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데미지
조세핀 하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녹색광선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음~ 웃기다.
나는 아마 이 이야기를 잊을 것이다. 잊을 것이라고 적어둠으로써 어렴풋하게는 기억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잊겠다는 다짐이 아니다. 그냥.. 별 대단치 않아서 기억하지 못할 것 같다. 비웃으며 봤던 기억뿐인 <헤어질 결심>처럼.

◾️나는 죽은 사람들의 옛날 사진을 가끔 본다. 사진 속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죽음의 징후가 있는지 열심히 찾는다.(35)

◾️한번은 액자 양 끝에 팔을 대고 사진 앞에 그냥 서 있었다. 몇 시간 동안 마틴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삶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포착한 것은 웃음, 힘, 아름다움이었다. 의기양양하고 도전적인 생명력 넘치는 얼굴이 사진 기술이라는 덫에서 빠져나올 것 같았다. (258)

일평생 ‘징후’를 찾던 남자는 "그녀와 만날 때마다 내 삶이 이미 끝났다는 확신의 리본”(58)을 수집하며 기꺼이 나락행 열차에 탑승한다. 운명에 무력한 이 남자는 결코 좌표가 되지는 못하는 그 징후들만으로 감복해 한다. 욕망의 노예이자 지배자가 되어 삶은 원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 합리화한다. 훌륭한 공연(31)에서 퇴장할 수 있어서 기뻐한다.

이 양반은 자기 영혼의 지형을 등고선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아래로, 전체에서 일부를, 사진에서 미래를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경사진 내면의 풍경을 누군가가 알아채주길 바랐다. 타인이 그 높낮이를 훑어주기를 바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도 감당 못하는 존재의 껄끄러운 면(12)을 자기같은 다른 사람이 핸들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주책을 떠는 게 진짜 모습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오랜 세월 그런 척 사는 게 도움이 됐죠. 윌버는 늘 제 내면을 들여다보았어요. 실은 그이와 결혼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227-228)

그는 안나와 머물렀던 방의 인테리어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안나의 심중은? 글쎄. 그는 안나가 직접 그려준 지도(119)로 만족했다. 그는 안나를 읽으려고 한 적 있을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믿으면서 상처 입은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는 그 고백에서 무얼 읽어냈을까.

작가는 애석하게도 우리에게 이 남자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잉그리드의 남편, 마틴과 샐리의 아버지인 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재는 소재일 뿐. 소재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말을 고민해보자. 인간종의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식물되기를 택하다. 트랜스플랜트랄까. 동족의 잔인함에 질려 완전히 다른 존재를 꿈꾸는 여성의 저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4.10.16.

유명한 책이란 책은 다 읽어보려고 하는 내가, 어째서 한강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는지 의아할 뿐이다. 교과서에 실리는 한국문학 외에는 문외한이고, 읽을 거면 작정해서 허균의 홍길동전부터 최명희의 혼불까지 읽어볼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현대문학은 생각도 안 했고.. 그치만 최근에 최은영과 황정은의 글을 읽고 생각이 바꼈다. 동시대의 작품을 읽어야 한다. 더 늦었다고 생각하기 전에 한국어문학을 파봐야겠다.

그 시작을 2024년 노벨문학 수상자 한강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이름 날리게 된 작품 <채식주의자>로 삼아보겠다. 온 신문에서 내용을 스포하려고 달려들기에 얼른 읽어주었다. 먼저 읽어본(?) 사람들이 겁준 만큼 잔인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이게 과연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스토리일까? 난 오히려 지극히 사실적이어서 소름끼치더라.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혜의 시점은 오직 꿈을 통해서만 반쯤 보여주고, 영혜의 두 남자 가족과 한 여자 가족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
아내의 언니와 아내의 어머니를 여인으로 훑는 그 징그러운 시선. 사람 대 사람으로 설득할 자신 없으니 가까운 관계로 옭아매는 찌질함. 피 흘리는 아내를 두고 혼비백산하는 와중에 구두짝은 제대로 갖춰 신어야 하는 정신머리. “사위 보는 앞에서 딸을 때리는 장인어른“ 앞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남편. 굽은 장인의 뒷모습을 보고 그가 해왔을 평생의 노동을 짐작하며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는 그의 공감력은 아내에게로는 조금도 뻗지 않았다.

<몽고반점>
이미지가 먼저 왔고, 몽고반점을 덧입혀 상상했더니, 연약한 처제의 모습이 되었다는 추잡한 변명. 결국 붓질과 아랫도리 휘두르는 힘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의 영상은 그렇게 외설적이지 않은 ’예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예술가가 결국 하고 싶었던 걸 생각해보라. 늦은밤 다섯 살 배기 아들을 집에 혼자 남겨두고 뭐하러 갔었나. 상대의 마음은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고, 그저 삽입. 왜? 어차피 자긴 남들은 이해 못하는 예술가니까.

