비해서 푹신한 매트리스를 깔아 놓은 격리실도 있다. 정신과 병동은 언뜻 감옥을 연상케 한다. 격리와 보호를 위한 장치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그곳에는 격렬한 갈등과 고뇌, 절망과 희망들이 있다. 그리고 거기, 오래 잊을 수 없는 한 환자가 있었다.
십여년전 어느 밝은 봄날 오후, 20대 초반의 한 젊은이가 벚꽃의 화사한 밝음으로부터 저 철문을 열고 이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 고통의 냄새와 회한의 한숨 사이로 순박한 웃음들이 어우러져 소란스럽던 병동이 일순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손에는 수갑을 찬 채 두명의 전투경찰을 양쪽에 대동하고 교도관에 이끌려 병동문을 들어섰다. 교도관이 법원에서 작성한 서류를 내밀었다. 존속 살인 혐의를 받고 재판에 계류중인 자로 정신감정을 의뢰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를 살해한 경우는 아버지 쪽보다 훨씬 드물다. 어머니를 칼로 살해한 사람을 처음대할 때는 아무 생각도 말아야 한다. 전에 본 어떤 끔찍스런 영화를 떠올려 전율의 귀감으로 삼는다거나, 과거의 두려웠던 기억들과 비교하면서 불안을 이겨내려고 해보았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말고 그저 그의 얼굴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작심을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바삐 떠올라 허둥대면서 그와의 첫 면담을 시작했다.
'그의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흔연스럽게 대했어야 했는데... 그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쳤을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실은 나보다도 그가 더욱 여유 있고 당당했으니까. 살인을 범한 사람으로서 자책의 흔적이라도 있을 법한데 왜 그리도 차분했던지. 자신의 신상에 대해 묻는 의사에게는 별 관심도 없었고,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이것저것 두서없이 묻다가 첫 면담은 끝났다.
얼떨떨한 마음이 가시고 , 그날의 면담 기록을 정리하면서 그의 푸르도록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날카로운 눈가에 가끔 이는 냉소적인 웃음과 차분한 음성이 뇌리에 맴돌았다.
" 아저씨, 여기 언제까지 있어야 해요?"
" 한 열흘쯤이오, 그런데 왜요?"
" 빨리 교도소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거기가 좋은데... "
'거기가 좋은데... 거기가 좋은데....'하는 말이 모두 잠들어 적막한 정신과 병동을 휘감고 메아리치는 듯 했다. 왜 거기가 좋았던가? 왜 빨리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가?
첫 면담에서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 정신분열증이거나 분열형 성격 장애 쯤으로 보였다. 자신의 현실에 맞지 않게, 사회에 나가게 되면 공부해서 미국으로 유학 가겠다고 했다. 하버드나 예일 대학에 입학할 것이고, 그 다음 일들은 정부의 높은 사람이 자기 뒤를 봐줄 것이라고 했다. 전에는 안기부에서 자신을 추적했는데 요즘은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자기에 대한 정보를 다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이 고단하고 괴로우면 그런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누구나 공상을 한다. 가난한 사람은 재벌을 그려보고, 힘없는 사람은 대통령을 꿈꾼다. 상대방이 미울 때는 편견을 만들기도 한다. 경상도가 전라도에 대해서, 전라도가 경상도에 대해서 편견을 만들 듯이. 죽음이 두려우면 종말론을 믿고,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유언비어도 만든다. 그 연장선 위에 망상이 있다.
망상은 내적 욕구를 충족하고 안정감을 지지하는 최후의 심리적 보루다. 비현실적이어서 누구도 믿어주지 않지만 자신은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이다. 과대망상은 자존심을 지켜주고, 피해망상은 죄책감을 남에게 떠넘김으로써 양심을 지켜준다. 소위 미쳤다는 사람들에게도 지켜야 할 자존심과 양심은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50대 중반의 여인이 찾아왔다. 면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섰지만 문닫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어귀에 서서 망설이고 있었다. 의사에게 가까이 다가 서기가 두려운 듯 시선은 목표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었다.
