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변주곡(variations)이라는 말을 접하게 될 때 쉽게 떠올리게 되는 여러 작곡가들의 다양한 곡들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헨델의 블랙스미스(대장장이), 모짜르트의 작은 별 테마 변주곡, 그리고 어떤 것 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플레이어에 걸어본다. 이 곡은 그 기원에 대해 꽤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후대에 바흐의 전기 작가 포르켈(Forkel)의  근거 없는 조작일 것이라는 강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 곡이 일종의 불면증 치료제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마치 기원과 같이 따라다닌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이라는 소설이 전달하는 토니-토머스, 하워드-클로디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브래드쇼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어떤 기원과 파생된 것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변주곡이란, 특히 지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경우, 언제나 원래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테마에서 시작해 여러 복잡한 변주들로 산개하다가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는 형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곡들을 계속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떤 것이 원래의 주제이고 어떤 것이 변주된 주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같이 완전하게 정립되어 있는 완결성을 지닌 변주곡들에 경우, 원래의 주제가 되는 동기와 변주들은 확연하게 나뉘어지며 청자가 이를 착각하여 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주곡의 각 테마가 연주될 때 변주되는 각각의 동기들 사이에 있는 그 분명한 불연속이야말로 지금 듣고 있는 모음곡에 변주곡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기실 이러한 불연속 또는 비일관성은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역시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 사이에, 아니 더 나아가 각 커플들의 삶에 내재해 작품을 이루는 어떤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을 통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 서사의 중심축이 되는 토머스와 하워드 두 브래드쇼 형제들의 가족을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토니-토머스: 젠더적 불일치

토머스. 그는 아내의 학과장 승진을 계기로 직장을 떼려치우고 집안에 들어앉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피아노 연주. 보다 완벽한 음악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보다 영혼이 담긴 연주를 해낼수록  집안은 어질러져가고, 싱크에는 씻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간다. 그를 둘러싼 세계 역시 바뀌어간다. 토머스의 피아노 선생은 게이 커플. 왠지 그들이 꺼려지는 그였지만, 같은 음악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그들도 동일한 인간임을, 보다 완전한 연주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동료들임을 깨달아간다.

토니.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시간강사직으로 근무하던 대학의 영문학과장을 맡을 기회를 얻게 된다. 남편과의 상의 끝에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 살기로 결정. 토니는 자신의 생활에 대체로 만족스럽다.(물론 딸이 자신 보다 남편과 더 친해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어딘가 서운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얻고 싶었던 남성의 특성, 지위, 역할, 말하자면 힘을 얻게 된 토니는 나름 자신의 지위를 쌓아간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은 그들의 역할 전환에 대해 반기지 않는다. 젠더적 불일치, 그 원인이 현실의 문제로 인한 혹은 선택에 의한 것이던 이것은 전체적인 선율 가운데 어떤 불협화음 또는 강렬한 소음을 낼 수 밖에 없는 문제다. 토니의 친정집, 그러니까 안토니아**의 친정집에서 토머스의 장인, 장모는 이 두 사람의 역할 전환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심경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토머스의 본가에서도 마찬가지.

게다가... 안토니아에게는 자신이 얻기 바랬던 남성적 측면 이외에도 여전히 여성으로서 채워야만 할 욕망이 있다. 남편에게서 더 이상 그런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 안토니아는 결국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에게서 남편에게는 없는 권위와 안정을 찾는다. 토머스 역시 아무리 자신이 여성의 젠더적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 스스로 남성이라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그들의 딸아이가 갑작스럽게 아팠던 날 그는 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여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읽고 있던 책에 푹빠져 있다가 아이의 병세가 어떤 것인지 감지하지 못하고 병을 악화시키고 만다. 아이는 목숨을 건졌는지 모르나 뇌수막역 증세로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게 토머스-토니의 1년간의 실험은 끝을 맺게 된다.

하워드-클로디아: 욕망, 섹슈얼리티

하워드. 그는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나름 젊은 시절부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클로디아는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하워드를 만나 과정을 다 끝내지도 않고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집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세 아이들과 이 아이들 보다 더 집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스키틀이라는 개 한마리가 있다. 그녀는 항상 아이들, 그리고 마치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심한 하워드 - 물론 그녀는 매우 사랑하기는 하지만 - 의 삶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살고 있다.

