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교회사 - 펭귄 교회사 시리즈 1
헨리 채드윅 지음, 박종숙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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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4월에 읽은 두 번째 책.

 

 헨리 비텐슨이 쓴 [초기 기독교 교부]라는 책을 읽을 때 가졌던 기대감을 (당시엔 좌절해야 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채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역시 이 책도 발행된 지가 좀 되서 그런지 옛날 책을 읽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류의 저서로 좀 더 최신의 책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한다. 책의 논조가 현재 주류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에 대한 무조건적 옹호가 아님을 여러 대목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개운치는 않다. 나는 아직도 목마른가 보다.

 

외국의 지배와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경제 상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지중해 세계의 전역에 흩어져 흩어진 유대인을 이루게 되었고 …… 1세기 로마에는 열하나 혹은 열둘의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 전체로 보면 유대인이 약 백만 명이나 되었다 …… 가톨릭 교회의 라틴 기도 일과서나 또는 성공회의 기도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점들에 있어서 이러한 예배 방식의 상속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들은 빈번한 예루살렘 순례와 또한 성전 유지를 위한 연례적 헌금을 통해 조국에 대한 일체감을 보존했다.’(9)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는 다수의 이방인들 …… 흩어진 유대인들의 회당 주변에는 보통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경건한 이방인들이 생기게 되었다 …… 이러한 우호적 이방인들 사이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첫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10)

 

원래의 문서들은 랍비학파들의 주석적 전통에 의해 보완되었다(이러한 전통이 갖는 위치에 대한 문제는 첫 세기에 교회와 회당 사이에 날카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게 70인역은 신비한 후광에 둘러싸인 것이 되어갔다 …… 72…… 72…… 그리스도인들이 원문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당황스럽게 여겨진 다음에야 비로소 문자적 의미에 좀더 충실한 다른 번역본들이 헬라 지역의 회당들에서 선호되게 되었다 …… 일부 랍비들은 …… 70인역을 만든 것을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과 같은 죄악으로 비난하였다.’(11)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동료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지 때문에 로마 통치자 빌라도 치하에서 수치스러운 법적 사형에 넘겨준 그 인물을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 즉 메시야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11)

 

바리새파 ……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뿐 아니라 ……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엄격한 열심 …… 사두개파는 주도적인 귀족 가문 출신들이 많았는데, 단지 모세의 율법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서기관들의 전통에 대해서는 구속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모세 시대로부터 한참 후에 쓰여진(이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귄위를 결여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서와 같은 책에서만 발견되는 교리라 하여 이를 배척했다 …… 에세네파 …… 이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는 대플리니우스, 필로, 요세푸스 등에게서 발견되는데 …… 쿰란 공동체의 터는 66-70년 사이 유대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참화의 현장이기도 하다. 에세네파는 노예제도는 …… 원칙적으로 배척 …… 정식 구성원은 독신일 것을 요청하였다 …… 맹세를 배척하였다 ……. 안식일 준수에 특별히 엄격하였다 …… 신약의 문헌들과 쿰란 문서들은 서로를 조명해 주기는 하지만, 어떤 문서 그룹도 다른 문서 그룹을 설명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14)

 

교회는 사두개파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대부분 1세기 유대교의 이질적 사회 내부의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그 구성원들을 얻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로마 제국의 세 번째 도시인 안디옥 …… 에서 이교도들은 곧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대중적인 이름으로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다.(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유대적 이름은 나사렛파였다).’(15)

 

바울의 서신들과 사도행전이 이방인 공동체들의 발전 과정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반면, 유대의 모교회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16)

 

4복음서는 사도 요한의 제자들 그룹에서 생산된 것이다 …… (각주. 라틴 저술가들은 터툴리안과 제롬을 따라 사도 요한이 로마에서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상처를 입지 않고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5 6일이 그 축일 …… ).’(17)

 

‘(각주.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클레멘트의 서신, 로마 교회에 보낸 이그나티우스의 서신, 2세기 저술가들의 일치된 전승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단히 개연성이 높다. 이에 더하여 160-7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바티칸 언덕 위의 공동 묘지에서 최근 발굴된 기념비도 이를 뒷받침한다).’(18)

 

고대 세계에서 어떤 사람도 유대인들에 관해 최소한 세 가지는 알고 있었다. 첫째, 유대인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어떤 이교 의식에도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는 반사회적 행위로 보였다), 둘째, 이들은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고기는 물론 돼지 고기를 일체 먹지 않는다는 것(이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셋째, 이들은 남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했다는 것(이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등이다.’(19)

 

헬라의 저녁 만찬은 신전에서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신 자신이 이러한 만찬의 주인으로 여겨졌다.’(19)

