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을까?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의식세계'는 내가 태어났을 땐 분명 비어있었고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들도 내가 태어났을 땐 없던 것들이다. 각자 살아가며서 생각을 형성했고 의식세계를 채웠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존재인 양 착각하기도 하지만, 일찍이 칸트가 지적했듯이 '생각하는 바에 관해서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다. 나 또한 생각하는 존재이긴 하나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에 관해 자유로운 존재는 아닌데, 그럼에도 '내가 지금 생각하는 바'에 따라 살아간다.따라사 '지금 내가 생각하는 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자기성찰의 출발점이다.-15쪽

~기존 생각을 수정하려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용기가 필요한데, 대부분은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는 용기만 갖고 있다. 머리가 나쁜 탓이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은 머리를 기존의 생각을 수정하기보다 기존의 생각을 계속 고집하기 위한 합리화의 도구로 쓴다. -16쪽

18세가 프랑스의 교육철학자 콩도르세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나누었다.-18쪽

~마르크스가 강조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다"라는 명제를 되돌아본다면, 내가 고집하는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닐 때 필경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쉽게 말해, 내가 갖고 있는 의식이어서 그것을 고집하며 살아가지만 나에게 그 의식을 갖도록 한 주체는 내가 아니라 지배세력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제도교육과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분석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 있으며,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배력의 기획에 의한 일방적 세뇌와 주입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폭넒은 독서와 토론, 직접적인 견문이 꼭 필요하다.-22쪽

~"사람은 그때까지 읽은 책이다" 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는 지극히 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감옥에 하나의 창이 나 있다. 놀랍게도 이 창은 모든 세계와 만나게 해준다. 바로 책이라는 이름의 창이다."
-24쪽

국가권력이 장악한 제도교육과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미디어에 의해 넘칠 정도로 채워지는 의식세계는, 특히 한국처럼 제도교육이 민주화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때 필연적으로 지배세력이 요구한 것만으로 채우게 된다. ~지배세력에 대한 복종의 자발성에서 과거에 책을 읽지 못한 사람들보다 오늘날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더 강한 것은 그 때문이다.-25쪽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로 학업 성적이 부진하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에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피부 색깔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두뇌를 선택할 수 없다. 두뇌의 용량과 기능은 사람마다 다른데 오로지 문제 풀이와 암기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종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오로지 암기나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할 뿐 감수성이나 사람됨에 대해선 거의 무시한다. -27쪽

~우리는 '지적 인종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지만 실제로 이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없는 철저한 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은 스스로 우쭐대면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업신여길 수 있고, 성적이 낮은 학생은 어린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 독서와 토론, 글쓰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우스갯 소리는 진실에 가깝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시험 본 다음에 잊어버린 학생과 시험보기 전에 잊어버린 학생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학교와 교실이 차별과 억압을 '익히는習' 곳이 돼버렸다는 점이다.-28쪽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 명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명료하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한다. 사람에 관한 학문, 곧 인문학을 공부행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사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곧 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사회 안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33쪽

한국에서 남다른 교육자본을 형성하여 사회 상층을 차지한 사람들은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뜨기라는 점에서 볼 때, 올바른 생각, 풍요로우면서도 정교한 생각을 검증받는 게 아니다. 오로지 암기와 문제풀이를 잘해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관해 질문을 던질 줄 모르고 오직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암기에서 뛰어나다는 점은 그들이 기존 체제를 지키는 가치관과 이념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들의 지배를 받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비판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의 의식세계에는 지배세력이 기획, 의도하여 암기하도록한, 세뇌시키 것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것을 회의하지 않고 고집하기 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관철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친 교육'의 실상이다. 즉,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부하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는 자기 생각과 논리가 없어 지배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사회구성원을 양상하는. -43쪽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생각과 논리를 갖게 해야 한다. 학생들은 사물과 현상에 관해 자기 생각과 논리를 펼때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만큼 자아의 세계가 확장된다. 학생들에게 인간과사회에 관해 자기 -45쪽

학벌체제는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평생 교육을 멀리 하게 한다. 만 18세에 인생의 서열이 거의 정해졌기 때문에 그 이후에 공부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에 이기려고 두 번 긴장할 뿐, 자기성숙을 위한 모색과 긴장은 거의 죽은 사회다. ~
공자님도 잘하기보다는 좋아하라고 했고 좋아하기보다는 즐기라고 했다. 학문은 특히 그러할 터. 그러나 어렸을 때붙 학습노동으로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공부는 이미 즐거움이 될 수 없다. 학생들이 학문을 즐기기 않는 대학에서 학문 경쟁력이 나올 리 없고 학문 경쟁력이 없는 곳에서 국가경쟁력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도 국가경쟁력을 빙자하여 학벌체제를 옹호하는 주장이 수그러들지 안는 것은학벌체제 수혜자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그들의 사회인식 능력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50쪽

