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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 - 일본 정신의 고향 ㅣ 종교도서관 3
C.스콧 리틀턴 지음, 박규태 옮김 / 유토피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오늘도 연전연승하는 막스 뮐러. 어느 종교든 자신들의 교리를 납득시키려는 호교가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뒤져보면 이 사람들이 내용만 다를 뿐 동일한 행태를 보임을 간파할 수 있다. 같은 논리를 사용하지만, 결코 다른 종교의 진리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비일관적이다.
다음은 18세기 신도 신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글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신대에 일어난 고대의 사건들이 거짓이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혹자는 이 기록이 후대의 통치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날조하려하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의심하는 자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C. 스콧 리들턴, <신도>, 66p)
기독교 호교가들의 흔한 레퍼토리를 닮았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이 틀림 없는 사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혹자는 빈 무덤이 날조된 것이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여인들의 증언*이라는 뻔한 부담을 지고 날조하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이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고로 도교 저술인 <포박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참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갖가지 방법을 시험하고 검토하여 참으로 신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은 그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귀신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선을 목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세상에 신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용주, <도, 상상하는 힘: 불사를 꿈꾸는 정신과 생명>, 146p)
기독교 호교가들도 종종 저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철학적 논증을 제시했는데, 이 논증들은 아주 성공적이다. 비록 핵심 전제에 대해 동의가 이뤄지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아주 개연적이다. 이 점에서 비기독교인을 설득하진 못하지만, 그들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신을 본 적 없다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같은 신성들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은 동서양에 널렸다. 어째서 복음서를 신뢰하는 호교가들은 동일한 논리로 일본서기를 신뢰하지 않을까? 어째서 신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할까.** 나는 논증 배후에 숨겨진 동기를 이해하는 게 논증을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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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복음서가 본디 공동체 내부를 의식하여 쓰인 문서였다는 점을 잊는다. 정작 복음서, 특히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는 여자들을 침묵하고 도망한 것으로 신랄하게 비난한다(본디 마르코는 8절로 끝난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에서 여성은 결코 증언자가 아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라 암시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로가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부활 전승을 언급할 때, 그는 최초의 환각 체험자로 베드로를 제시할 뿐이다. 빈 무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 나는 개신교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분석적 종교철학자들이 헛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작업도, 비교도 없이 전통적 자연신학의 주제들이 종교에서 중요하다고 자부하다니. 자의식 과잉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