 

팔레스타인의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곧 돌아오실 것을 기대했다. 바울은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교리는 헬라 세계의 복음화에 있어서 자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헬라 세계에서는 주된 사변적 관심이 종말이 아니라 우주의 시초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20)

 

주후 13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이후 모든 유대인들은 유대로부터 축출하고, 예루살렘이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이교의 신전과 극장을 가진 헬라 도시로 변모.’(21)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내부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종파로 머물러 있었다 …… 이방인에 대한 선교 자체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 구약은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동료 유대인들에 의해 배척당하기는 했지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하여 안식일, 할례, 그리고 다른 유대교의 절기들을 준수했다 …… 점차적으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중요성을 상실해 가게 되었다 …… 이레니우스 이후 유대인 그리스도교는 …… 일탈적 종파로 여겨지게 되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에비온파라고 불렀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된 명칭이다.’(24)

 

예루살렘 공동체는 주후 66년 유대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을 떠났으며, 바르 코코바의 지도 아래 132-35년 사이 하드리아누스 전쟁시에는 잠재적 배신자들로 여겨져 다시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24)

 

사도행전에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아래 로마 제국이 복음 확장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암시되어 있다.’(25)

 

남자들만을 위한 금욕적 종교인 미트라교는 …… 군대의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미트라교는 그리스도교의 성만찬과 별로 다르지 않는 거룩한 식사를 함께 나누었으며 …… 퀴벨레교는 …… 3 15-27일 사이의 대대적인 축제로 유명하였다. 금식과 아티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피의 날’(3 22)이 지나면, 3 25일 힐라리아 신의 부활을 경축하면서 슬픔은 기쁨으로 변한다(그리스도교의 고난 주간과 부활절과 강력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각주. 4세기의 이교의 그리스도교 비판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교회가 이교의 의식을 도용했다고 비난하였다. 두 축제는 모두 촛불을 켜고 철야하는 관습을 갖고 있었다).’(26)

 

타키투스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밤에 자기들끼리 만나 근친상간을 범하고 사람을 잡아 먹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이러한 비난은 보편적 사랑과 성만찬에 관한 용어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27)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익명의 서신이 쓰여졌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추종 그룹의 구성원임이 명백.’(28)

 

칼리굴라와 네로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황제들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민들이 황제에게 신적인 영예를 바치는 것을 전통적으로 금지시켜 왔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와는 정반대 …… ‘황제의 신으로라는 관습적인 맹세를 공식적으로 의무화하였다.’(28)

 

요한계시록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로마를 성도들의 피에 굶주린 음녀로 비난하고 있는 것은 이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의 갈등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29)

 

로마법에서는 고발이 중상임이 판명될 경우 고발자는 무고죄로 처벌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중대한 고발을 제기할 때는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31)

 

일반 대중은 항상 홍수나 흉작 또는 야만족들의 침략과 같은 재앙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무신론의 영향 때문에 옛 신들을 잘 받들지 않은 것에 대한 이들의 분노의 표징이라고 믿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31)

 

박해는 결코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다.’(32)

 

코모두스 황제의 첩이었던 마르키아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로마 교회를 위해 상당한 정도로 박해를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다.’(32)

 

일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자들은 순교를 당하기 위해 도발적인 행위를 자초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몬타누스주의자들.’(33)

 

‘300년 무렵 스페인에서는 황제 숭배 예식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 사제라는 구별된 직분을 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좀더 순결한 신앙을 추구하던 형제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때에 따라서는 참으로 진지한 마음을 가진 정통 신자들조차도 혹시나 자신들이 사소한 것들에 목숨을 거는 괴짜들은 아닌가 의심하며, 도대체 어떤 점들에 있어서 더 이상 타협할 수 없는 것인지를 묻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34)

 

매 주일마다 그들은 성만찬을 나누기 위해 모였다.’(36)

 

신약성경에서 유다서는 아가페 또는 사랑의 축제를 악용하여 이것을 방탕한 성적 문란 행위로 타락시켜 버린 어떤 영지주의 그룹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41)

 

영지주의가 그리스도교로부터 끌어들인 주된 요소는 구속이라는 중심적 관념이었다 …… 구속이란 인간의 책임있는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의한 것이며, 신적 불꽃을 갖고 있는 예정된 택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43)

 

