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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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장남인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형을 받는 것을 주 줄거리로 하고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네 부자는 그 당시 러시아의 여러 형태의 인물로 각 세대를 대표하며, 내 생각에 작가가 그 당시 러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도 작품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작가가 평생동안 가졌던 사상의 집대성이자 종결점으로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가 해왔던 생각과 고민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곳곳에서 그의 사상과 고민을 찾아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을 통하여 선과 악 사이를 천착한 인물이다.

그러하기에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선과 악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배타하는 악을 작가는 여기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본질에서 악을 보여주며, 작품에는 아주 선한 인물에서 아주 악한 인물까지 묘사하고 있다. 한없이 성스러워 보이는 조시마 장로는 선이요, 드미트리의 아버지 살해소식을 듣고 속으로 기뻐한 것을 고백한 리즈는 악이다. 또한 그렇게 성스러운 조시마 장로에게조차 젊은 날에는 어두운 시기가 있었다. 카라마조프가의 3형제 역시 표도르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이어받아, 드미트리는 방황을, 이반은 냉쳘한 무신론자, 알료샤는 천사 같은 광신자가 되었다. 표도르 자신에게 이런 선과 악이 모두 잠재되어 있었고, 표도르도 선과 악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지친 그의 행동은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하나의 고민은 신에 대한 것이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실제로 유신론자였던 작가가 이반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을 보면, 그는 적어도 신에 대한 의혹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이반의 모습을 볼 때, 특별한 비중이 없이 그냥 등장시킨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인물이다. 하지만 신을 믿는 것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종교적으로 신을 믿는 것, 또 하나는 여기에 나온 것이다. 신을 존재로서 받아들이기보다는 우리가 신이 필요하다는, 우리가 신이 필요해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의 부정인데, 즉 무신론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작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유신론이 아니라, 신이 필요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이며, 종교적으로 순수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내가 읽기 가장 불쾌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정말로 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이 우리의 악을 제어해 주며, 우리가 힘들 때 위로 받을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이다. 작가가 평생을 걸어 얼마나 고민했을지 알고 있다. 또 그의 그러한 생각이 특이하다고도 생각되지만, 정말로 신을 믿는다면 그러한 것은 신에게 모욕이 되는 발언이 아닐까?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했던 한 가지는 아이들의 등장은 큰 의미를 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의 새로운 세대의 전환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러하기에는 너무 아이들의 의미가 작고 반면에 필요 없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굳이 그렇게까지 아이들을 위한 하나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잠시 다른 곳으로 갔던 이야기를 다시 돌리자면, 위에서 말했던 작가의 선과 악 사이에서의 고민,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고민, 그것은 바로 우리의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며, 악의 유혹을 느낀다. 신을 믿으며, 존재에 의혹을 갖고, 신을 부정하며 자기도 모르게 신의 존재에 의지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의 주제 자체가 삶을 살아가며 하는 이러한 고민을 우리에게 내려주기 위함이 아닌지.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 평생의 화두를 얻었다. 작가의 고민이자, 이 책 속 주인공 모두의 고민, 이것은 아마 내 평생의 화두이며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나에게 선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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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10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124
조지 오웰 지음, 이효성 옮김 / 지경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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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재현시켜 동물로 둔갑한 인간의 간교함을 그려 넣은 동물농장의 칙칙함은 이 내용을 알기도 전에 느낄 수 있었다. 전에 동물농장 만화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만화의 색 역시 칙칙함이 서려있었다. 또한 집에 있는 동물농장 책표지 또한 갈색의 칙칙함을 띄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비판적인 요소가 개입되어서 이러한 분위기들이 조성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칙칙한 분위기의 동물농장은 내가 차마 읽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생기게 하였다. 그로 인해 생긴 거부감을 앞세워 동물농장을 읽은 나에겐 동물농장은 소설이 아닌 독재체제를 비판하는 논설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1917년 차르 정권을 무너뜨리고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되어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겠다하면서 시작한 사회주의 혁명은 애초에 지향했던 평등사회가 아닌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독재국가를 낳았다. '동물 농장'에서는 메이저 영감은 마르크스를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스노우볼은 트로츠키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장원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변질해 가는 동물농장은 소련 사회주의 체제의 타락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동물농장은 이 시대의 상황만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벌어질 수 있는 잘못된 권력자와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물 농장의 지도층으로 등장한 돼지들이 특권을 누리기 시작하면서 토론과 자율적인 의지로 농장 개혁에 참여했던 다른 동물들은 돼지들, 그 중에서도 나폴레옹의 독재에 의해 입과 귀가 막혀버린다. 모든 동물들의 평등을 표현했던 <칠계명>은 나폴레옹의 독재 세력에 의해 깡그리 수정되어버린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시트를 이용해서 침대에서 자서는 안 된다'로 바뀌고, 마지막엔 모든 계명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탈바꿈한다. 독재자의 필요에 따라 처음에 내세웠던 그들의 꿈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또한 선량한 복서에게서 나머지 한 가닥의 힘마저 착취한 나폴레옹은 서슴지 않고 도살장에 팔아 넘길 만큼 비정해질뿐더러 '두 다리는 나쁘고, 네다리는 좋다'라는 계명은 없어지고 두 다리로 서서 동료 동물들을 채찍으로 지배하는 돼지들만이 남게 되었다. 평등사회를 꿈꾸었던 동물농장은 농노를 부리는 지배·피지배 계급간의 불화를 드러내는 장원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동물들이 연출하고 우화를 통해 혁명이란 이름 하에 반동적 전제권을 잡은 집단의 등장으로 피압을 받는 사람들은 언제나 비참한 입장에 놓인다. 이 책이 출판 될 당시인 1945년에는 많은 출판사들은 이 소설이 소련의 권력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임을 알아채고 출판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자신이 무엇을 써야하는가를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정직하고 진실되어야 하며 따라서 모든 허위와 비리를 폭로하고 고발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작가적 입장이었다. 오웰은 '동물농장'을 통해 정치적 전체주의에 맞서 인간의 개성과 민주적 사회의 옹호를 역설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따분한 만화보다는 다양한 개성과 흥미 거리를 제공하는 만화를 좋아하듯이 조지오웰은 전체주의를 고발함으로써 다양한 개성이 존중받은 사회체제를 희망했던 것이다. '동물농장'. 어려웠던 책인것 같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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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죽살이
권오길 / 지성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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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에 정말 감동깊게 읽은 책. '생물의 죽살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도서관에 갔을 때 도서관 관리하는 아주머니께서 재미있다며 나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 주신 책이다. 과학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나라서 생물이라는 단어와 별로 친해질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이번 기회가 과학과 친해 질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 생각되어 '생물의 죽살이'라는 이 책을 빌려왔다.이 책의 지은이는 권오길 교수님이셨다, 한 평생을 생물의 죽살이와 같이하면서 살아오신 분이시라고 하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장을 넘겨보니 그림도 별로 없고, 글만 아주 빽빽한 까닭에 이 책을 언제 다 읽나, 재미도 없겠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읽어 넘어가면서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물의 죽살이라.... 난 생물의 '삶과 죽음'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는데, 책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과학시간에 생물에 대해 배웠을 때, 생물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 각자만의 특유의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웠다. 종족보존과, 적자생존을 위해서 말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생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있었는데, 난 해마의 얘기가 정말로 재미있었다. 나에게 낯설기만 한 해마...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난 이 해마가 동화 속에서만 나오는 것 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실제로 있다니.. 이제까지 그것도 모른 내가 정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여기에서는 해마의 사랑에 대해 소개가 되어 있었다.

