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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리커버) 문학동네 숏클래식 리커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9월
평점 :
절판


필립 로스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을 조각낸 뒤, 보석 파편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이듯 세공해낸다. 그리하여 모인 조각들은 결국 하나의 빛나는 집합체가 되어 삶의 가치를 묵직하게 드러낸다. 독자의 삶을 담은 듯 무색무취한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깊고 날카로운 충격으로 다가온다. 마치 필립 로스가 모든 남자들의 운명을 책의 페이지 안에 몰래 숨겨둔 듯하다. 삶의 무의미함, 그리고 죽음의 무게에 우리는 서서히 짓눌린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다소 과장되었을지 모른다. 작중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주인공의 삶은 내 아버지의 삶을 닮았고, 그의 내면은 마치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와 나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을 예견한 것만 같아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필립 로스의 탁월함은 인간 본성의 가장 은밀한 층위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의 통찰은 내면의 심연을 넘어서, 우리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본능의 그림자까지 꿰뚫는다. 그는 하찮고 본능적인 욕망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정교하게 추적하며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평범한 일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는 무풍의 방 안에서도 공기의 움직임을 읽는 사람처럼, 정적 속의 미세한 동요를 포착해낸다. <에브리맨>을 읽으며 나는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가 문장이 된 상태를 경험했다. 어쩌면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이 내면 깊은 곳의 나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내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뛰어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필립 로스가 인간의 감정을 정제하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 통찰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추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며 깊이 후회하는 주인공의 사색은 누구나 지나온 인생의 어딘가를 건드린다. 필립 로스는 그런 삶을 비난하지 않는다. 한없이 부족한 인생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는 중립적인 관찰자의 위치에서 인간의 본성을 응시하며, 독자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독자는 그 어떤 허구보다 무거운 현실성의 무게에 짓눌린다. 이 작품은 소설이지만, 마치 실재 인물의 일기장을 몰래 들춰본 듯한 진실함을 전한다. 독자 자신의 일기장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느낌마저 준다.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작가의 말처럼, 묻힌 곳에서 뼈가 되어,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게 될 우리의 허무한 인생에 대한 경고일지 모른다.


우리가 죽은 자리에는 뼈만 남는다. 그 뼈를 찾아오고 애도해줄 사람은 결국 남은 자들이다. 주인공처럼, 죽음이 다가온 시점에서 늦은 후회와 함께 자신의 뼈를 찾아올 누군가를 갈구하기보다, 아직 늦기 전에 주변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는 건 어떨까.


뼈가 되어도 후회 없을 삶을, 오늘부터 시작해보라는 따뜻한 권유처럼, 나는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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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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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책장을 삼키고, 활자가 재로 흩어진다. 화씨 451은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아니라, 불태워지는 것이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것은 사고의 말살이며, 기억의 단절이며, 인간이 더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담은 마스터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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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책
윌북 / 2022년 11월
28,000원 → 15,000원(46%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판매자 : light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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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05월 25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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