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하지 않는 사랑 - 릴케의 가장 아름다운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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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이들과 함께 교보문고에 갔다. 행사가 많은 5월이라 그런지 발 디딜 틈이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아이들의 책을 골라준 뒤, 가끔씩 들리곤 하던 시집 코너로 갔다. 평소에 시를 즐겨 읽는 편이라 시집 코너는 꼭 들르는 편이다. 그때 한 권이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은은한 베이지 색 바탕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시인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이었다. 어딘가 먼 곳을 동경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은 고등학교 때 처음 보았던 사진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시집의 제목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대학교 때 많이 들었던 릴케의 애인, 루 살로메의 생각이 났다. 사랑에 소유가 없다니? 과연 릴케다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유를 저버리고 나름의 자유를 구가하는 모습이란, 정녕 예술가의 참 모습이 아닐까? 나는 얼른 책을 집어 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시집의 작은 제목은 '릴케의 가장 아름다운 시'였다. 이런 제목을 단 시집들이 옛날부터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는 별로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한 권의 시집 분량치고는 제법 두툼한 그 시집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이 시집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릴케의 시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시집을 사서 어린 영혼처럼 가슴에 품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밤늦은 시각부터 한 작품 한 작품씩 되새기면서 읽어 내려갔다.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품이 시인의 인생의 역정을 반영하듯이 유연하게 흘러갔다. 초기의 약간 어린 듯한 느낌에서부터 가을날의 시인의 단계와 신시집의 시인의 모습을 지나 만년의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까지 읽었을 때에는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 속에서 릴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약간 어려운 시구절에는 역자의 친절한 주석이 달려 있어 내용을 이해하고 다음 구절로 넘어가고 또 시작품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소절, 한 구절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의 노력이 흔적이 역력하게 묻어나왔다. 릴케의 특징은 무엇보다 강한 이미지인데 그것이 우리말로 확연하게 눈앞에 떠오를 수 있도록 달콤하게 옮겨놓았으니 말이다. <두이노의 비가>의 10편의 비가를 이렇게 한 권의 시집에 다 모아놓고 게다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의 중요 작품과 시작노트 및 헌시 그리고 미발표 원고까지 수록한 역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세심한 노력이 우리의 번역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는 일이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창밖의 비는 폭우로 바뀌었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비가 꼭 시의 물결을 이루어 고독에 젖은 도시의 골목을 누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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