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이가 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혹은 교류가 줄어드는 사람들.. 고집스럽게 외길을 걸어온 사람일수록 그 고독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장례식장, 관 옆에는 보기에도 깐깐한 늙은 호랑이 같은 눈빛을 한 월터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 역)가 서있다.

관 앞으로 와 인사하는 아이들.. 배꼽티에 배꼽찌까지 한 소녀가 지나가자 더욱 얼굴이 구겨진다.

이를 본 장년의 두 남자는 혀를 내두르며 영감의 깐깐함에 대해 논한다.

장례식 후 식사모임에서도 월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한다. '모 얻어먹으러 몰려온 쥐새끼들'

평생을 FORD사에 다닌, 폴란드인이면서 한국전에 참여하여 훈장까지 받은 월터, 친하지 않은 이에게는 '코왈스키'라 부르길 원하며 마음의 빗장이 풀리면 '월터'라고 불리길 바라는 그의 집엔 항상 성조기가 달려있다.

올곧게 고집스럽게 한 길을 걸어온 그, 주위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의 정보를 한 조각씩 줍는 재미가 있는, 영화 '그랜 토리노'를 소개한다.

보통 영화를 관람할 때는 평점이나 대충의 스토리는 알고 가는 편인데, 이 영화의 경우는 체인질링을 감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이라는 이유 하나의 정보만 갖고 일요일 심야관을 찾았다.

영화는 이스트우드의 중후함과 카리스마로 충만했고 '늙음' 에 대한 안쓰러움과 범접할 수조차 없는 고독에 그저 침묵하고 영화에 빨려들게 했다.

그의 옆집에는 잘 정리된 그의 정원과 대비되는 숲이 우거진 듯한 정원을 가진 몽족 가족이 살고 있다.

항상 집앞에 나와있는 몽족 할머니와 월터는 서로 모가 그렇게 못마땅한 지 침을 뱉곤 한다. 표정이 리얼한다.

몽족은 베트남전 때 미국편을 들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며 똑똑한 수와 여자얘 같은 타오, 남매가 살고 있다.
어느날 몽족 갱단의 강요로 타오는 월터의 72년산 그랜 토리노를 훔치다 발각되고...

타오의 엄마는 타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비는 댓가로 월터에게 타오에게 일을 시키라고 하는데.. 월터는 돈도 꿈도 희망도 없는 타오에게 점점 끌리게 되고...

기술을 가르치고 남자의 대화를 가르치고.. 결국 그에게 도움을 얻기도 하며.. 둘의 사이는 가까워진다.

(지하에서 세탁기를 옮기기 위해 타오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지하실에서 옥신각신 주도권을 잡아가는 타오와 월터의 모습이 참 재미있었다)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빗장이 열리고 자식과도 나눌 수 없었던 정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신고식을 망쳤다는 이유로 몽족 갱단에게 얼굴에 담배 흉터를 얻게 된 타오를 보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갱단 한명을 잡아 협박하게 이르는 월터...

그 댓가로 수는 갱단에게 폭행을 당하고 마는데...

자책하는 월터, 갱단이 있는 한 '수와 타오'에게 '희망'은 없다는 걸 아는 월터
폐암(아마도)으로 죽을 날이 얼마남지 않은 그가 그들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할까.

그의 부인은 죽으면서 '교육만 받은 27살의 숫총각 신부'(월터의 표현)에게 그를 돌봐달라고 유언하게 되는데, 신부의 끈질긴 노력에도 결국 해야할 고해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소년병을 죽이고 받은 훈장을 타오에게 남기고 가면서 그는 그 자신을 용서한 것 같다.

'용서'란 무릇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향한 '용서'

그에게 삶이란, '목숨을 바쳐서까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것' 그에게 '희망'을 남기는 것인 것 같다. 영화 '체인질링'에서와 같이.

그래서 영화 제목이 '그랜 토리노' 아닐까 '그랜 토리노'는 늙은 그 자신이기도 하며, 그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그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수와 타오에게 '그 자신'을 '그의 삶'을 '희망'으로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랜 토리노'가 있는 한, '그의 희생'으로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갈 '타오'가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OST에서 그의 목소리와 음악이 그의 지치고 힘들었던 삶과 죽음 뒤의 평화로움을 진하게 전해준다.

'그랜 토리노'에 마음을 가둬 슬픈 엔진소리처럼 고해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간직한 그랜 토리오, 월터.

삶이란 이렇게 누군가를 지킬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나보다. 누군가를 지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돌본다는 게' 외로움을 덜어준다는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겠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외로운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월터가 그토록 '그랜 토리노'을 닦고, '워낭소리' 최원균 할아버지가 이름 없는 소를 돌보는 게 아닐까.

이 영화의 OST를 들으면, '그랜 토리노'를 닦으며 외로움을 달래는 고집스럽게 외길을 살아온 묵뚝뚝한 우리네 늙은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이가 든다는 게, '고립과 단절'을 뜻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고집스럽게 외길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괴짜'라는 이름을 붙여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물건인 '그랜 토리노'도 그러한데 사람이야 더 멋지지 않을까? 나이가 들수록 멋진 사람, 또 그들을 알아보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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