<나무 불꽃>
인혜는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지킬 것이 있다. 아들 지우와 동생 영혜. 남편의 예술똥꼬쇼를 본지 일 년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혼자 고민하고 혼자 짊어져야 했다. 그렇게 삶을 견뎌왔다. 선량한 인간으로서 성실하고 평탄하게. 그러나 뜻밖의 고통은, 유예된 삶의 잔인함은, 실은 그의 삶이 어느 정도 죽음에 물들었다는 걸 방증한다. 하지만 선량한 인혜는 동생과 달리, 남자들과 달리 인간으로서 그의 삶에 조용히 항의하면서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 있는 영혜는, 그저 식물이고 싶었을 뿐이다. 트랜스식물이랄까. 영혜를 함부로 대한 무수한 남자들의 폭력과, 영혜가 가했을 혹은 방관했을 인간으로서의 폭력에 무력해져 이제 동물이기를 그만두고 싶었을 것이다. 죽고 죽일 필요가 없는 식물의 세계로, 햇빛 아래 가슴을 내밀고 그저 해바라기하기를 나무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영혜가 인간성을 하나 하나 뱉어내는 동안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의 입속으로 무언가의 사체를 집어넣으려 했다. 영혜가 가진 꿈은, 그들이 도저히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터메초
샐리 루니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정. 인정한다. 샐리 루니가 우리 시대의 작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두 형제가 각자의 결핍과 상황 속에서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선택을 할 때마다 병신이라고 욕하면서 읽었다. 감정과 생각과 동작의 나열에 지치기도 했다. 이거 너무 과잉이야. 마치 유튜브에서 만담을 틀어놓고 쇼핑몰 앱 세 개를 들락거리며 식사를 하는 나를, 일일이 텍스트로 ‘쓸데없이‘ 기록하는 느낌이었다. 3부에 이르러서야 인물들이 치고박고 감정과 사정이 폭발하면서 몰입감이 올라갔다. 졸려죽겠었는데 잠들면 안 될 타이밍이라 끝까지 읽었다. 마지막 마무리가, 놀랍게도 내가 늘상 중얼거리던 그 말이라서, 쫌 울었다. 공명하는 작가를 만났다.

독자로서 나는 캐릭터들을 무자비하게 평가한다. 그들의 일생 혹은 그 일부와 함께 등장한 인물을 내가 일생동안 다져온 도덕관념과 성질머리를 활용해 나의 이해범주 안에 넣으려고 한다. 피터-실비아, 피터-나오미, 아이번-마거릿, 피터-아이번 모두 정신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관계들이었다. 끝까지 읽기 전까지 이들의 관계는 그저 서로에게 toxic한 것 같았다. 누구네는 절대 솔직하게 굴지 않고, 누구네는 세상의 편견과 풍파에 맞서 싸우느라 곧 지칠 것 같았고, 또 누구네는 그냥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끼리 서로 어긋나게 조우했을 때 마법이 벌어졌다. 작가가 좀 이상화한 감도 없지 않지만, 생각보다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고 상대방이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며… 용서를 구하고 화해한다.

내가 보기에는 절단, 손절, 단절, 고립이 각자를 살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또 거미줄을 쳐서 인생들을 엮이게 만들다니. 이들이 낯선 조우를 할 때 이미 관계맺은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바로 눈앞의 누구를 재단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기에 그 마법이 일어난 것 같다. 나오미-실비아, 나오미-아이번, 마거릿-피터의 만남에서 서로는 “말씀 많이 들었던” 그 인물이 그렇게 부덕하지도, 그렇게 막나가지도 않는 체온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다. 더불어 방해꾼으로 여겨졌던 사람이 오히려 관계를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한다. 오해가 접히고 인물은 고립되지 않는다. 현재에 집중한다. 나는 그 변화가 썩 마음에 든다. 막판에 엄마가 너무 엄마다웠고 마거릿이 홀리한 여신 느낌이 나는 all is well 마무리도 납득할 수 있다. 다른 가정의 엄마가 되어도 여전히 그들의 엄마 역할을 해내고, 동생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애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게 이제는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니.

