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분명 예전보다 많이 풍족해졌다. 그러나 그에 비례해 빈부의 격차도 날로 커져 가는 것을 체감한다. 함께 나누면 더 풍요로운 유토피아가 될 것 같은데, 가진 자들의 욕심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없는 자들은 점점 더 희미하고 힘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평등사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인가? 그리고 불평등은 왜 점점 심화되어 가는가? 이 책은 사회의 불평등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불평들에 길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소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소비중심사회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사회과학 서적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만연해 있는 부조리를 주시할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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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마태복음 13장 12절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큰 부자가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이러한 성향이야말로 우리의 도덕 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자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 애덤 스미스

 

~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고 있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이런 현실 앞에서,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잠시 멈춰 서서 부의 재분배로 인한 부수적 피해자들 못지않게 직접적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은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 없는 등반가라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 자체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 현재 추세대로라면, 경제성장은 우리 대부분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성장은 이미 압도적 다수인데도 여전히 그 수가 급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고 냉혹한 불평들과 더 불안정한 조건 및 더 많은 추락과 원통함과 모욕과 굴욕을 겪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즉 사회적 생존을 위한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든 싸움을 예고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 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갈수록 해로움을 더해가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 접하게 되는 '경제성장'은 도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끔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 경쟁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경쟁이 초래한 사회적 불평등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공공연히 비난받는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공적인 평가에 동의해 자신들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모욕에다 상처까지 더해지고, 불행으로 입은 상처에 비난의 소금까지 뿌려지는 것이다.

 

~ 약자들이 스스로에게 내린 사회적 열등의 선고는 선고로만 그치지 않고 부정의한 불평등 자체에 대한 반대는 물론이고 가벼운 불만의 속삭임조차 집어삼켜 버릴 뿐만 아니라 승자가 보내는 연민이나 동정도 받아들인다. 이제 상황에 대한 이의 제기와 상황을 지속시키는 생활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잃어버린/도둑맞은(하지만 원칙적으로 양도 불가능한) 인권, 즉 존중되고 원칙들을 인정받고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 할 인권에 대한 정당한 방어로 간주되지 않는다.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물들’은 쾌락을 제공하는 능력이 감소하지 않는 한은 소비자들에게 유용성(사물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를 갖는다. 그 능력이 감소하는 즉시, 그것들은 유용성을 상실한다. 우리는 상점에서 구매하는 상품들, 즉 ‘사물들’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들이 더 이상 쾌락이나 위안을 주지 않게 되더라도 그것들이 우리가 사는 공간을 어지럽히도록 내버려 두겠다고 보장하기는 커녕 약속도 하지 않는다. 구매된 상품들의 유일한 용도는 약속된 쾌락이나 위안을 제공하는 데 있다. 그것들이 더 이상 쾌락이나 위안을 제공하지 않게 되거나 소유자/사용자들이 다른 데서 더 많은 만족이나 질적으로 더 나은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되면, 상품들은 폐기되거나 대체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하며 대개는 실체로 그렇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일생 동안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에 접목되고 소비자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소비자에게 주입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고객-상품 혹은 사용자-유용성 관계의 패턴이다. 오늘날 인간적 유대가 취약하고 인간들 간의 결사와 파트너십이 쉽게 변하는 것은 주로 이러한 주입 내지 훈련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간적 유대들의 불안정성과 변화 가능성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라붙어 수많은 정신적 불안과 불행을 초래하고 있는 두려움, 배제되고 버려져 혼자 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들의 영구적 원천이다.

~ 고객-상품 패턴과 달리, 인간 대인간의 관계는 대칭적이다. 여기서 관계의 양측은 각기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다. 주체와 객체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관계의 양측 모두 동기를 가진 행위자인 동시에 자주적 결정의 원천이자 의미의 구성자이다. 둘 모두 능동적 존재로 참여하는 상호작용에서 시나리오의 공저자, 즉 행위를 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행위의 대상이 되는 자이기 때문에 장면 설정은 두 면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만일 상호작용하는 양자가 주체의 역할과 객체의 역할을 모두 맡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두 역할을 모두 맡을 때 반드시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완전히 인간적인 관계(주체와 객체의 진정한 만남과 사전 협력이 필요한 관계)는 있을 수 없다.
~ 소비자 시장의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인간관계에 따르는 불쾌함과 불편함의 제거(실제로는 고객-상품 관계의 패턴에 의거한 인간관계의 개조)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제안에 매력을 느껴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고는 기쁨에 겨워 그러한 거래가 가져올 손실을 알지 못한 채 올가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약속 때문이다.
~ 그러한 함정에 빠져 버린 세계는 신뢰와 연대, 호의적 협력에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다. 그러한 세계는 사호 의존과 충성, 상호부조, 사심 없는 협력, 우정 등을 평가절하하고 폄하하며,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차갑고 낯설고 매력 없는 곳이 된다. 우리는 마치 어떤 사람의 사유지를 방문한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과도 같다. 우편함이나 편지함 폴더에는 이미 퇴거 명령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손을 맞잡는 것이 수갑을 채우는 것과 진배없고 친밀한 포옹이 너무도 흔히 감금과 혼동되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기’ 게임을 끊임없이 벌이는 경쟁자드레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다’라는 오래된 속담을 들어 그러한 변화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그것은 늑대들에 대한 모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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