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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 노하우
김영진 외 지음 / 씨네21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글쓰는 이들의 골병의 서사<나는 어떻게 쓰는가>
- 글로 먹고사는 13인의 글쓰기(영화평론가, 기자, 시인, 변호사, 카피라이터, 동화작가. 철학자, 미술평론가, 시나리오 작가, 목사.. 등)
“써. 써. 쓰다. 쓰라고 하니까 쓰다. 속이 쓰다. 써야 한다. 살기 위해 쓴다. 마음의 둑이 터져 쓴다. 관계 파탄 날까봐 쓴다. 마감 언제야? 안 쓰면 좋겠네. 안 된다. 쓸 바엔 잘 쓰자... 부끄럽다. 글은 무기다. 칼이다. 몽둥이다. 소총이다. 탱크다. 대륙 간 탄도미사일이다. 상대를 제압한다. 자신을 지킨다. 정보 투하한다. 심장을 뛰게 한다. 눈물을 쏟게 한다...스무 해도 넘었다.(글 쓴 지) 신문사 밥 아깝다. 여전히 두렵다. 소소한 글이 무섭다. 글쓰기가 젤로 싫다. 엄살떤다. 징징댄다.... 한 마디, 두 마디, 실마리가 되길..“- 고경태 기자의 서문
<유혹하는 에디터> 고경태 기자 답다. 언어를 갖고 논 압도적인 서문이다. 역시 글쟁이군. 그들의 골병으로 호사를 누렸구나. 자신에게 글이란 무엇인지 시작해서 왜 쓰냐? 우주의 언어라서~ 주문생산형이라서~ 등등. 어떻게?라는 본문에 이르러서는 쓰라니 부끄부끄 자신의 자식들을 내보이며.. 엄살, 겸손, 드문드문 자신감도 내비치며, 늑장을 부리기도 하다가. 어떻게 쓰나? 사전을 들고 살았다는 시인, 0.5초 단위로 끊어 묘사한다는 기자, 시사주간지를 귀감으로 삼는다는 비평가 등등. 자신에게 글은 뭔지, 글쓰기 이유부터 방법, 새로운 글쟁이들을 만나고 글쟁이들의 직업군을 체험해 보는 덤의 시간도 있다. 부제에서 '노하우'를 뺐다. 약아빠진 노하우가 아니다. 글쟁이들의 치열한 삶에 가깝다. 실제 각 분야 13인 각자가 썼다. 해서 글의 편차가 많다. 그런데 뜻밖에 결과를 안긴다. 쉽게 쓰는 게 어떤 건지, 왜 현학과 멋이 아니라 공감과 기본단위 끊어치기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골병의 서사로 누군가는 세상과 글에 대한 '안목'이 생긴다.
기자가 몰입한 만큼 독자 공감/안수찬 기자
13인 중, 가장 인상적인 글쟁이다.
글은 자아 노출이다. 글쓰기 자아와 타자가 섞이고 스미는 일이다. 글쓰기 초입에는 자아 대신 타자에 주목하라. 주어-목적어-서술어를 기본단위로 단문으로 끊어치기가 만병통치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줘라. 독자를 그 상황에 밀어넣어라. 상대방의 말과 함께 눈빛, 표정, 행동, 시공간을 함께 적으면 보여주는 기사 쓸 수 있다. 디테일 취재를 위해서는 더듬이가 많아야 한다. 현장 리포기사 쓸 때 특히 ‘작은 사물’ 탐색해야 한다. 기자가 몰입했던 순간, 전략적 디테일의 대상이 있다. 순간을 쪼개어 펼칠 때, 무수한 울림을 각인 시킨다.(박지성 2010년 월드컵 골장면 0.5초 단위 끊어서 살핌) 정보가 아닌 성격을 전달, 사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면 지루가 기사가 된다. 글 가운데 가장 높은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 형용어구 남발해선 안된다. 끝까지 담담하게 써라. 끝으로 프레임, 통찰의 힘, 즉,사건, 사고, 인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능력 필요하다. 독자가 바라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공감이다. 기자가 몰입한 만큼 독자들 공감한다.
역시, 그래서 내가 그의 글에 가장 "공감"했구나.