그런 턱에 더욱 재미있었지만....해마는 철저하게 일부일처제를 지킨다고 한다. 한 번 짝은 영원하여 믿음을 꼭 지키면서 오붓하고 의초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해마는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35종이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살고있는 해마는 6종 밖에 되지 않으며 남해안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이놈들은 야트막한 바닷가 해초가 많거나 산호초가 발달한 곳에 사는데 해조류나 산호에 꼬리를 감고 몸을 곧추세워 스쳐 지나치는 작은 생물들을 잡아먹기에 꼬리를 휘어감을 대상물이 있는 곳이라야 살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아! 난 해마에게서 다른 생물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점 하나를 알아내었다. 해마는 어미 대신 아비가 새끼를 키운다는 것이다.

어미 배에서 알이 커서 산란시기가 되면 암수가 9시간 가까이 알랑달랑 구애행위를 끝내고 잠깐 동안 교미를 하여 알이 정자 씨를 받아 수정하면 배를 서로 앞으로 하고 가까이 접근하여 두 배를 딱 붙이고 배불둑이 암놈 배의 수정난을 수놈 주머니 구멍에 집어넣는다고 한다. 알 받은 수놈은 주머니 입구를 꽉 닫고 알이 새끼 되길 스무하루를 기다린다. 21일 후에는 수놈 뱃속에서 200여 마리의 새끼들이 빠져나간다. 참 신기한 경우다. 난 이제까지 수놈이 알을 품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그런데 해마는 특이하게.. 그런데 왜 해마는 수놈이 알을 품는 것일까?

난 그 의문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역시...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해마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 아비가 새끼를 키우는 사이에 어미는 또 새끼를 밸 수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정말 희귀하고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한다. 그 지루할 것 같은 책을 어느 새 다 읽고 나니 과학과 한 결 더 친해졌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평소에 생물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고 지냈던 여러 가지 신기한 생물들... 어떤 생물이던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종족 번식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구나하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신 도서관 아주머니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나에게 기억에 남는 소중한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해마의 자식 사랑을 재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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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
잭 캔필드.앨런 코헨 지음, 류시화 옮김 / 푸른숲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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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맨 처음에는 우스웠다. 아무래도 다른 책과는 다른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서라는것. 어떻게 생각하면 일상생활속에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참 뜻깊은 행사인것 같다.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루 말할수 없는 소중한것들을 전해주는.. 그런 행사 말이다. 이 책은 내가 거친 수많은 책들중에 하나이다.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이상하다. 한마디말에 감동을 받고 한가지 행동에 기뻐하기 때문이다. 이 책속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읽었지만 내 가슴속에 와 닿는 이야기를 지금 쓰려고 한다.

