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낙원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51
존 밀턴 지음, 이창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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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쏟아지는 방대한 각주의 폭탄을 지나 마주한 1, 2편의 지옥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처참하게 추락한 유황 바다 한가운데서 타락천사 군대를 일으켜 세우는 사탄의 영웅상과 그의 불꽃 같은 연설을 읽으며, 무신론자인 나조차도 감탄을 넘어 가슴속으로 사탄에게 '아멘'을 외치고 싶어지는 묘한 모순을 경험했다.


"천국의 노예가 되느니 지옥의 지배자가 되겠다!"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장엄한 카리스마를 지닌 <실낙원>의 사탄은 단지 '절대 악'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고귀하고 치명적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밀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편에 서서 글을 썼다"라고 말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실제로 밀턴은 자기 자신을 사탄에 대입해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다 모든 것을 잃은 그의 비극적인 말년이 사탄이라는 인물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빛나던 대천사 '루시퍼'가 빛을 잃고 지옥의 '사탄'이자 바알세붑을 비롯한 타락천사 군대의 수장이 되는 이 오프닝은, 인류 문학사가 만들어낸 가장 입체적이고 위대한 다크 히어로의 탄생기였다.


악역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구현한 작품은 <실낙원>이 최초라고 한다. 이 작품 이후로 우리는 매력적인 악당들이 즐비한 세상에 살게 되었다. 악에게 서사와 매력을 부여하는 다크 히어로, 그 거대한 빌런의 계보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성경의 뼈대 위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작가의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타락천사'라는 하나의 족보로 묶어버린 밀턴의 발상은 현대 장르 문학이 자랑하는 멀티버스 세계관 통합의 교과서가 되었다.


밀턴은 신의 섭리가 정당함을 입증하겠다며 '자유의지'라는 방패를 들어 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이성적인 독자의 눈에 신은 여전히 정교한 개미지옥을 만들어둔 창조주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작가의 종교적 의도가 무색해질 만큼, 그가 휘두른 천재적인 필력은 종교적 시스템이 가진 부조리를 날것 그대로 폭로하고 반역자 사탄과 아담, 그리고 하와에게 가장 인간적이고 영웅적인 생명력을 부여했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실낙원>을 읽으며 역설적이게도 더 선명한 무신론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이 책은 내 인생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각인되었다.


<실낙원>을 읽으며 성경 원문을 직접 확인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창세기 속 천지창조의 과정,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낙원 추락의 이야기들은 불과 A4 용지 몇 장이었다. 족보와 결과만 툭툭 던지는 압축된 텍스트에 불과했다. 밀턴은 이렇게 적은 정보를 가지고 600페이지에 달하는 웅장한 우주적 대서사시를 창조한 것이다. 그의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들이 디테일을 더하면서 설득력이 생긴다. 이건 단순한 작가의 영역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이다.


더 소름 돋는 것은 이 작품이 쓰인 배경이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 실패 후 정치적 수배자로 몰려 모든 것을 잃었고, 두 눈이 완전히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폐허 속에서 딸들에게 원어 성경을 읽게 하며 구술로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성경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와 고대 신화, 지리학을 완벽하게 암기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서 실시간으로 읊어낸 그의 지성, 그리고 시력을 잃고 권력이 사라진 암흑 속 삶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집념은 그 자체로 지옥 유황 바다에서 불꽃을 태우던 사탄의 카리스마와 완벽하게 겹쳐진다.


37일간의 길고 장엄했던 독서. 1시간에 20페이지를 채 나가기 힘들 만큼 밀도가 높았던 독서 경험은 12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완벽한 피날레를 맞이했다.


에덴동산의 닫힌 문 뒤로 불칼이 번뜩이고, 자신들의 낙원을 뒤로한 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아득하고 막막한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담과 하와의 마지막 모습.


낙원을 잃어버린 그들의 앞날에는 가시덤불과 피땀 흘리는 노동, 그리고 죽음이라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신의 절대적인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의 첫걸음은 종교를 떠나 아련하면서도 숭고했다. <실낙원>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인간의 조상이라면, 나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그만큼 존엄하고 아름다운 인간상으로 그려졌다.


J.R.R. 톨킨이 <실마릴리온>으로 거대한 신화를 창조하고, 프랭크 허버트가 <듄>으로 우주적 서사를 썼다 한들, 그 어떤 현대의 거장도 존 밀턴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들은 모두 밀턴이 최초로 개척해 놓은 거대한 지반 위에 집을 지은 후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반으로 이러한 서사시를 쓸 수 있는 대시인의 자격은 쉽게 주어지지 않기에.


내가 읽은 것은 단순한 옛날 종교 소설 한 권이 아니었다. 무신론자의 냉정한 눈으로 봐도, 후대 인류의 모든 상상력과 서사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높고 거대한 뿌리 그 자체였다.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신을 더 믿지 않게 되었지만, 인간의 지성과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극치를 목격했다.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존 밀턴의 <실낙원>이 그 중 하나였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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