대학의 서열화로 초중고 교육은 입시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서열화된 대학구조는 앞서 보았듯이 초중고 교육에 심각한 왜곡을 불러왔고, 사회문화적 소양이나 비판적 안목 갖추기를 애당초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지배계급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했다. -67쪽

'왜?'라는 질문이 사라졌다는 것은 대화와 토론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한국의 가정 중에 식구들끼리 인간과 사회에 관해 대화하고 토론하는 가정이 몇이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 사이에 말을 주고받긴 하지만 그 내용은 인간과 사회에 관한 견해를 나누기 위한 게 아니라 무엇인가 요구하기 위해서다. ~ 이처럼 가정에서 요구를 주고받는 관계는 학교와 직장에서 명령과 지시를 내리고 받는 관계로 바뀐다. 어디에서도 수평적 관계의 대화와 토론은 없다.-70쪽

인간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살아남으려고 굴종한다.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면 억압과 착취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는 대신 굴종을 택한다. 인간의 삶은 모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된다. 자연은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파괴되어 죽는다. 자연이 놀라운 복원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파괴 행위는 속도에 있어서 자연의 복원력을 앞지른다. 그리하여, 자연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끝까지 발버둥치겠지만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102쪽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한다"고 했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것이다. 지상의 꽃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데,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자기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 민족, 종교, 지역, 혈연, 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130쪽

~다름이 경쟁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극복 대상으로 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는 항시 인권 침해의 대상이 될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잘못 사용하는 줄 아는 사람들조차 잘못을 고치지 않고 계속 쓰고 있을 만큼 일상화되어 있다. '다름=틀림'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131쪽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성숙학르 기대하며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한다. 성찰 이성에 눈뜨지 못한 인간은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대신에 남과 비교하여 스스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자기성숙의 긴장이 없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다. 이 소유물과 소속집단은 인간 내면의 가치나 성찰 이성의 성숙과는 무관하다는 공통점을 갖는다.-133쪽

무릇 잘못된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으되 존재에 대해서는 비난할수 없는 법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성적 소수자들은 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라는 사회적 폭력 앞에 노출돼 있다.-134쪽

우리는 비교라는 말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 남과 비교할 땐 서로 장점을 주고받기 위한 경우로 한정할 일이다.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비교는 멀리 하라는 것이다. 그런 비교는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소인배들이 주로 즐기는 일인데, 다수자일수록 다수자에 속한다는 것에 자족하고 자기성숙을 게을리 할 수 있다.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에 머문다면 다수자, 소수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137쪽

20대에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을 선택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이 인간들 말이다."-192쪽

사람에게는 이기적 선태을 하도록 하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존재 또는 처지가 의식을 규정하는 일차적 이유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한다. 그래야 원활한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도 사회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을 위하 의식이라고 굳게 믿게 만든다. 이러한 의식들은 '나'라는 이기적이고 개별적이 여과망을 통과해서 저장된다. 그러나 여과망이 있다고 해서 철저히 개인적 특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과망 자체가 국가나 사회의 의도에 따라 조작되거나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육이나 사회적 통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07쪽

이처럼 사람의 의식 속에는 냉철하고 엄격한 점검으 거쳐야 할 만큼 믿을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 수 있다. 그럼에도 개별적 여과망을 거쳐 독립적인 인격체 안에 내재하기 때문에 의식은 곧 각자의 주관에 따른 '주체적' 판단이라는 착각으 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착각은 '무지한 소신주의자'를 양산한다.-208쪽

자유를 억압하는사회는 곧 나를 억압하는 사회다. 개인은 사회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어떻든 나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런 자유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대해 '도대체 그 법이 있든 없든 아무런 불편이 없는데 왜 이 소란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자유처럼수상한 것이다.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이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한 것으로서마니 아니라, 자유 그 자체로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도 무인도에 혼자 살게 된 사람을 보고 완벽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고 축하하지 않는다. 이는 자유의 상대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ㅣ라 인간의 사회성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유 역시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마치 상대적 가치인 양 그 실용성이 강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려선 안된다.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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