클로디아. 그녀의 꿈은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자신의 작업에 매진할 시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완성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아이들과 남편의 필요에 의해 희생되며, 그녀의 욕망/꿈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유지를 위해 금지된다.

물론 클로디아와 하워드는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서로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자체가 애초에, 그리고 이 가족이라는 제도 가운데 더더욱이, 어떤 접점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한다. 라깡의 유명한 아포리즘과 같이 "성관계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지속된다. 비록 하워드의 사랑은 클로디아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하고, 클로디아는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도래하는 꿈을 꾸며, 가족의 필요를 위해 살아가지만, 그들의 '여행'은 이어진다. 언제나 '돈이 부족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오는 알 수 없는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은 위태위태하게 지속된다.

가족: 되돌이표, 반복 그러나 처음과 똑같지 않은...

토니-토머스는 딸아이의 뇌수막염 판정과 청각 장애를 계기로 다시 토머스-안토니아로 돌아가며 이 변주곡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하워드-클로디아의 가족 역시 위태위태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반복은 최초와 같은 주제의 단순한 반복이라 할 수 있을까.

커스크가 상당히 행하는 상당히 단속적인 서술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토니-토머스/토머스-안토니아의  실험과 하워드-클로디아의 여정은 가장(혹은 사회적 통념에 의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하나의 빗금쳐진 전체, 즉 비전체로 확인해낸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제도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는 원래 테마의 반복 또는 되돌이표의 연주에서 결코 하나로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가부장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셈해지는'**** 가족이라는 제도는 결코 온전한 것일 수 없다. 결국, 커스크의 서사를 통해 이르게 되는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인 성역할로서의 젠더 그리고 성적 욕망과 연관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 남자가 여자와 같이 되고 여자가 남자와 같이 될 때...


잠시 얼마 전 내가 번역하여 출간된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책의 논의를 잠시 덧붙이고자 한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제닝스는 이 책을 통해 교회의 동성애 혐오에 어떠한 성서적 근거도 없음을 논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결코 동성애를 위한 권리 주장에서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성애 전반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가 일종의 굳어져 버린 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물론 그에 대한 성서적인 또는 성서에 가까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닝스가 소개하는 예수는 분명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성서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증거들은 정상적인 성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능적 차원의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단순히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관용을 베푼 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경계를 허물고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과 동등한 자들 위치에 처하려 했던 인물이다.

 

제닝스가 소개하는 예수는 분명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성서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증거들은 정상적인 성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능적 차원의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단순히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관용을 베푼 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경계를 허물고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과 동등한 자들 위치에 처하려 했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성애적/젠더적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윤곽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의 보존 혹은 출산을 담보하는, 그리고 후손의 생산을 통한 자기 재산의 보존과 자기 안정을 지지하는 그런 형식의 가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결코 온전할 수 없는 비전체로서), 예수의 공동체는 신 안에서의, 즉 하나님 안에서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로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제시한다.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의 재구성이다. 예수가 파송하는 둘씩 짝지은 제자는 마치 노아의 홍수 설화가 말하는 각각의 동물 종들이 둘씩 짝지어져 방주에 태워졌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신의 숨결에 의해(혹은 성령으로)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준다. 이 신의 숨결에 의해 다시 태어난 자들은 새롭게 구성되는 가족 가운데 새롭게 받아들여진 아이들이 되고, 형제/자매가 되며, 어머니들이 된다.******  가족은 해체되고 신 안에서 - 무신론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있지만 있지 않은 아버지의 이름 하에 - 새롭게 재구성된다.*******

하나님 나라 혹은 인간이 원하는 행복(또는 전적인 향유,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바로 이러한 능동적으로 새롭게 구성된 가족 가운데 가능하다. 제닝스의 책은 또한 이러한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가 제시한 말을 전하기를 잊지 않는다.

담화22:“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하나이며 같은 것으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될 때 … 그때 너희는 (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나그 함마디 문헌집>, 도마의 복음서)********

물론 이와 같이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벽이 허물어진 급진적 평등의 공동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가능성으로, 하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적 차원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가족은 그리고 커스크가 반복하고 있는 브래드쇼 일가의 테마는 이전에 있던 것과는 언제나 이미 다른 것이다. 