"애 엄마예요."
"예?"
"어제 온.. 정신감정 하려고."
"예? 무슨 말씀이세요?"
이해 안 된다는 이편 말에 부인은 더욱 당황한 듯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는 부인의 입에서 신음처럼 무슨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 알았나요? 그럼 돌아가신 분이 어머니가 아니었던가요?"
그제서야 조금 다가서면서 더듬더듬 자기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감정인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종합해서 옮겨보겠다.
그는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애들 아버지는 조그만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업가의 집안이 대개 그렇듯이 사업이 비틀거리면 온 가족이 같이 힘들었다. 신경이 날카로운 아버지는 밖에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집에 와서 화풀이를 해댔다. 그는 자기 중심적이고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뒤엎고 다시 세우기를 몇번 반복하다가 여의치 않자 일수 장사로 돌아섰고, 그때부터 집안 경제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렇지만 온 가족은 아버지의 눈치만 살펴야 했다. 술이라도 취해 들어오는 날에는 아버지 눈에 띌까 무서워 모두 숨기에 바빴다. 환자는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개구리 마을에서 개구리들이 모여 회의를 했단다. 뱀들이 개구리를 잡아 먹어대니 그들을 지켜 줄 왕을 모셔오기로 했다. 날카로운 부리로 뱀을 쫓아낼 수 있는 황새를 왕으로 모셨다. 개구리 마을에 한동안 평화가 왔다. 그런데 뱀들이 사라지자 심심해진 황새는 개구리를 쪼아 잡아먹었다. 말하자면 그의 아버지는 황새였다고.
아버지의 여자 관계는 복잡했다. 아예 두집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항상 우울함과 번뇌 속에서 헤매던 어머니는 넋두리를 해대며 술로 아픔을 씻어냈다. 그러다 보니 막내를 잘 돌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폭풍우 속이었고, 집에 오지 않는 날들은 작은 파도 하나 일지 않는 적막한 바다 같았다. 막내는 그 바다 위의 조그만 돛배였다.
부모들이 싸울 때 아이는 울었다. 부모의 싸우는 소리가 자기 귀에 들리지 않게 크게 울었다. 울다가 혼나면 골방에 들어가 혼자 울었다. 조금 더 커서는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서 싸우는 부모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아이는 내성적이고 수동적인 이이로 자랐다. 그러던 와중에서 부모는 이혼하게 되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호적 밑에 그대로 두고, 양육은 어머니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 양육비를 타오게 했다. 아버지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서 였을까? 아이는 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법적으로 어머니가 된 또 다른 어머니의 냉랭한 눈초리를 가슴 속에 잠재워야 했다.
학교에서는 단체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아파서 수업을 빼먹거나 남과 어울리지 못하며 성적이 저조한 그런 문제였다. 그러다가 중학교 때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각이 잦아서 그것을 보다 못한 선생님이 호되게 매질을 했다. 두려움이 많은 아이는 선생님의 매질에 무서웠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당시의 진료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자가 썩어서 똥으로 빠져 나와요, 창자가 없어져요."
기껏 열몇살 쯤 되었을 아이에게서 '속이 썩는다' 는 마음이 신체 망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아이는 학교를 자퇴하게 되었고 더욱 위축되었다. 날이 어두워져야만 골목길을 돌아다녔고,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다는 마음에 자기 내부로만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길에서 지나가는 어린아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려 보았다. 아이가 그를 보고 무서워서 울며 달아나자 신기했다. 그래서 가끔 조그만 아이가 지나가면 몇 대 때려 보기도 했다.
"애 때리는 것이 재미있어요. 우는 것이 신기해요. 잠자리에 누워서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잘 와요."
자기도 남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힘 없는 그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기 발견이었다. 그런 행동을 통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와 함께 환청도 심해졌다.