창조된 질서에 대한 영지주의자들의 평가절하가 초래한 또 다른 결과는 구약 성경에 대한 폄하였다 …… 구약 성경의 하나님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을 가진 정의의 하나님으로, 예수에 의해 선포된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와 대조시키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러한 대립은 특히 마르키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 유대인들의 하나님은 변덕이 심한 분이라고 마르키온은 주장했다 : 그는 우상 만드는 것을 금지시킨 다음, 모세에게는 구리로 된 뱀을 만들도록 명령한다. 그는 또한 전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담이 어디 있는지 물어야만 했으며, 소돔과 고모라의 상태가 어떤지 알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 구악 성경에 대한 마르키온의 평가에는 끊임없이 반유대주의의 함축이 묻어난다 …… 그는 복음서들 중에서 단지 하나만이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그것은 누가복음서임에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45)

 

간단히 말하면 중심적인 논쟁점은 권위의 문제였다 ……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일치의 구심점으로서 지역 감독(주교)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원심 운동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다 …… 감독을 주님 자신을 대하듯 대해야만 한다고 주장.’(47)

 

이레니우스의 시대에까지도(185-190) 이 주님의 말씀의 구전 전승은 아직까지 완전히 문자화되지 않은 것으로서 독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 순교자 저스틴은 …… 조화 복음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제자 타티안은 이에 요한 복음서를 더하여 [4복음 조화서](Diatessaron)를 저술하였다 …… 이레니우스는 복음서가 넷이 존재하는 이유를 숫자상의 원리에 근거하여 교묘하게 옹호하였다. 넷이란 네 방향, 에스겔에 나오는 네 얼굴을 가진 천사,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를 닮은 천사 등에 상응하는 거룩한 숫자라고 주장했다 …… 요한 복음서는 …… 이레니우스는 이것이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저술임을 능란하게 옹호하였으며, 계시록도 또한 그의 저술이라고 주장했다. 로마에서는 …… 히브리서가 제외되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서방 전통은 이 서신이 바울의 저술이 아니라고 여겼고, 후에 200년 이상이 지나서야 동방 교회의 권위에 근거하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49)

 

‘’사도라는 이름과 역할은 주님으로부터 복음 전도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고전12:28) …… 두 세대 안에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로부터 주교, 장로들, 집사들로의 이러한 변천에 관한 정확한 역사는 …… 대체적으로는 어둠 속에 묻혀 있다.;(52)

 

회중들이 조직화됨에 따라, 순회 전도자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수행되던 역할은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영감있는 설교가 일반적인 지역 목회에 기대되었다 …… 교회가 도시들을 그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자연스런 선교 전략이었다 …… 도시가 집사들을 파송함으로써 시골의 회중에 봉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가 되었다. 2세기와 3세기 동안에는 집사들이 실제적으로 성만찬을 집전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관례는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아를 회의와 니케아 공의회에서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때쯤에는 시골의 회중을 위해 그곳에 정주하는 장로가 성만찬을 집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도행전 6장의 칠인 …… 이 칠인과 집사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동일시한 것은 이레니우스.’(55)

 

장로-감독들 중에서 한 사람이 수석의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으며, 다른 동료들이 장로라고 불리는 반면, 그는 감독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 안수할 수 있는 권한 …… 교회들 사이의 연락 …… 자기들의 회중을 대표해서 참여하여 안수와 기도에 동참.’(56)

 

히폴리투스 시대의 로마 …… 감독의 선출은 전체 회중 즉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 모두에게 달린 것 …… 분열을 초래할 수가 있었다 …… (각주. 3세기 중반 로마의 파비안은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 앉았기 때문에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신자들은 이것을 성령의 선택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 4세기에 그리스도인 황제가 나타나게 되면서 …… 중요한 도시들의 감독은 황제에 의해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 관례가 되었다.’(57)

 

속사도 시대 만큼이나 귄위가 스스로를 주장함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자유란 거의 무정부 상태를 의미했던 시기는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거의 없었을 것이다 …… 2세기에는 한 도시 안에 한  감독, 장로들, 집사들이 있는 세 계층 구조가 논란 없이 교회에 받아들여졌다 …… 3세기에는 …… 대도시의 주교(감독)들에게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되었으며, 제국의 가장 큰 세 도시, 즉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의 주교들에게는 더욱더 큰 영예가 돌려지게 되었다.’(58)

 

직접적인 영감과 간접적인 권위 사이의 대립은 170년대의 몬타누스주의 위기에서 날카롭게 드러난다 …… 두아디라에서는 전 교회가 거의 한 세기 동안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몬타누스파 …… 터툴리안을 개종자로 얻게 되었다. 터툴리안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가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주교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 가톨릭 교회에 끼친 몬타누스주의의 주된 영향은 계시는 이미 사도 시대와 더불어 종말을 고했다는 확신을 크게 강화시켰으며, 따라서 신약 정경이 완결되도록 촉진시켰다는 것이다.’(60)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행복에 …… 대한 인간의 갈망에 직접적으로 응답했다 …… 고대의 스토아주의는 행복이란 우리가 획득하고 보유할 수 없는 일체의 사물들에 대한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그리스도인들은 스토아 윤리에서 마음에 맞는 많은 것을 발견했으며 (“세네카는 종종 그리스도인처럼 말한다고 터툴리안은 기술하고 있다). 스토아주의의 지혜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63)

