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수메르 신화 한빛비즈 교양툰 23
멍개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화는 허구니까 책에 실린 음모론도 신화로 받아들여 달라? 과학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더 이상 신화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 모든 신화는 인류의 자기 이해를 표현한다는 실존적 가치를 지닌다. 작가가 신화를 우숩게 본다면 책을 내지 않는 게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성서의 이야기 기술
로버트 알터 지음, 황규홍 외 옮김 / 아모르문디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서 ‘편집자’에서 ‘작가’로의 시점 이동은 복음서를 문학 창작물로 보았던 (또한 궁극적으로 예수를 신화적 인물로 간주한) 브루노 바우어의 입장과 연장선에 있다. 이 책의 ‘전형장면’은 양식비평과 함께 사용될 때 성서의 많은 장면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대 이집트의 역사 1 - 태고부터 페르시아의 정복까지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87
제임스 헨리 브레스테드 지음, 김태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 번역이라 너무 오래된 학설을 포함하고 있는데다 역주에도 문제가 있다는 전문가의 입장이 있네요. 구입을 고려하는 분은 다음을 참고하고 읽으시길 바라요. https://m.facebook.com/photo.php?fbid=10159952914879418&id=788059417&set=a.101501403590794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도 - 일본 정신의 고향 종교도서관 3
C.스콧 리틀턴 지음, 박규태 옮김 / 유토피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오늘도 연전연승하는 막스 뮐러. 어느 종교든 자신들의 교리를 납득시키려는 호교가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뒤져보면 이 사람들이 내용만 다를 뿐 동일한 행태를 보임을 간파할 수 있다. 같은 논리를 사용하지만, 결코 다른 종교의 진리주장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비일관적이다.

다음은 18세기 신도 신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글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신대에 일어난 고대의 사건들이 거짓이 아니라 틀림없는 사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혹자는 이 기록이 후대의 통치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날조하려하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의심하는 자들은 바로 이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C. 스콧 리들턴, <신도>, 66p)

기독교 호교가들의 흔한 레퍼토리를 닮았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의 부활이 틀림 없는 사실임을 말해주는 증거다. 혹자는 빈 무덤이 날조된 것이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여인들의 증언*이라는 뻔한 부담을 지고 날조하려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은 이 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고로 도교 저술인 <포박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한다.

“참된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만이 갖가지 방법을 시험하고 검토하여 참으로 신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그 사실은 그들만 알고 있을 뿐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귀신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선을 목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세상에 신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이용주, <도, 상상하는 힘: 불사를 꿈꾸는 정신과 생명>, 146p)

기독교 호교가들도 종종 저렇게 말한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철학적 논증을 제시했는데, 이 논증들은 아주 성공적이다. 비록 핵심 전제에 대해 동의가 이뤄지지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보기엔 아주 개연적이다. 이 점에서 비기독교인을 설득하진 못하지만, 그들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신을 본 적 없다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같은 신성들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은 동서양에 널렸다. 어째서 복음서를 신뢰하는 호교가들은 동일한 논리로 일본서기를 신뢰하지 않을까? 어째서 신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증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할까.** 나는 논증 배후에 숨겨진 동기를 이해하는 게 논증을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복음서가 본디 공동체 내부를 의식하여 쓰인 문서였다는 점을 잊는다. 정작 복음서, 특히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서는 여자들을 침묵하고 도망한 것으로 신랄하게 비난한다(본디 마르코는 8절로 끝난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에서 여성은 결코 증언자가 아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만날 것이라 암시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로가 (누구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부활 전승을 언급할 때, 그는 최초의 환각 체험자로 베드로를 제시할 뿐이다. 빈 무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 맥락에서 나는 개신교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분석적 종교철학자들이 헛짓거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작업도, 비교도 없이 전통적 자연신학의 주제들이 종교에서 중요하다고 자부하다니. 자의식 과잉 아닌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폴 틸리히 조직신학 1 - 이성과 계시, 존재와 하나님에 관하여 폴 틸리히 조직신학 1
폴 틸리히 지음, 남성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The sad fact is that many, many great heroes of Christian history and theology had sides to their personal lives that we cannot be proud of. To what extent should those affect how we regard their theological contributions and contributions to church reform and renewal? Luther, of course, drank a lot of beer and advised others to do so as well. (His letter to a young friend named Jerome includes advice to drink much beer when the devil tells him not to!) He advised the German nobles to slaughter the rebelling peasants without mercy. He condoned Philip of Hesse’s bigamy. Toward the end of his life he fell into anti-Semitism and wrote essays against the Jews that were resurrected and used by the Nazis. John Knox, the reformer of Scotland, married a teenage girl when he was fifty. Ulrich Zwingli condoned the torture and drowning of Anabaptists—some of them his own former students. John Calvin condoned the execution of Servetus and publicly took responsibility for it. John Wesley couldn’t live with his wife; their marriage was, by all accounts, deeply troubled. Kierkegaard was not only eccentric but went out of his way to offend people including cutting off relations with his close relatives (including his brother who tried to have a good relationship with him). And he broke his engagement to his fiancée without explanation—a terrible faux pas at that time. Jonathan Edwards owned slaves.”

로저 올슨, <신학자의 삶이 우리가 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영향을 주어야 할까?> 에서
https://www.patheos.com/blogs/rogereolson/2014/06/should-a-theologians-life-affect-how-we-regard-hisher-theology-updated/

=====

위 인용문을 생각하건데, 기독교 역사에서 손이 더럽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anathema라는 사람은 올슨을 인용해 틸리히가 “문란한” 삶을 살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틸리히의 개방혼은 결혼 당사자 간 자유로운 동의에 의한 것이었고, 비슷한 시기 서구 지식인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풍경인 만큼 비난 대상이 아니라 본다(혹시라도 그가 교수의 권위로 어떤 폭력을 저질렀다면 나는 그를 옹호할 생각이 없다). 나는 한국에서 신학적으로 정통/비정통을 막론하고 저지르는 온갖 추한 짓을 뉴스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틸리히의 개방적인 생활은 고작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루터로 치면 맥주를 많이 마신 정도? 보수적인 결혼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문제다.

Anathema 자신이 인용한 로저 올슨조차 위 글에서 더 심각한 요더의 성폭력을 논하면서 신학저술과 윤리의 관계를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anathema는 틸리히를 손쉽게 ‘비성경적’(애초에 이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학문적으로 수준 이하라는 증거다. 다말의 근친상간은 성경에서 칭찬받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성경적이면 다 좋은가?) 삶을 살았다고 매도하고, 삶과 별도로 그의 사상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남기지도 않는다. 어처구니가 없다. 신학 밖에 있는 사람이 보기에, anathema같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이다. 신학 외에 어떤 타과 교수가 자신에게 껄끄러운 사상가를 그렇게 쉽사리 매도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