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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 법정 스님 법문집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 시공사 / 2020년 5월
평점 :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 하루가 모여 나의 삶을 이루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특정 시간이 아닌 바로 ‘지금’, 어느 유명인이나 타인이 아닌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결국 나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무소유>를 소유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면서도, 소유하려 애쓰지는 않았다.
스님의 말씀처럼 ‘시절인연’이 닿으면 내게 올 수도 있을 것이고, 내 것이 되지 않아도 도서관에서라도 볼 수만 있으면 된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소유>를 소유하기 위한 사람들간의 소유경쟁에서 느낀 아이러니에 동참하기 싫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책의 사전서평단으로의 선정은 내게 착한 아이에게 내려지는 상인 마냥, 마치 오랜 습관처럼 하던 기도의 보답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감사한 기회였는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이해도 되었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몰라서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곁에서 말씀해주시는 것 마냥 요샛말로 ‘음성지원’ 되는 듯한 스님의 말씀에 다시금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과 울림이란!
우리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하게 존재하는 데 있습니다.
삶의 부피보다는 질을 문제 삼아야 합니다.
비교하지 말자,
더 가지기보다 가진것에 만족할 줄 알자,
내 통장의 잔고보다, 내 삶의 잔고에 집중하고 채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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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하게 다짐했던 나름의 삶의 철학들.
‘숱하게’ 다짐해야 했던 건, 그만큼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흔들림 속에서도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고, 뿌리뽑히지 않으면 된다고, 일어서면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 다독이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 힘들어 주저 앉아 울기도 했다. 스스로의 생각에 대한 확신에 회의가 들기도 했고, 나만 빼고 다들 (물질적, 정신적으로 모두) 잘 사는 듯한 느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던 날도 있었다.
스님의 서슬퍼런 눈빛과 함께 쏟아지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보기에는 그다지 온기 없이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내게는 되려 얼마나 큰 다독임으로 다가왔는지.
지금은 아니지만 약 2년간 육식을 제한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패스코 채식 단계)
동물 보호, 동물 사랑 등의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다만 건강을 위한 행위였다. 건강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난 후 스스로의 신체를 이용한 일종의 자가임상 실험이기도 했다.
전혀 거창하지 않은 이유로 시작했던 채식은 생각보다 꽤 길게 이어졌었고, 무엇보다 신체 변화와 더불어 사고(思考) 자체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직접 느꼈다. 주변을 봐도, 육식을 즐기는 이들의 성격이 채식을 즐기는 이들과 분명히 다름을 느낀다. 또한 채식 과정에서 책에서 나오듯 육식과 지구온난화의 관계 등 환경 문제 등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다시 육식을 시작하면서 느껴진 몸의 변화는 육식의 폐단?!을 직격탄으로 알려주는 신호였다.
여기서 육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화하고, 채식옹호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전부터 공감했고,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내 아이가 먹을 음식과 식재료를 직접 고르고 조리하며 느낀 것,
어떤 음식을 먹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이 달라집니다
...그것이 생각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아주 깊이 공감하고 동의하는 바이다.
비단 육식뿐만 아니라 인스턴트나 레토르트 음식을 자주 쉽게 접하는 요즘, 우리의 사고방식도 점점 인스턴트화 되어감을 느끼고 있다.
조미료로 길들여진 입맛을 가진 사람에게는 집밥이 맛이 없다. 믹스커피가 맛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값비싼 원두로 만든 커피도 그저 쓴맛밖에 나지 않는 ‘맛없는’ 커피일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입맛은 ‘유동적인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변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에도 바른 입맛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특정 종교가 없더라도 매일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이를 낳아 ‘보살같은’ 엄마가 되고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리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나의 생활 습관 하나하나가 업이 되고, 그 업이 나와 가족에게 돌아온다. 이런 설은 비단 책에서 스님께서 들어주신 예가 아니더라도, 점점 나이 먹을 수록 주변에서 겪거나 귀동냥 들을법한 이야기들이다.
잔치보다는 문상을 더 많이 가는 나이가 되어갈 수록,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건강하던, 바로 아침까지 연락하던 지인이 그날 오후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 했다는 소식에 이를 데 없는 삶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내 장례식에는 과연 몇 명이나 올까’라는 고민을 한다는 것에서 인간이 얼마나 빈약한 존재인지, 천박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영혼임을 다시금 절감한다.
내 기도가 한낱 가벼운 바램‘따위’가 아닌, 무게있는 진심이 되기 위해 깊은 ‘침묵’속에서 성실히 행해야 함을 느끼고 또 느낀다.
종교나 신앙의 유무나 차원과는 관계없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나의 작은 실천.
기도와 기복(祈福)은 다르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스님의 ‘좋은말씀’을 읽고 잘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간다면 그리 어렵지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많은 중생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중생인 채로 ‘함께’ 살아가기에 견디고 버티는 것은 아닐까.
힘들다면 덜 힘들게, 좋다면 더 좋은 곳, 더 좋은 시간으로, ‘좋은말씀’ 듣고 내 터전과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맑고 향기로운’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