법관의 천형 판결문 쓰기/정인진 변호사
글쓰기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선고 어려울 땐 관용의 길을 택한다. 판결문 공문서, 판결문 원본에 법관 개인도장 찍게 돼 있다. 글의 두 기둥이 진실과 논리라면 판결은 때로 논리로 포장된 진실이기도 하고 때로 논리 없는 진실이기도 하다. 상식과 확률의 법칙에 의거하며, 부사와 형용사 사용이 늘 절제돼 있다.
새로운 직업의 세계와 더불어 판결문이 왜 그렇게 어렵게 쓰이는지 어렴풋이 이해하는 계기가 됐고 예외적인 몇몇 감동문에 혹하기도 했다.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최곤데... 그렇게 쓰며 부장판사 아닌 경우.. 불려갈수도.. 해서 판결문 대부분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아니 어려운 듯. 판결문 쓰는 시간은 정말 곤혹스런 시간일듯.
쓰는 것 이전의 발상이 카피의 99%/손수진 카피라이터
광고, 상업주의 화려한 자식이다. 사람 이해하고 통찰하여 ‘인사이트’ 발휘해야 한다. 이에 세대와 성별, 취향을 가리지 말고 되도록 많은 사람들 접하고 이야기 들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조석의 <마음의 소리>라든가 서나래의 <낢이 사는 이야기> 인사이트 보고다. 두 명의 ‘갑’(소비자, 광고주)을 모시고 있는 ‘을’의 신세가 카피라이터다. 카피 혼자쓰는 것이 아니다. 회의 회의 거듭해서 정교화하는 과정 거쳐, 내 것이란 생각 놓아야 한다. 간혹 윤리적 기준과 부딪히는 경우 일어난다. 속인 자는 없으나 속은 사람은 나오는 교묘한 카피 나오기도 한다.
세상을 향한 연민에서 비롯된 글쓰기/동화작가 김중미(괭이부리마을 아이들)
가난한 동네에서 문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모둠일기 쓰며 가장 감동적이고 훌륭한 글은 삶과 진심이 담긴 글이라는 걸 배웠다. 글보다 앞선 것이 삶이라 창작에는 역지사지의 마음 있어야 한다. 문학은 약한 이의 편에 서는 것이다. 해서 문학을 통해 현실을 바로 보게 하는 것이 먼저다.
영화껍질 벗기기/영화평론가 김영진
주문생산형 글쓰기다. 실마리만 잡으면 떠오르는 대로 쓴다. 말로 잘 잡히지 않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대해 지면이 허락하는 선에서 열심히 묘사한다. 겉멋에 취해 자판 두들기며 막 튀어나온 수사적인 문장 부스러기 덕지덕지 붙이기 않기에 힘쓴다. 멋 부리지 않고 간명하게 글쓰기가 답이다. 김영진 평론가의 실례들이 많이 담겨있는 것이 장점이다. 다만 영화를 봐야만 이해가 쉽다. <친절한 금자씨>의 비평이 돋보인다.
번역의 천국과 지옥 / 성귀수 번역가
새벽 한시에서 세시까지 간격이 다른 대여섯개의 눈금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보다 훨씬 넓고, 깊다. 철자들이 죄다 적의를 품고 일어나 난공불락의 방진을 형성해 문맥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단다. 번역의 어려움이 확 다가오는 표현이다. 번역은 직관의 영역이다. 이에 체계적 방식으로 '학습'되기 어렵다.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아 끝없이 갱신될 수 있다. 시간과 텍스트라는 제약 속에 가시넝쿨을 걷기도 한다. 시간의 제약 앞에서 "내면의 텍스트"를 단념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스스로 기획번역하는 방법도 있다. 창조적 해석을 위해서는 텍스트에 완전히 동화된 상태여야 하는데, 예를 들어 저자와 직접 통화하거나 텍스트 배경이 되는 공간을 손수 확보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때론 텍스트 독자성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번역가의 교감. 등장인물 심리 상태 똑같이 조장해 본다. 모차르트 책 읽을 땐 종일 모차르트만 듣는다던지. 반 고흐 그림 도배된 작업실에 쳐박혀 있는다든지 '메소드 번역'을 하는 것. 생명력 재창조에 주안점이 둔 번역. 진정한 의미 '다시 쓰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