*포르켈은 이 곡이 러시아에서 작센 주 선제후에게 파견된 대사 카이저링 백작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작곡되었다는 매우 근거 없는 이야기를 자신의 바흐 전기에 실었다. 그 후로 이 전기작가의 권위로 인해 이 설은 널리 유포되었고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30곡의 모음곡은 곡이 작곡될 당시의 전도 유망한 키보드 연주자 골드베르크에 의해 초연되었고, 곡의 악보는 그의 이름을 따 출간되었다고 한다.
 
**Tony라는 이름은 Antonia의 애칭이다. 기실 이 Tony라는 이름은 Antonio라는 이름의 애칭이기도 하며,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이 취하는 이름이다. 여성인 토니에게 이 '토니'라는 남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이름을 붙인 것도 젠더 역할의 전복을 나타내는 일종의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포리즘의 근거가 되는 것은 라깡의 성구분 도식. 이 도식에 따르면(수학적 형식화는 생략)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남성
모든 x는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된다. (전칭 양화사 긍정. 그러므로 전체)
어떤 x는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다. (특칭 양화사 긍정. 그러므로 예외 있음)
(예외 있는 전체)

여성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x는 없다.(전칭 양화사 부정. 그러므로 비-전체)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x는 없다.(특칭 양화사 부정. 그러므로 예외 없음)
(예외 없는 비-전체)

이 때 남성의 향유(빗금친 S)는 대타자(A)의 부분을 투사하는 작은 타자 또는 대상 a(petit objet a)에 대한 것이다. 한편 여성의 향유(빗금친 La)는 두 가지 형태를 띄게 되는데, 1. 팔루스에 대한 향유(남성 측), 2. 빗금친 S(A)에 대한 향유 (S(A)는 여성 측에 있으며 신비한 대상. 알 수 없는 것. 프로이트의 질문을 기억할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의 향유는 서로 다른 것을 향하고 있으며 결코 접속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라깡은 '섹스는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상황(세계)를 하나의 집합으로 상정한다. 이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은 언제나 어떤 이름 하에 하나의 집합 내에 넣어지거나 또는 '하나로 셈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방식의 셈하기의 형식을 띄게 되는데, 하나 혹은 일자로 드러나는 현실은 비일관적인(또는 불연속적인) 원소들에 대한 셈의 효과로서만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일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셈에서 집합의 이름은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셈하기의 이후에야 있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가부장의 이름 하에 셈해지는 가족이라는 제도 이전에 가족 구성원들, 즉 있는 그대로의 인간인 이들이 먼저 있다. 가족은 결국 하나로 셈하는의 효과일 뿐이다.

*****여기에 아버지는 없다. 오직 신 이외에는. 교회가 지지하는 인간 아버지의 형상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끼워진 어울리지 않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예수의 자신의 가족에 대한 적대는 유명하다. 그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의 일화에 의하면 육친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앞에 두고도 

예수께서그들에게대답하셨다.“ 누가내어머니이며, 내형제들이냐?”그리고주위에둘러앉은사람들을둘러보시며말씀하셨다.“ 여기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31-35)

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친의 가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이들을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가족' 속에 편입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언제나 '존재로서의 존재'인 인간, 약한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

*******생각컨대, 성서가 말하는 성애와 젠더 그리고 가족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짧은 서술에는 역자의 책 광고라는 다분 사적인 목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좋은 책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아서...ㅎㅎ)

********도마의 복음서는 정경에 속하지 못한 경전 밖의 문서다. 그러나 그 저작 추정 시기와 초기적인 예수 담화집의 형태로 인해 신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뱀발.

이건 제대로된 주라기 보다, 개인적 취향에 의한 사족성의 지적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번역으로 밥먹고 사는 찌질한 인간의 찌질한 지적질. 영어에서 이름에 대한 발음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방식은 확실하게 정립된 것이 없어 자기 발음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클로디어라는 표기에 어느정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Claudia라는 단어를 굳이 클라우디아라는 마치 라틴어 발음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도 문제겠지만 단어의 마지막에 오는 '-a'는 거의 '-아'라는 음가를 갖게된다. 토니의 원래 이름인 안토니'아'(Antonia)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안토니어'라는 발음은 왠지 마지막 한 음절이 '-er'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책 중간중간 토니라는 이름이 주는 남성적 이미지로 인해 토니와 토머스를 착각하고 번역한 부분도 한두 군데 보였다. 굳이 어디가 틀렸다는 말은 아낀다. 왠지 안 그래도 찌질한 지적질을 더 찌질한 것으로 만드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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