 

‘2세기 후반에 이르면 어쨌든 로마와 카르타고에서는 신자들을 위한 묘지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가장 오래된 묘지들 중의 하나가 로마의 남쪽 아피아 가도에 위치한 카타쿰바스라는 이름의 장소이다. 이로부터 지하의 회랑 형태로 된 공동 묘지가 카타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그리스도인 형제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기만 하면, 최대 사흘 동안은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고 확실하게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 성직자의 사례비 …… 5세기 로마에서는 수입의 1/4은 주교에게 지급되었고, 나머지 3/4으로 다른 성직자들, 구제 목록에 올라있는 병들고 가난한 자들, 그리고 교회 건물의 유지에 똑같이 삼등분하였다.’(64)

 

헌금의 분배는 명백히 잘못될 소지가 있었다 …… 251년 무렵 로마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나, 그 일반적 수입만으로 주교와 46명의 장로, 7명의 집사, 7명의 부집사, 42명의 복사, 52명의 축귀사, 독경사 그리고 문지기들뿐만이 아니라 1,500명 이상의 과부와 가난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있다.’(65)

 

‘4세기 초부터 …… 현금과 토지가 유언에 의해 교회에 증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증여를 합법화시키는 321년 콘스탄티누스의 법 제정 …… 법 제정의 결과 4세기에는 교회에 증여된 재산이 매우 증가하게 되었다. 소아시아와 시리아에서는 4세기 후반 개인 재산의 일정 비율을(보통1/3) 교회에 증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66)

 

그리스도교는 특별히 여인들 사이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전파 …… 그리스도교는 여성이나 노예들에게 정치적 해방을 선사하지는 않았지만 …… 이들의 가정 내에서의 위치를 매우 고양시켰다.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서의 노예제에 관해 교회가 보수적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정치적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로마서 13장에 기술되고 있는 것과 같은 국가와 법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67)

 

바울 사도에 따르면, 노예제도는 불신자와의 결혼과 같은 것인데 …… 그리스도인 주인은 주교의 입회 하에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엄숙하게 선언하기도 했다. 이것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관리 앞에서의 공식적인 노예 해방과 동등한 법적 효력을 부여받았다. 교회 안에서 주인과 노예는 형제였다 …… 4세기 후반 무렵 제국법은 주인의 허락이나 금전적 보상 없이는 노예의 안수를 금지시킴으로써 재산권을 보호하기 시작했다.’(68)

 

‘3세기의 에데사 교회는 예수의 72인의 제자 중 하나인 아다이가 에데사 교회의 창설자라고 주장했다. 아다이는 흑왕 아브가르가 예수께 쓴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 에데사에 파송되었다는 것이다.’(70)

 

‘250년 무렵 이탈리아에는 약 100개 정도의 주교 교구가 있었다 …… 갈리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는 바울의 제자 그레스게(딤후4:10)와 더불어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71)

 

이레니우스는  헬라어는 물론 켄트어로도 설교.’(72)

 

헬라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관습의 차이들이 있었다. 통속적으로 구어직언 표현을 써서 성경을 라틴어로 처음 번역한 사람은 아마도 아파르키 선교사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한 시기에 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성경을 번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개인적 노력들이 합해져서 첫 라틴 성경이 되었으며, 400년 무렵에는 표준역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제롬의 개역본(소위 불가타)이 나오자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다.’(75)

 

교회가 처음부터 비판자들과의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는 것과 교회의 교리가 자체 안에서의 또한 외부 사람들과의 지적인 대화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존재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76)

 

유대교 정통 회당은 모든 유대인들이 단지 선택된 백성에 속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최소한 씨앗 상태로라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자신들의 믿음을 행위로 실천하지 않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77)

 

‘2세기의 그리스도교 문헌들이 강력하게 도덕주의를 강조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도덕적 무정부 상태의 위험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러한 도덕주의 경향을 사도 시대의 원래의 활력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쉬운 일일 것이다.’(77)

 

이교도들의 눈에는 …… 그 종교가 한 민족의 종교여서 조상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명예스러운 명분이 있을 때는, 제국 내에서 관용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2세기에 그리스도교는 비밀스런 악덕의 혐의를 광범위하게 받고 있었고, 로마 군대에서의 병역 의무 수행에 일반적으로 유보적.’(78)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큰 관용을 얻는 것이 가능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유대인들이 이교들에 대한 대중적 비난에 더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필로나 요세푸스 모두 성경의 하나님은 유일하게 참되신 하나님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감정을 모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동료 유대인들에게 다른 종교들에 대해 정중한 태도를 가질 것을 권고했다.’(79)

