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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하루 ㅣ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센터 문학총서 1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류리수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전에 없던 가을을 타는 건지 어쩐 건지 9월의 슬럼프를 경험하고 있던 나에게 반가운 책 한 권이 다가왔다.
'가와카미 히로미'의 『어느 멋진 하루』
세상, 정말로 모두 힘들어. 산다는 거 참 뭐 같아.
세상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해줄 따뜻한 이야기!
가까운 사람들의 위로보다 오히려 책 한 권의 위로가 더 큰 힘으로 느껴지던 요즘의 지친 나는, 세상에 현기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해준다는 이 문구 하나에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가 더욱 절실해졌다.
도대체 이 책이 날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책과 마주했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담긴 예쁘고 아기자기한 '어느 멋진 하루'는 책 자체로도 따듯함을 진하게 풍기는 책이었다.
「곰, 여름방학, 가을 들판, 갓파 구슬, 크리스마스, 별빛은 옛날 빛, 봄이 되다. 안 놔줄 테야, 풀밭 위의 식사.」
이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을 지닌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왠지 서로 닮아있어 또 잘 어울리기도 했다.
'곰에게 이끌려 산책을 나섰다.'로 시작되는 첫번째 이야기 '곰'
이 첫 문장은 신기한 이야기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작가에게 흥미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산책까지 나서는 곰에 대해 어떤 부연 설명도 제공하지 않는 이 이야기는 '나'와 '곰'과의 산책이 너무나 당연한 듯 나 또한 어떤 거부감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스며들게 만들었다.
신기한 곰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사건없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우리들 일상을 다룬 듯한 이 이야기에서 나는, 그동안의 자극적인 세상 많은 것들을 잠시 잊고 안락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두번째 이야기 '여름방학'에는 귀여운 배의 정령 세 마리(?)가 등장한다.
미묘한 어긋남을 느껴오던 '나'는 방학동안 배 밭에서 일하던 중 그 세 마리 배의 정령 중에서 유독 자신감 없어보이고 소심한 한 마리에게 시선을 던지게 된다.
왠지 자신의 모습이 그 녀석에서 투영된 듯 느껴졌기 때문일까...
과연 배의 정령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고, 그동안 '나'가 느껴왔던 어긋남의 정체는 무엇일까...
"못해." "난 안 돼."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어버려. 안 돼."
이 말들이 어찌나 가슴을 찌르던지...
소심한 배의 정령은 책 속의 '나' 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세번째 이야기 '가을 들판'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에서 눈물을 자아 내게 만들었다.
5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작은아버지의 영혼은 가을 들판을 거닐던 '나'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부인과 딸의 안부를 묻는다.
세상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는 '나'의 작은아버지의 모습과 몇 달 전 돌아가신 나의 외삼촌의 모습이 겹쳐져 마냥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갓파 구슬', 이 네번째 이야기에는 일본 민담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자 물의 요정 갓파가 등장해 '나'와 '우테나'에게 고민 상담을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삼백 년 동안 함께해온 갓파 애인과의 연애 상담을 위해 그들을 찾은 갓파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하고있는 사랑의 모습들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야기...
이 다섯번째 이야기는 요술 램프를 문지른 알라딘 앞에 지니가 나타나듯, '우테나'가 선물한 호리병을 닦으려고 그것을 문지른 '나'의 앞에 치정관계로 인해 살아있지 않은 존재가 된 '코스미 스미코'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녀와 '우테나' 또 '나'는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고 아픔을 이야기 한다.
"살아있진 않지만 성탄절인걸요."라 말하는 호리병의 여인 코스미 스미코에게서 그동안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한 나를 발견한 것 같아 왠지 쓸쓸했다.
여섯번째 이야기 '별빛은 옛날 빛'에서는 여린 아이 '에비오'군과 '나'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누구나 다 어딘가에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우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나." 더 작은 목소리다.
"잠깐 동안이지만." 아이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사람을 못 믿게 됐었어요."
모닥불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불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똑같아 보였다.
입을 조금 벌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기쁜 듯하기도 하고 슬픈 듯하기도 한. 둘 다인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아마 나도 에비오 군도 그런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젠 그만 뒀어요."
에비오 군은 잡았던 손에 조금 힘을 줬다.
"사람을 못 믿는다는 건 슬프기만 해서 싫던걸요."
나도 손에 힘을 줬다. 한동안 그대로 힘을 주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어린 '에비오'군보다 더 어린 내가 아니었는지...
모닥불로 불그레하게 그들의 얼굴이 변한 것 처럼 '에비오'군과 '나'의 대화로 인해 내 얼굴도 불그레하게 변한 듯 했다.
일곱번째 이야기 '봄이 되다'에서 '나'는 가끔씩 들르는 단골 술집 <고양이 집>의 여주인 '카나에'에게서 과거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현기증을 일으키며 만나고 또 헤어졌던 '카나에'의 사랑...
그리고 과거의 사랑이 있을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나'의 말...
사랑을 하는 방법에 있어 서툴렀을 과거의 '카나에'와 과거의 내 모습이 언뜻 닮아보였다.
나도 지금이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다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사랑을 하고프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온 몸의 피부를 '소름'이라는 이름으로 긴장시킨 여덟번째 이야기 '안 놔줄 테야'.
이 이야기에는 작지만 '에노모토'씨와 '나'를 다크써클 가득한 폐인으로 만드는 묘한 능력을 지닌 인어가 등장한다.
지금 내 상황에서 이 인어는 요즘의 나를 더욱 지치고 힘들게 만드는 쓸데없는 고민들과 그 단상들의 메타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나를 놔주지 않는,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드는 그 복잡한 사념들...
그냥 버리면 간단할 것을 뭐가 소중하다고 끌어안고 있다가 점점 더 지쳐가는지...
차츰 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어느 멋진 하루의 마지막 이야기 '풀밭 위의 식사'에서 '나'는 다시 곰과 함께 산책을 나서는데 이때 곰은 자기가 어울리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의 세상을 떠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나에게 어울리는 방식일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내가 원하지 않는 일임에도 타인이 원하기에, 그들 타인에게 어울리는 삶을 내 것인 양 살아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했다.
『어느 멋진 하루』를 읽으면서 나는 참 멋진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지금 나를 복잡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로 괴로워만 하기 보다는, 그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지... 200여 페이지의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많은 걸 생각하고 느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작가가 도대체 이 이야기들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였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없는 신기하고도 신비로운 그 일들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궁금해 할 필요도 또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 그리고 지금의 내 상황에 맞추어 『어느 멋진 하루』속의 이야기 하나 하나를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자신의 모습에서 그 이야기들과 공감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와카미 히로미', 이 작가와 나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