사실 샐리 루니 신작 나왔단 소식을 들었을 때 시큰둥했었다. <노멀 피플>을 재밌게 읽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왜 나의 다정함이 당신을 상처입힐까 >에서 아주 중요했던 니체의 어느 구절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는 소설이길래.. 읽어보자 결심했다. 그 철학교양서를 반만 이해한 것 같은데 이 소설을 읽으면 남은 반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얻었냐면, 시도해보겠다. 같은 단어 속에 서로 다른 의중을 담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면? 파국에 치닫을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둘이 대화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대화에 참여하게 만드는, 알리고 싶은 어떤 ‘마음‘이 있다는 거다. 한 수 앞을 내다보려다가 마음을 무시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게임은 망한다…. 언젠가는. 억압된 것은 돌아온다. 마음이 시한폭탄이 되지 않게 잘 돌보아야 해.

아니면 그냥 그 폭탄을 터뜨리는 것도 방법이다. 아버지라는 역장이 두 형제의 역할과 행동을 고정시켜놓고 있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 역장이 사라지면서 내면의 분노를 터뜨리게 된 두 형제를 그린다. 둘 다 애정관계에서 자극을 받는데 결과적으로 잘 풀린다. 부모의 품이 석연찮던 두 형제는 연인이라는 괜찮은 안식처를 찾고나서 서로에게 너그러워진다. 문제가 속시원하게 해결되는 양상은 아니다. 그냥, 마주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주하기로 한다. 어쩌면 그게 다다. 근데 이거 사실 무지 어려운 거다. 나는 마주해도 상대는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고 반대로 나는 묻어두고 살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들쑤시면 괴롭지. 이 소설의 묘미는, 내가 괜찮아지기로 결심한 게 상대방에게 적절히 읽혔다는 것. 상대방이 슬쩍 마음을 열어줬다는 것. 각자가 각자의 문을 열었다는 것. 마법이다.

요즘 애착 유형으로 사람을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 등으로 분류하는 걸 많이 봤다. 그리고 ‘정병‘이란 유행어는 나도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심리학 용어가 대중화되고 밈이 되면서 사람들이 마음 상태는 그럭저럭 진단하는 것 같다. 이제 그 다음 단계인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얼해야 하나. 내 생각엔 버티기 같다. 우리는 알고리즘, 쇼츠, 차단 문화 속에서 견디기 힘든 건 치워버리는 훈련을 자주하니까, 그 반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버티는 건 괴롭다. 그 버티기에 문학이 도움된다.정병 온 주인공들의 행적을 눈으로 좇아가며 이런저런 훈수두다 보면 자기 인생을 돌아보게 되고 위로도 받고 용기도 생긴다. 그러니 다들, 인터메초에 문학으로 도망치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머니 내게 오시네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여름 능소화가 피기 시작할 때 읽었는데.. 그냥 읽어놓기만 하려다가 몇 자 끄적여본다. 크루엘라 쇼츠 보다가 문득 떠올라서.

좋았다. 초반에는 에세이라기 보단 소설로 다가왔다. 뒤늦게 소개말을 확인하고서야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에세이구나 인지했다. 글이 재밌었다. 재능 있는 사람이 쓴 글 다웠다. 첫 소설에서부터 자기가 모르는 언어로 번역되어 훨훨 날아갈 만했다. 그녀의 삶 역시 그랬다. 특별하기 그지 없다. 문장을 안 쓸 수가, 못쓸 수가 없는 인생을 살았더라. 아룬다티 로이는 교육받았고, 사랑을 했고, 영화를 만들었고, 정치 격동 속에 살았고, 글을 썼다.

폭군이었던 엄마, 자기에게 재능을 물려준 엄마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글이다. 여왕의 그늘에서 제발로 걸어나온 공주는 여전히 그녀의 딸이다. 엄마는 딸을 긴장 속에 살게 했다. 딸은 엄마가 얼마나 어떻게 자기 맘을 해쳤는지 알고 있다. 그치만 그녀는 그의 엄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가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애증의 부모 자식 관계가 주요 플롯이면 별로 손이 안 간다. 몇 작품 읽어봤으니 됐다 싶다. 또 다분히 개인적인 디테일에는 약간의 피로감까지 느껴진다. 나도 부모님께 불만 많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원망이 어느덧 눈녹듯이 씻겼다. 한동안 질퍽한 거리를 헤매야 했지만, 부모님은 할 만큼 하셨고 앞으로의 내 인생은 나의 몫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아룬다티 로이도 자기 몫을 해냈다. 엄마는 여전히 제멋대로였지만 아룬다티는 그런대로 그녀 곁을 지켰다. 그녀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에 그녀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자기라는 메시지를 받고 얼마나 복잡한 맘이 들었을까.

잔인한 엄마가 버린 사악한 크루엘라는 엄마를 똑닮은 재능으로 엄마를 애타게 하고 결국 엄마의 명예를 말살시켜 복수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경험한 일 아니면 쓰지 않는 작가들은 종종 자기네 인생을 고발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 같다. 그래도 이 책에선 복수보다 사랑이, 미움보다 애정이 더 읽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