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엄마가 여러 번 물어봤었다. 너 숙제 왜 안 해가? 하기 싫어서 그래, 아니면 몰라서 그래?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귀찮아서?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시키는 대로 하기가 싫어서, 모두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날은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데 시간을 지켜내야 하니 내 형편이랑 안 맞아서, 뭐 그런 것들이 그때의 정답이었을까.-170쪽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긴 하지. 근데 그게 훨씬 더 어려울걸. 내가 남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그거 몹시 힘든 일이야. 모든 게 다 자기 책임이 되거든. 안전한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혼자여야 하고, 정해진 가치에 따르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자기에 대해 설명해야 해. 경쟁을 피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남과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라면 말야. 어쨌거나 나는 네 선택이 마음에 들어. 우리, 재미없는데도 꾹 참으면서 남들한테 맞춰 살지는 말자. 혼자면 재미없다는 것, 그것도 다 사람을 몇 무더기로 묶은 다음 이름표를 붙이고 마음대로 끌도 다니려는, 잘못된 세상이 만들어낸 헛소문 같은 거야. 혼자라는 게 싫으면 그때부터는 문제가 되지만 혼자라는 자체가 문제는 아니거든.-171쪽
가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다. 시간이 부분적으로 정지하는 느낌 같은 것. 하나의 장면이 일시에 정지하는 게 아니라, 한 장소에 함께 있지만 사람마다 각기 다른 시간 속에 정지되어 있는 듯한 기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박물관에 전시된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동물의 박제처럼 아무 관련 없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존재들이 돼버린다.-300쪽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거야. 반사적으로 그것이 나에 대한 화제라는 걸 눈치챘다. 재욱 형 말이 이어졌다.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읽게 되면 그때 비로서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성숙이란 일종의 균형 잡기야. 내가 서 있는 곳의 좌표는 어디일까. 그리고 균형이란 뭐지? 남자다움을 강요당하는 것, 여자 같다는 말, 두 가지 모두 싫었다. 그런데 왜 꼭 둘 중 하나여야만 하지? 생각해보니 나는 남자답다라든가 여자 같다는 식의 개념이, 그리고 획일적인 이분법이 싫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둘로만 나눌 수 있지? 좋아하는 감정만 해도 이렇게 여러 가지이고, 믿는다는 말만 해도 누구한테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340쪽
-잘못된 게 있으면, 그런 건 바뀌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아녜요? 뒤에서 불평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발뺌하는 애들, 전 그런 애들이 더 답답해요. 똑똑한 애들이 더 그런 거 같아요. 비판만 하고 자기 할 건 다 했다는 식. 나름 우월감을 느끼나봐요.-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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