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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땅 ㅣ 문지클래식 4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평점 :
[아버지의 땅]은 동명의 단편을 포함한 여러 단편소설이 수록된 작품이다. 수록된 11편의 단편은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모두 과거의 사건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받고 있는 인물들을 그린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한국전쟁과 이념대립의 피해자들이다. 작가는 6.25 전쟁과 남북의 분단이라는 비극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은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상처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상처를 잊거나 극복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감히 위로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 끔찍한 상처들이 있다. 아무런 말도 얹을 수 없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가는 그런 상처에 대해 어줍잖은 위로와 극복의 메세지를 던지는 대신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세상에 알리는 방식을 택했다.
다만, 직접적인 위로와 극복을 전하지는 않으나 간접적인 장치들을 통해 작가가 비극 속 인물들을 조용히 응원함과 동시에 비극을 만들어낸 시대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점은 수록된 단편 중 하나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아버지의 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주인공 이 병장의 아버지는 이념 대립으로 인해 그가 어린 시절 가정을 떠나야 했고, 수십년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군 복무 중이던 이 병장은 훈련 중에 신원 미상의 유골을 발견하고 마을의 한 노인에게 시신에 관해 조언을 구한다. 노인은 이 마을에서 그런 유골이 나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답하며 담담히 과거 마을에서 일어난 전투에 관해 말해준다. 그럼 이 유해의 주인 역시도 빨갱이였을 거라는 군 간부의 말에 노인은 일침을 놓는다.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유해를 수습한 후 노인과 돌아오던 이병장은 노인에게도 전쟁으로 잃어버린 형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 오늘 그 유해가 노인의 형의 것은 아닌가 묻지만 이제 와서 그걸 알아볼 수는 없을 거라는 답변만 받는다.
위의 내용을 통해, 독자는 시대의 피해자들인 노인과 이병장이 발견한 유해가 혹시 그들의 가족 중 한 명은 아니었을까, 이제라도 가족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게 된다. 또한 노인의 말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시대의 비극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일 뿐이며 이념대립 같은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비판의식도 엿볼 수 있다.
1984년에 출판된 이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불행히도 2026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작품 속에서 죽은 뒤에도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이념의 잔혹함은 과거의 일로만 남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진영으로 구분하고, 말과 생각에 낙인을 찍으며,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분단은 지속되고 있고, 총성은 멎었지만 적대의 언어는 여전히 살아 있다.
[아버지의 땅]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가 세대를 건너 지금까지도 현재를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비극은 역사책 속에서 정리된 사건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과거를 회고하는 작품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를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세밀한 시각적/ 청각적 묘사가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나 때론 그 묘사가 너무 길게 이어져서 내용 이해에 피로를 주는 점은 아쉬웠다. 또한 11편의 단편이 독립된 이야기인 것은 맞지만 <뒤안에는 바람소리>와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사평역> 같은 단편은 내용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주는데, 정말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면 세 편이 쭉 이어지게끔 편집했다면 이해에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멘 소총이 수통과 부딪치며 쩔렁쩔렁 소리를 냈다. 나는 어깨로부터 전해오는 그 섬뜩한 쇠붙이의 촉감과 확실한 중량을 새삼스레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항상 누구인가를 겨누고 열려 있는 총구의 속성을, 그 냉혹함을, 또한 그 조그맣고 둥근 구멍 속에서 완강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소름끼치는 그 어둠의 깊이를 생각했다.“
임철우- [아버지의 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