 

교회는 사회의 모든 계층을 사로잡고자 의도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의 권력 획득에 무관심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79)

 

순교자 저스틴이 최초로 제시한 프로그램 …… 으로 교회는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스토아 주의의 윤리와 공통의 목적을 갖게 되었다 …… 저스틴에 따르면, 교회의 확장은 그리스도의 승천과 최후의 심판 사이의 중간기를 형성한다.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 이 최후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80)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꾸며낸 이야기였다면, 사도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논증은 전개된다.’(81)

 

사르디스의 주교 멜리토의 견해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평화 확립은 복음을 위한 신적 준비라는 섭리의 한 부분이었다 …… 순교자 저스틴은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파괴한 로마 군대는 ……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을 하나님의 행위라고 보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교가 더 확장되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제국의 결정이라는 요새 안에 세우셨다는 것이다.’(82)

 

다신론의 옛 신들은 본질적으로 …… 지역신이었다. 이시스 숭배 종교나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들 …… 보편성의 느낌이 없었다. 2세기 이교도들은 이 지역 신들을 지방 총독에 비유할 수 있는 존재로 해석했다. 지방 총독은 …… 최고 권력자를 위해 세상을 다스린다 …… 3세기에 이르러 유일신론을 향한 이러한 노력은 태양 숭배와 결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제국 내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 종교에 대한 제국의 필요에 그리스도교가 가장 잘 응답했기 때문이다.’(83)

 

순교자 저스틴 …… 처음에 그는 스토아 교사 …... 밑에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에게로 옮겼다 …… 파티고라스 학파의 교사에게로 옮겼다가, 최종적으로는 플라톤 철학 교사 문하로 들어갔다 …… 그는 그리스도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인정된 철학 교사의 복장을(이것은 그의 시대에는 권위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서양의 성직자의 칼라와 연관된 것이다) 입기 시작했다.’(85)

 

아브라함과 소크라테스는 다같이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이다 …… 저스틴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통일성의 원리이며, 우리가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다. 진리는 다양한 철학 학파들이 종교와 도덕을 다루는 한, 나누어진 씨앗처럼 이들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87)

 

저스틴은 …… 인간의 자유 의지를 믿었고, 따라서 구원이 인간의 도덕적 덕과는 관계없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예언의 성취라는 논증을 강력하게 신뢰했기 때문에, 마르키온이 구약을 폄하하는 것에 극력 반대했다 …… 죽음 이후 인간의 운명은 …… 문자적인 방식으로 해석한 부활’ …… 천년 동안 성도들과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고자 돌아오실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였다.(각주. 천년왕국 신앙은 여러가지 요소들의 혼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바벨론 점성술은 일곱 혹성의 지배 하에 있는 천년이라는 관념 형성에 기여하였다. 90:4(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나이다)이 창세기 1장의 이레에 걸친 창조에 대한 해석의 열쇠를 제공하였다 ……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에게서 발견되는 관념, 즉 세상의 역사는 6,000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일곱 번 째 천년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을 것이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88)

 

심지어는 아우구스티누스까지도 귀신들이 미래를 예지하는 약간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90)

 

이레니우스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신학은 안정되고 체계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 두 완전한 저술이 보존 …… [사도적 가르침의 증명] …… [잘못하여 지식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논박] …… 이레니우스의 논박은 주로 마르키온과 발렌티누스를 향하고 있다.’(91)

 

새로운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원래의 창조의 총괄갱신이다 ……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형상은 침해 받지 않고 남아 있으나, 하나님의 모양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은 상실한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할 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구원을 타락 이전 낙원에서의 상태의 회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저스틴의 지상의 천년 왕국 희망을 받아들이기가 수월했다.’(92)

 

이레니우스는 마르키온이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권위 있는 신약 문서들에 대한 고정된 목록 즉 정경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 그의 신약 성경은 전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정경에 실제적으로 일치하는 바(각주. 이레니우스는 요한 3, 야고보서, 또는 베드로 후서는 결코 인용하지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최초의 저술가이다.’(93)

 

이레니우스는 반석과 같은 사도적 기초 위에 세워진 불변의 동일한 정통 교회와 서로간에 다투면서 항상 체계를 변경시키는, 분열을 일삼는 이단 종파들을 대조시키는 것을 좋아하였다.’(94)

 