뉴욕 맨하탄에는 맥시코인들이 사는 탈렘가 지역이있다. 남자의 평균 수명이 방글라데시나 말레이시아보다 작다. 그리고 식량도 부족하다. 그런 빈민촌에 작은 중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는 빌 홀이라는 영어교사가 있었다. 빌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특별활동중에서 체스반을 만들었다. 체스는 세계아이들이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였지만 빈민촌이다 보니 체스 할 시간에 공부를 하라는 부모님의 다그침, 그리고 일을 시키려는 집안의 성화 때문에 인원이 결국 12명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러 경기에 나가 우승하였고, 경기에 나갈때마다 빌 홀은 자신의 월급으로 지하철표를 살 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피자역시 자신의 월급으로 사주었다. 그리고 '왕실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러시아에서 열리는 체스 친선 경기에 나가기 위해 빌은 대기업을 다니면서 후원금을 받기 위해 뛰어 다녔다. 그의 노력이 하늘에 닫은 것일까. 펩시콜라 회사에서 그에게 2만달러라는 큰 후원금을 내주었다. 그렇게 러시아에 가서 경기의 절반 정도를 이겼다. 천천히 심사숙고하면서 두르는 것을 미덕으로 배워온 선수들과는 달리 기사단 선수는 빠른 공격과 정확성을 읽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경기에서도 우승을 하였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좀처럼 화내지 않던 빌 선생님이 화를 내셨다. 체스반 학생들이 시험을 쳤는데 백인 교사가 컨닝을 했다고 우기는 바람에 재시험을 치자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아이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아마 그 선생님은 질투가 나서 그러는 거겠죠. 우리가 이 학교를 지도에 나오게 만들었으니까요.' 라는 우스개 소리로 넘어간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졸업 할 때 쯤 스카웃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아이들은 서로 헤어져야했지만 서로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다. 빌 선생이 우리를 인정해 주셔서 지금은 뛰어난 아이가 될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과 함께.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세상에는 좋고 감동적인 책들이 너무 많지만, 그런 책들과 더불어 이책도 나에게 큰 감동을 가져다 주었기에, 정말 기억에 남을것 같다. 그런 책중에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가슴이 너무 포근한 것같아 큰 뿌듯함을 느낀다. 정말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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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어린이를 위한 인생 이야기 26
장 지오노 원작, 채혜원 편역, 이정혜 그림 / 새터 / 199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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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질서가 복잡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 친구들에게 희망을 찾아 줄수 있는 책이라는 추천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이 책의 주 인공이 직접 본 떡갈나무 숲과 노인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주인공인 장지오노와 같이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같이 배낭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드는것만 같았다. 장지오노가 산을 여행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 하루 종일 산을 해매며 돌아 다니는 모습. 물이 마시고 싶어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장지오노가 이러다 쓰러지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을 가지며 한 줄 한 줄 책을 읽어 나갔다. 만약 그때 장지오노가 양치기 노인을 만나, 물을 얻어 마시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암울한 생각을 해 보았다.

이 글에 나오는 양치기 노인은 정말로 인정이 많고,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처음에 장지오노를 만났을 때, 낯선 등산객인데도 불구하고 물을 마시게 해 주었고, 그날 밤에 노인의 집에서 재워주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노인은 장지오노를 데리고 황무지에 가서 땅에 도토리를 심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노인이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는 것은 '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양치기 노인은 1년 전에 10만개의 도토리를 심은 결과 2만개의 떡갈나무가 자랐다고 한다. 그런데 '20%의 성과만 얻었다면 떡갈나무를 자라게 하는데는 노인이 더 손해가 아닌가?' 이렇게 느꼈던 난 이 책을 다 읽고야 양치기 노인은 명예와 보수를 바라지 않고, 진실된 마음으로 도토리를 심었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는 악한 자와 선한자, 강한자와 약한자가 있기 마련인데 양치기 노인은 그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때론 퉁명스럽고, 때론 자상하신 그런 분이었다. 장지오노는 노인과 헤어져 20년 후에 다시 그 곳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황무지는 20년 전과 달리 거대한 떡갈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그 곳에 행복하게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장지오노는 흐뭇하였다. 굽은 허리를 힘들게 이끌고 돌아 다니며 한 곳 한 곳마다

정성을 다해 도토리를 심은 노인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그 때야 그 노인이 무엇을 위해 그런 노력을 기울였는지 깨달았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은은한 향기가 배어나는 작품인 것 같다. 버려진 황무지 땅에다 도토리 씨앗을 뿌리며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양치기 노인의 삶의 모습. 당장에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또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 묵묵한 삶의 자세. 그것은 우리들에게 성실한 자세를 가르쳐 주며, 묵묵하게 자신의 업적을 쌓아 가는 자세가 성실성에서 비롯된 것을 알려 준 것 같다. 양치기 노인이 생애를 마칠 때까지 심었던 도토리 한톨 한톨. 거기엔 양치기 노인의 소중한 마음이 묻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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