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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ㅣ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평점 :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_이유리,김서혜,김초엽,설재인,천서란
믿고 보는 자이언트북스의 작가진. 그리고 언제 펼쳐도 내 모든 집중력과 감정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작품들의 향연.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애정 하는 작가분들의 작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기쁨도 있지만, 그 작품의 퀄리티가 앤솔러지에서 기대하는 품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지. 이번 작품을 통해 새로운 사랑을 찾은 것 같다. 설재인 작가님. 작가님의 필력과 글맛은 ‘내가 너에게 가면‘을 통해 익히 경험했었다. 이 전 작품과 달리 멸망을 향해 달리는 지구의 현실, 어찌 보면 건조하고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피어나는 타인에 대한 연대와 담백한 마음은 얼마나 취향이었는지. 책을 읽다가 소리까지 지르게 만드는 이 스윗함은 가히 처음으로 경험해보았다.
모조리 좋은 단편집은 오랜만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바보같이 “하.. 너무 좋아”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책, 더불어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게 된 책:) 모든 작가님의 사인본이 담긴 귀한 선물로 보내주신 자이언트북스께 감사의 인사를..💕
[미림 한 스푼_설재인]
📌누구에게 투표하든 살아남게 해줄게
✏️종말은 부드러워야 했다. 종말이 아프다면, 자신을 멸시하며 덜 아픈 현재를 꾹 참아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호흡할 수 없는 우주. 매질이 없어 소리도 전달되지 않아 아무도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없을 우주. 중력이 없어 물건을 던져도 깨지지 않고 둥둥 떠다닐 뿐일 우주. 파편에 다치지 않고, 나쁜 말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비참한 삶이 지속되지도 않을 우주.
✏️곰팡이가 피어도 그리마가 기어다녀도 햇빛이 없어도, 이지하방은 미림의 생을 통틀어 가장 안온하고 따뜻한 벙커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은 내내 전쟁과 다를 바가 없었고 하루 이십사 시간을 긴장 속에서 움츠리고 보내느라 예쁜 미래같은 건 상상하지를 못했다. 미사일이 떨어지지 않아도, 총이나 포의 소리가 울리지 않아도 하루하루 삶의 반쯤 찢긴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쯤 완전히 떨어져나갈까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만 하는 아이들이 분명히 곳곳에 있었다.
✏️미림은 무용한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묵은 책들을 꺼내 펼쳤다.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가 없을 책벌레들이 그 위를 기어다녔다.
✏️활자와 이야기, 언어와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어떠한 모양의 인식들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진 지 얼마나 되었던 것일까.
✏️용기를 얻기 위한 이야기를 나는 만들 수 없어. 미림은 생각했다. 나는 번역만 할 뿐이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기대어 숨쉬고 행동할 뿐이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기대어 숨쉬고 행동할 뿐이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기대어 숨쉬고 행동할 뿐이야. 그러니 나는 끝내 안 될 거야. 세상이 끝장날 때까지, 지하에서 내려와주었던 존재에게 그 어떤 손도 내밀지 못하고.
✏️미림은 주경의 귀를 막고 입을 맞추었다. J의 결론을 알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래 사랑이 묻은 행동에는 막연한 구석이 꽤 있는 법이다. 주경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보편적으로, 입을 맞출 땐 그래야 한다고들 하니까.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_이유리]
✏️나는 성재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바깥에서 어떤 고통과 수모를 겪든 나는 견딜 수 있다, 성재가 기다리는 이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 오늘도, 내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평생. 그 사실을 되새기자 기쁘고 해복해서 마음 깊은 곳이 파들파들 떨렸다. 감히 내가 이런 걸 누려도 될까. 누군가 나타나 착오였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갈 행운이 잘못 도달한 모양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빼앗아간대도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아직도 이렇게 예쁜 색깔이구나. 이토록 고통스러운데도 이토록 아름답구나.
[뼈의 기록_천서란]
✏️문신을 한 부위의 피부는 부패 속도가 가장 늦다. 진피까지 뚫고 내려간 잉크가 어떤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스며든 피부의 부패 속도를 늦추는지는 로비스 역시 알지 못했다. 중요한 건 문신은 지운다 해도 결국 진피에 박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죽음의 절차를 밟지 않던가. 모미의 죽음은 아무도 선택해주지 않았다. 모미는 화장을 싫어할 것이다. 모미는 뜨거운 것을 서글퍼할 것이다. 모미는 타오름을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로비스와 모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문을 향해 달렸다.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허무할 정도로 쉬웠다.
✏️로비스는 이제 첼의 얼굴에 새겨진 문신이 무엇인지 얼추알 것 같았다. 철조망을 타고 자랐던 식물의 줄기. 살기 위해 뻗은 무규칙성을 닮았다.
✏️마음이 하는 일. 몸이 그것을 따랐을 뿐입니다. 거부할 수가 없어서. 몸은,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시키면.
✏️로비스는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죽음이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모두에게 다르며, 볼 수 없는 존재의 삶을 끊임없이 보고 있는 뼈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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