이레니우스는 보편적 교회가 마치 모든 주제에 대해 완전한 일치와 통일된 사상으로 특징지워지는 공동체이기나 한 것처럼, 이상적이고 거의 낭만적인 용어들로 교회에 대해 기술하였다 …… 소아시아 교회들은 부활절 날짜를 …… 유대교 유월절과 같은 날짜에, 즉 그 날이 언제든지 간에 유대력으로 니산월 14일에 지켰다. 부활절이 로마에 소개되었을 때( 160), 부활절 축제는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유월절 직후의 일요일에 축하되었다 …… 190년경 로마의 주교빅토르가 부활절을 지킴에 있어서 일치를 요구 …… 소아시아에서는 170년경 ……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식사인지 아닌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 …… 빅토르의 간섭은 …… 성공 …… 그렇지만 14일에 부활절을 지키는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 …… 9세기까지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자신들이 가장 오래된 사도적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14일 주의자들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에는 하등의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은 단지 시대에 뒤떨어졌기 때문에 이단이 되었다.’(98)

 

이레니우스의 언어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안디옥의 테오필루스는 …… 하나님과 관련하여 트리아드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99)

 

저스틴은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 2세기 후반 무렵 요한 복음서의 권위가 온 교회 안에 확립되면서, 저스틴이 제시한 이러한 논증의 힘은 압도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99)

 

‘’성부수난설’ …… 현대의 저술들에서는 …… ‘양태론이라 불리는데, 이 견해에 따르면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한 동일한 존재의 양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새 이름은 순전히 (역할을 묘사하는-역주) 형용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100)

 

단일신론 논쟁은 …… 3세기 내내 이런저런 형태로 계속하여 교회를 혼란시켰다.’(102)

 

터툴리안은 …… 라틴어로 저술한 ……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 3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상류 계층에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라틴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헬라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수에 있어서 능가하기 시작했다.’(104)

 

카르타고 …… 2세기 중반 무렵에 이곳을 대상으로 정열적인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104)

 

197년에 쓰여진 [변증] …… 순결에 대한 터툴리안의 가장 엄격한 요구는 동료 그리스도인이 군에 복무하는 것, 공직에 봉사하는 것, 심지어는 학교에서 봉사하는 것조차도 금지하였다 ……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터툴리안의 개념은 일차적으로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것이었다.’(105)

 

‘(터툴리안은) 작은 엄격주의자 소수 집단(몬타누스 그룹-역주)의 목적을 옹호 ……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가 이 새로운 예언을 인정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그는 가톨릭 교회를 영적이지 못하며, 제도화되어 있고, 세상적인 것들과 타협하고 있다고 정죄하면서, 교회를 떠났다.’(106)

 

‘(터툴리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외치는 탄성들(“아이고 하나님!”)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직관적 감정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탄성들은 신적인 진리에 대한 무의식적 인정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107)

 

클레멘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많은 다른 그리스도인 선생들로부터 배우면서 다양한 여행을 거친 후에 그곳에 왔다 …… 교묘하고 유창하게 옹호되는 이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불명확하고 반계몽적인 정통 …… 클레멘트의 주된 성취 중의 하나는 이러한 딜레마가 비사실적이며 잘못된 것임을 드러내 보였다는 점이다.’(111)

 

‘[잡기]는 헬라 철학의 진리와 고전적 시가의 가치에 대한 대단히 긍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쓰여진 것인데, 클레멘트의 서술 방식은 철학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그리스도인 독자들의 의구심을 한결 덜어줄 수 있었다.’(111)

 

클레멘트는 플라톤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정당한 인정없이 표절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헬라 철학은 …… 헬라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죄를 억제하는 몽학 선생으로 주어졌다고 주장한다.’(112)

 

클레멘트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 원리는 창조 교리이다 ……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모든 진리와 선은 창조주로부터 온 것이다.’(113)

 

개인적인 독신에의 소명은 존중할 것이라고 인정하였지만, 결혼이란 본채적으로 이에 비해 열등한 영적 상태라는 어떤 주장도 그는 용납하지 않았다. 동일한 이유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금주주의자 또는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배척했다. 이런 것들은 클레멘트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양심의 문제이지, 보편적인 금지의 문제가 아니었다.’(113)

 

(클레멘트)에게는 저스틴과 이레니우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서, 지상에서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이들의 지나치게 문자적인 믿음에 대해 그는 별로 호의적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115)

 

순교자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클레멘트) 역시 평신도로서 그의 주저를 저술했다.’(116)

 

오리겐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 가운데 거인으로 우뚝 서 있다 …… 오리겐은 헬라의 고전시가들에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거의 노출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혹독한 노력을 기울여 대 철학자들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웬만한 모든 본문을 마음대로 암송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탁월한 기억력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자만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그는 때때로 참고 문헌을 밝히지 않은 채 인용을 하면서 사소한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117)

