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47
임승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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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유의 시에는 장광한 수식이 없다. 너무 길지 않은 호흡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시로 옮길 뿐이다. 시인은 시와 함께 걷는다.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된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 「미래의 사람」에 대해 '시인이 인식한 시와 세계'라는 주제로 나름의 해설을 붙여 보았다.

#붙잡기
“나를 두고 왔다./…/그때 보고 있던 게 멈추지 않고 흐는 물이라서//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 사이에 여름이 오고 “붉어지는 데 집중하다 떨어진 장미를 들고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이//장미는 다 어디로 갔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에서 화자는 눈앞과 손아귀를 떠난 물과 장미 때문에 허탈해 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남은 것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한 번쯤 비유를 끌어다 쓰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비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현실을 시의 차원으로 옮겨오겠다는 의지이다. 현실의 물과 장미 같은 것들은 속절없이 떠나가지만 시에서는 함부로 그러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배우기
시인은 또한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가보려” 한다. 점프슈트는 윗옷과 아래옷이 통짜인 옷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채로 팔을 들면 바짓단도 덩달아 올라간다. 그러니까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간다는 것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옷의 모든 부분이 같이 움직인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의 화자는 아직 점프슈트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점프슈트를 입고 걷기로 가정한다. 없는데도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행동으로 보여주는” 선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화자가 마치 “오른발을 내밀면 왼발이 따라오는”, 점프슈트처럼 걷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행진하는 무리 같다. 이렇게 상상할 때 ‘점프슈트’는 ‘연대’와 나란히 놓고 보암직하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죽 이어진 길”이 된다.
점프슈트를 입고 걸으면 어떤 풍경이 보일까. 먼저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이게 여름이지 뭐가 여름이겠어”라고 말한다. “다리가 길어지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간대는 해질녘에 그림자가 늘어지는 때로 생각된다. 화자는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를 벗어나 사람들의 행동을 본다. “걸어가면서 앉아 있는 걸 보는 거야.//왜 그럴 때 있잖아. 가다가 살짝 옆을 보는//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안 할 거야.” 화자는 사람들로부터 여름의 행동을 배우지만 아주 답습하지는 않고, “뭔가 따라온다는 생각을 버리면 성큼성큼 걸어갈 수 있어.”라며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간다. “한 손엔 텀블러를 들고”, “누구를 만날 것처럼 가다가 아무도 못 만났는데도 다 만난 것처럼” 걸어가는 화자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게 좋았어.”라고 말하는 듯, 안온함이 느껴진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처럼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에도 시의 개념을 적용해 보자. 점프슈트처럼 ‘나’와 함께 걷는 사람들을 바로 시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인은 시로부터 여름을 배운다. “아직 없지만”, 여름에 걸맞은 점프슈트를 입고 밖으로, 거리로 나가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된다.

#기다리기
아직 없는 점프슈트는 언제 입을 수 있는 걸까. 명확히 답하기는 어렵지만 「미래의 사람」을 통해 미래의 점프슈트를 찾아보자. 「미래의 사람」에서 화자는 무덤에 숨어서 누군가가 오는 걸 내다보고 있다. 그 누군가는 “멈추지 않고 걸어오는데도//오늘 안으로 도착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녁 먹으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누군가를 ‘시’라고 생각해 보자. 길 위에서 걸어오는 시는 ‘나’의 시이기 때문에 ‘나’밖에는 불러줄 사람이 없다. “이게 하나의 장면에 불과하더라도//구겨버리지만 않는다면 누군가 오고 있다.”에서 결국 시를 쓰고 있는 지면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시를 만날 것이라는 의지가 드러난다. 시가 당도하길 기다리며 시인은 미래로 간다.

시인은 시 쓰기 행위를 통해 시와 함께 걸어간다. 점프슈트를 입고 멈추지 않는 물과 붉어지는 장미를 바라 볼 것이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에서 여름을 붙잡아주던 시, 「점프슈트를 입고 걸어 다녀」에서 먼저 밖으로 나와 여름을 보여주었던 시, 「미래의 사람」에서 여름이 오기도 전에 출발하여 결국 도착할 시를 쓰면서 시인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오른발을 내밀면 왼발이 따라오는” 점프슈트처럼 움직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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