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시절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문화의 제국 김홍기님의 글을 보고 <호우시절>을 봤습니다.

이외수님의 장남 이한얼님이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영화가 끝나고 혼자 실실 웃는 저를 봅니다.

<호우시절>에서 대체 뭘 본 걸까요?

과거의 기억, 낯선 여행지에서의 만남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중장비 관련 회사 팀장인 동하가 짧은 중국 출장길에서 미국에서 같이 공부한 가이드 메이를 만납니다. 만남의 장소는 두보가 50세 즈음에 지었다는 청두(지금의 쓰촨성)의 두보초당. 

이 둘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내가 자전거 가르쳐준 거 기억해?’ ‘내가 좋아한다고 혹은 사랑한다고 말한 거 기억해’ 모 이런 식입니다. 동하는 사귀었다고 하고 메이는 그런 적 없다고 하고... 

일체 영화에 대한 정보없이 이쯤보다 보니 이거  <오~ 수정>인가... 아니면 한순간 지나가는 사랑 이야긴가. 추측만 무성해져 갔습니다. 

그런데 이 쓰촨이 얼마 전 지진이 일어난 상처가 있는 곳이라는 것과 메이의 방을 모두 다 보여주지 못하는 카메라에 메이와 관련된 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더군요. 아무런 정보 없이 보는 영화 이래서 좋더군요. 감독이 원하는 방향으로 동하(동화^^;)가 되어 좁혀져 따라가게 되는.

 

 ‘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낯선 곳에서 과거의 아련한 좋은 감정을 가진 국적 다른 둘. 제3의 언어로만 소통하는 그들, 그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일상을 담은 잔잔함과 언어의 간결함이 장점

요즘 흥행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잔잔한 일상생활을 담은 장면이 신선했습니다. 아이들이 노란 바람개비를 하늘높이 날리는 장면, 광장에서 춤추는 게 일상인 사람들과 춤을 추는 장면, 두보초당의 대나무가 만들어 내는 좁은 길 등의 아름다운 장면부터. 이야기 전개상 없어도될 것 같은 일상적인 장면 등이 후에 느끼지만 이 영화엔 꼭 필요한 것이란 걸 알게됩니다.




언어의 간결함도 좋았습니다. 남녀배우 모두 영어를 사용하는데 사실 메이 역할을 한 고원원의 영어발음이 처음에는 거슬리기도 했지만요. 제3국의 언어로 대화했기에 더 간결한 말만 했고 둘의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감정을 보여주긴 하지만, 언어가 없다고 해서 사랑을 못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생활인 정우성의 발견도 흐뭇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우성 좋습니다. 하지만, 영화배우로서는 글쎄요. <놈놈놈>에서 대사를 먹어버리는 치명적 결함이 잊혀지지 않아서일까요. 안타깝죠. 하지만, 이 <호우시절> 속 대사 ‘첫 월급타고 관둬야지 하다가 두 번째 월급타고 그러다 승진하고 그러다 책임이 늘어나고..’의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30대, 여자 앞에 먼저 용기내지 못하는 어리숙한 남자의 모습을 잘 소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변주곡을 울리는 허진호 감독의 '사랑' 희망작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작입니다. 그간의 나쁘거나, 독하거나, 아픈 ‘사랑’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그의 <봄날의 간다>를 보고 참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어찌 사랑이 한순간에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을까. 영상과 소리의 맑고 아름다움과 잔인하게 대비되는 변심 때문에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이 됩니다. 

<호우시절>에도 빛과 소리의 감독이라는 수식이 무색치 않습니다. 메이의 꽁꽁 숨겨진 방이 답답할 만큼 조금씩 카메라에 의해 드러날 때, 어느새 빛이 환하게 들어나는 장면에서 동하가 그녀를 기다리는, 때를 기다려 내리는 비라는 <호우시절> 태그라인을 이해하게 됩니다.

꽃이 피어 봄이 오는 게 아니라, 봄이 와 꽃이 피듯이. 기다림과 때는 운명을 만들진 않지만, 인연을 꽃피게 할 순 있을 것 같습니다.

동하가 메이를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은, 정우성의 권유로 찍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감독은 자전거 타는 장면을 끝으로 장식할 생각이었다는데요. 잘 넣었다고 생각됩니다.  ‘때는 기다림’을 동반하고 상처 역시 그러하니까요. 

상처가 있는 사람, 장소에서 과거의 재현없이 미래에 대한 사랑의 희망을 얘기한 영화, 때를 잘못만나 흥행에는 실패한 <호우시절>, 때를 만나지 못해 아직 싱글인 30대분들에게 권해 드립니다. 변덕스런 사랑에 상처받은 분, 내 안에 더이상 사랑을 꽃피울 열정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 사랑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아련한 추억만을 갖고 분들에게도 권해드립니다. 내 안에 '사랑'이라는 <봄>을 꽃피울, 좋은 비가 되어 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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