 

‘18세 되던 주후 202년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 때에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순교했었다 …… 클레멘트에게 있어서 플라톤은 대단한 권위를 누렸다. 그렇지만 오리겐의 눈에는 플라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117)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번역본 사용에 있어서, 특별히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의 발췌 모음집에 있어서, 일부 본문들을 자기들의 목적에 더 잘 들어맞도록 만들기 위해 가벼운 수정을 가하는 경향이 있었다.’(118)

 

오리겐은 [헥사플라] …… 를 편집하였다. 그는 나란히 구분된 6개의 난에 히브리어, 히브리어 본문의 헬라어 음역, 그리고 4가지의 주된 헬라어 번역을 대조하여 위치시켰다 …… [헥사플라]의 주된 목적은 …… 70인역의 정확성을 보증하는 것이었다.’(119)

 

이단에 반대하여 정통을 옹호하는 것은 오리겐이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일이었다 …… 오리겐의 사변적 체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바로 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성과 자유 의지를 부여 받았으며, 창조주에게 의존적인 영적 존재들의 영역을 먼저 창조하셨다. 타락을 섦명하기 위해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생각을 빌리고 있다. 영적 존재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게되었고, 태만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어 점점 사랑이 식어지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열등한 것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질 세계는 바로 이러한 타락의 결과로 존재하게 되었.’(122)

 

천국과 지옥에 관한 모든 언어는 비유적 상징으로 표현된다. 오리겐에게 있어서 지옥의 불의 온도를 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상징적 언어가 표현하고 있는 진리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다는 것이다 …… 오리겐은 하나님의 진노에는 치유적 목적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123)

 

종말에 관한 오리겐의 언어는 6세기의 어떤 공상적 사변들에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일부 열광주의적 수도사들은 부활한 육체는 구형일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 오리겐의 권위에 의존하였다(플라톤은 구가 완전한 형태라고 설명하였다). 오리겐 자신이 이러한 주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124)

 

참으로 자유란 양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속 받은 자가 또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태만히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타락과 구속의 끝없는 순환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사변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오리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리겐은 질문으로 끝내고 있다.’(125)

 

스토아주의가 3세기에 들어와서 독립된 학파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학파의 마지막 대변자가 되었다는 것은 스토아주의 역사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의문에 대한 가장 개연성 높은 설명은 윤리 분야에서 교회가 스토아주의 고유의 이론들을 수용하는 한편, 철학 분야에서 플로티노스가 등장하여 플라톤의 호방한 형이상학으로써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논리학을 철학적으로 종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137)

 

‘247 4 21일에 로마 건국 천년을 기념.’(138)

 

키프리안은 [교회의 일치에 관하여]라는 열정적인 소책자를 써서 …… 일치의 중심은 주교이다. 주교를 버리는 것은 교회를 버리는 것이며,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139)

 

교회가 입은 가장 큰 해는 박해 때문이 아니라 내부 분열 때문에 초래되었다 …… 아우렐리우스가 제국의 모든 종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괄적인 유일신교로서 태양신 숭배를 독려할 때인 274-5년을 제외하면, 교회는 303년까지 이렇다 할 박해 없이 평화를 누렸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인 속주 총독들조차 제사 참여를 은밀히 면제받았다.’(141)

 

콘스탄티누스는 자기 아버지처럼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숭배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나스타시아(아나스타시스=부활)라는 이복누이가 생기면서 그의 가문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들어왔다.’(143)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였고, 동방에서는 리키니우스였다. 313 2월에 밀라노에서 두 사람은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정책과, 개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했든 교회에 속했든 모든 부동산을 되돌려 주는 정책에 합의했다.’(144)

 

박해가 남긴 최악의 유증은 이번에도 분열이었다 …… 동방에서는 제사를 배교로 간주하되, 거룩한 책들과 교회 식기류를 내주는 행위는 배교로 간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견해가 양분 …… 로마의 주교 마르켈리누스도 거룩한 책들을 내주었다. 하지만 특히 누미디아에서는 성경이나 국가가 성경에 준하는 책으로 간주하는 책들을 내주는 행위(어떤 주교는 의학 논문들을 내주었다)를 배교로 간주했다. 달리 생각하는 것은 내주기를 거부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예를 더럽히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 생각에는 뭐 꼭 그럴 필요까지 있었느냐는 빈정거림이 내포되었기 때문이었다.’(144)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은 교회사와 유럽사의 방향을 틀어놓은 사건이다 …… 황제가 교회의 발전에 어쩔 수 없이 즉시 개입하게 되었고, 반대로 교회는 갈수록 황제의 정치적 판단에 연루되었다.’(147)

