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
토마스 기르스트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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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서부터 '느린', '오래된' 시간을 읽을 수 있다. 책에 손을 얹으면 몇십년, 몇백년은 족히 살았을 법한 나이테의 튀어나옴과 패임이 느껴진다. <세상의 모든 시간 : 느리게 사는 지혜에 관하여>는 '빠름', '쉼 없음', '짧음'을 거의 절대적으로 추앙하는 현대의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반박한다. 28편의 짤막한 글이 '느림의 미학'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나열되어있다. 짧은 글들 사이에 긴밀한 연결성은 없지만 오히려 그 특성 덕분에 자투리 시간에 챙겨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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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1) 어떤 대상에 시간을 들이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의 시대 한가운데서 내면의 중심을 잡아 주는 방호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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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3~84) 인간이 여러모로 지구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잏는 인류세의 시대에, 호모데우스, 즉 인간은 마치 자신이 심인 것처럼 활개를 치고 있다. (...) 우리의 삶이란 그저 영원의 한가운데를 스쳐간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06) '스프레자투라(sprezzatura : 노력하고 신경 쓴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 일종의 가장된 무심함의 태도)'를 내뿜는 사람은 언제나 신중하고 느긋하다. (...) 스프레자투라는 폭풍우 속의 고요한 눈이며 고된 노동 속의 가벼움이다.

🔖(p120) 신흥 기업가나 창업자가 도태되는 창업자와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버티기 능력이다. 끈기는 장기간의 성공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다. (...) 성공은 재능이나 수려한 외모, 높은 IQ 덕이 아니라 실패 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장기적인 목표 의식과 경험에 힘입는다. (...) 지구력이 필요하다.

🔖(p125) 헨리 제임스는 (...) 예술의 출발점으로서 개인적 경험이 중요함을 서문에 다시 한 번 언급했다. 헨리 제임스는 이것을 '씨앗', '입자', 혹은 '황금 알갱이'라고 칭했다.

🔖(p194)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의 언어란 춤추는 곰을 들끓는 가마솥에 올려놓은 채 음악을 틀어놓고는, 별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느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p213) 우리는 영원히 미완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야망이나 호기심, 헌신적 태도를 버리라는 말은 아니다. (...) 무력함을 깨닫는 것은 절대적 필요성에서 비롯된 압박을 덜어준다. (...) 지속적으로 최선을 다하되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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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글이 더 많긴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벚꽃 kirschblüten> 편이다. 일본의 고요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글인데, 왠지 오리엔탈리즘 이 가미되었다는 느낌을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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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이 짜임새가 탄탄한 것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유유히 흘러가는 편도 있고 주제의식이 명확한 편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애초에 무언가 강하게 피력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자는 그저 200쪽이 조금 넘는 텍스트와 이미지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여유롭게, 부유하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된다.

어떤 대상에 시간을 들이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불안의 시대 한가운데서 내면의 중심을 잡아 주는 방호벽이 될 수 있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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