"나쁜 놈, 죽어버려! 병신 같은 놈."
소리들은 그 누군가의 익숙한 목소리처럼 멀리서 다가오더니 그의 머릿속에 둥지를 틀었다. 누군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해망상과 함께 과대망상이 펼쳐지면서, 자신이 어떤 때는 우주에서 온 전사로 느껴지기도 했다. 심연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압도해 오면서 망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가?' 자문하던 그에게 어린시절 폭풍우를 몰고 다니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을 버리고 나서도 양육비를 핑계로 식구들을 괴롭히는 아버지가 그의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비수를 품고 아버지네 집으로 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었고 냉랭한 또 다른 어머니가 비웃고 서 있었다.
까뮈의 <이방인> 뫼르쏘는 작열하는 태양 때문에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였다. 부조리한 운명처럼 보이는 일도 최소한의 이유는 있는 것인가?
스페인의 민중화가 고야의 작품 중에 사름을 잡아먹는 거인을 그려 놓은 무시무시한 그림이 있다. 고대 신화에서 제우스와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신들과 인간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우스에게도 크로노스라는 아버지와 레아라는 어머니가 있었다. 크로노스는 자식에게 자신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갓 태어난 자기 아이들을 삼켜 버렸다.
자식들의 그런 운명을 안타까워한 레아는 제우스를 임신하자 크레타 섬으로 도망가서 아이를 낳았다. 제우스는 장성한 뒤 아버지와 전쟁을 벌려 그를 무한 감옥인 암흑의 타르타로스에 가두어 버렸다. '시간'의 의미를 갖는 크로노스를 제압함으로써, 생명의 유한성을 극복한 제우스는 신들의 제왕이 되었던 것이다. 환자도 영생을 얻기 위해 개구리 나라의 왕이었던 아버지를 무한 감옥으로 보내려 했던 것일까?
정신과 병동도 감옥이다. 광기의 감옥이다. 이성(理性)의 이름으로 족쇄 채워진 비이성(非理性)의 유배지다. 그러나 감옥은 정신과 병동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감옥 밖에, 이성으로 비이성을 질타하는 밝은 세상에도 감옥의 높은 담장이 드리워져 있다. 광기란 이름의 비이성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격리와 보호의 장치들로 겹겹이 무장한 명정(明正)의 감옥이다.
그 감옥 속에 있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에 대해서 웃으면서 말한다. 검은 것을 희다고 말하거나, 어두운 것을 밝다하면 정신 병원에 가야한다고. 왜냐하면 미친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이니까.
상호적 관계를 통한 화해의 여지가 없는 그것에서 흑과 백의, 어둠과 밝음의, 광기와 이성의 이분법이 시작한다. 밝은 빛 속에서 별들이 제 빛을 잃어버리듯이,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성의 잔인함에 쫓겨 정신병동의 감옥으로 유폐된다. 그렇지만 그들은 거기서 비로소 안식을 찾는다. 이성의 질타로부터, 다수의 횡포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겹겹의 방호막을 친다. 그들은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몰이해와 편견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신과 병동의 출입문은 철문으로 되어있다.
교도소의 육중한 철문도 그에게는 아마 마찬가지였으리라. 교도소에서의 생활은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삶이었다. 살인범이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감방을 쓰던 죄수들로부터 특별 대우를 받았던가 보다. 그의 생애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관심과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감방 안에서는 그를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거기서 처음으로 행복했다. 치료받은 적이 없었지만, 교도소에서 지내면서 증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던 것 같다. 감정 당시 환청은 거의 없었고 망상도 정도가 심하지 않았으며, 논리적인 사고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저는 교도소 감방이 좋아요. 빨리 보내주세요."
그는 교도소로 돌아갔다.
어둠과 밝음의, 광기와 이성의 변증법은 새로운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명정의 감옥에서 도망쳐 행복한 감옥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는 아마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을 테고….
- 이 글은 몇년 전 월간 예향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