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본 이적요 시인은 본성에 지고만게 아니라 가슴벅찬 본성의 공격을 누르고 또 눌렀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누르다 보니 흉폭하게 폭팔해 자신이 아끼던 제자를 죽음에 몰아넣게 되고, 그에 대한 자책으로 스스로 죽음에 자신을 가차없이 몰아가버린 불행하고 불행했던 지성인이라고. 시인은 자신의 노트에서 누누히 자신의 이중성과 가치없음을 내보이려고 애쓰지만요.

이 책은 변호사 Q가 시인이 죽은 1년 뒤에 시인의 유언에 따라 그의 노트를 보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변호사, 이적요시인, 서지우작가로 화자가 계속 돌아가면서요.
제대로 된 성장기나 청년기를 거칠 수 없었던 암울한 세대에 묻혀 암울한 인생을 살다가,
노년이 된 뒤 자신의 모든 세포를 깨어나게 하는 소녀 은교를 만나게 됩니다.
겉은 주름진 노인이나 은교가 말하듯이 속은 더 없는 청년인 이적요시인은 태어나 처음 벅찬 사랑을 느끼지만, 또한 그 사랑이 남들이 보기에 더 없이 추할 수 있다는 것도 느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막기 위해 애쓰는 제자 서지우 작가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소녀 은교가 얽히고 섥히면서 막을 수 없은 불행속으로 빠져만 들어갑니다.
시인이 제대로 된 청년기를 지낼 수 있었다면, 그렇게 소녀 은교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빠져 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아픈 편린으로서 힘들게 세상을 살았던 시인에게, 마지막의 따뜻한 촛불이 될 수 있었던 사랑마저 불행하게 끝낼 수 밖에 없었던 시인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짧게 짧게 이어지는 문체들이 가슴에 콕콕 박히듯이 술술 읽어지는 책이었습니다. 밤에 읽고 싶었으나 어쩔수 없이 낮에도 읽어버렸다는~ 
아참~ 호텔 켈리포니아를 꼭 들어야 겠습니다.

========================================================
p.59
이제 와서, 서지우 때문이라고만 말하진 않겠다. 그것은 비겁한 핑계로 소중한 본능을 파묻는 짓이다. 그애를 만난 처음부터 발화되기 시작한 내 본능이 음험하게 잠복되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잠복은 평화이다. 그러니 서지우가 없었다면, 그 순정한 평화는 좀더 지속됐을 것이다. 그것이 아쉽다. 모든 걸 휩쓸고 갈 폭풍우 같은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기 시작한 것은, 가을이 아주 깊었을 때였다. 서지우가 내 잠복된 본능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p.90
오늘은 은교, 네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사실은 네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그동안에 참 많았었어.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프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엑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천 일 동안이라도. 너에 대한 나의 정한은 아직도 이리 무성하다. 너는 내게 어째서 한 번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았니. 그랬더라면 죽어서 글을 남기는 이런 짓, 혹시 하지 않아도 됐을지 모르는데.

p.369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p.394
나의 마지막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비참하지도 않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p.399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 같은 누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나처럼 맑은 소주에 의지해, 나보다 먼저 생으로부터 홀연히 걸어나간 한 시인의 시 중에서, 그 일부를 여기 옮겨 적는다. 나의 시는 네게,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