 

막센티우스는 아우렐리우스의 장벽 뒤에서 안전히 방어전을 치르지 않고 장벽 바깥으로 나와서 티베르 강을 등지고 싸웠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 다리에서 승리를 거둔 사건(312)을 하늘의 호의의 징조로 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147)

 

콘스탄티누스가 신의 격려에 힘입어승리를 거뒀다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로마 원로원이 언급한 신은 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와 자신이 믿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 사이의 상호 배타성을 의식하지 않았던 셈이다. 유일신교인 태양신 숭배(당시의 이교권에서 가장 인기 있던 종교)에서 기독교로 옮겨가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구약성경에는 그리스도에게 의의 태양이라는 칭호를 붙인 예언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께서 태양신처럼 병거를 몰고 하늘을 가로지르신다고 말한다. 최근에 로마에서 발견된 무덤의 모자이크(4세기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는 그리스도를 병거를 몰고 하늘에 오르는 태양신으로 묘사한다. 터툴리안은 많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모여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상상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4세기 초에 서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태양이 동지의 지점에서 탄생하는 날인 12 25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어디서 누가 이 관습을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 5세기 중반에 교황 대 레오 …… 는 자신의 교인들이 태양에게 경의를 표하기를 잊지 않는 행위를 질책한다.(각주. 반대로 율리아누스 때에는 기독교에서 태양신 종교로 개종하기가 쉬웠다. 트로이의 주교는 진실성을 의심받을 염려 없이 배교를 했다. 왜냐하면 주교로 있을 때조차 은밀히 태양에게 기도해왔기 때문이다.).’(149)

 

당시에는 임종 때까지 세례를 연기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주후 400년경까지 이런 관행이 지속되었다) …… 콘스탄티누스는 ……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 혹은 국교로 삼지는 않았다.’(149)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부여한 혜택은 막대한 것이었다 …… 성경을 새로 필사하여 보급하고 교회당들을 건립 …… 바실리카들을 건립 …… 라테란 가의 재산이었던 자신의 둘째 아내의 궁전을 로마의 주교들에게 주교의 공관으로 기부 …… 속주의 세입 가운데 일정 비율을 교회 기부금으로 할당.’(150)

 

한 주간의 첫째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독교 관습은 아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교회가 주간의 첫 날에 모여 예배를 드린 관습의 출처는 …… 유대교였으며, 교회가 일요일을 선정한 이유는 그 날에 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후 1세기부터 민간 점성술은 일곱 개의 행성(고대인들은 해와 달도 행성에 포함시켰다)이 각각 하루를 지배한다는 사상을 퍼뜨렸다.’(151)

 

콘스탄티누스는 …… 324 9월에 ……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 니케아 공의회에는 약 220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 주교들이었다 …… 라틴계 서방에서 참석한 주교는 네다섯 명밖에 되지 않았다 …… 공의회가 상정한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다고 확언함으로써 아리우스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천명했다 …… 참으로 뜻밖에도 공의회 전에 강력한 반대 움직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220명의 주교들 가운데 218명이 신조에 서명했다 …… 모든 서명자들이 신조의 중요한 표현들의 정확한 의미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 이것은 모호했다 …… 모호한 표현 때문에 리비아계의 두 주교를 제외한 모든 주교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153)

 

주교를 축성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관구 내의 모든 주교들에 의해 축성을 받되, 어떤 경우든 세 명 이상의 주교에 의해 축성을 받도록 규정했으며, 관구의 수도대주교에게 거부권을 부여했다. 이 마지막 규정이 수도대주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과정을 가속화했다 …… 니케아 교회법은 교회의 조직과 권력 구조가 발전된 경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 예루살렘 교구는 교회에서 한 번도 권력의 중심에 선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5세기에야 비로소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알렉산드리아 교구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서방의 로마에 견줄 만한 지위를 동방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  4세기가 진행되면서, 교회 정책에 관한 최종 판결이 황제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갈수록 완연해졌고, 어느 때든 사건을 주도해 가는 교회 내의 그룹이란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데 성공한 사람들인 경우가 빈번했다.’(155)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벌어진 아리우스 논쟁은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때(337 5 22)까지이고, 둘째는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이 즉위한 때로부터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은 때(361)까지이며, 셋째는 율리아누스가 즉위할 때부터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하에서 아리우스주의가 진압될 때까지(381)이다.’(156)

 

서방의 주교들 가운데 많은 수가 논쟁의 실제 내용을 지극히 막연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각주. 그들의 이해가 얼마나 막연했는가 하는 것은 푸아티에의 주교 힐라리우스가 여러 해 주교로 재직해왔으나 니케아 신조에 관해 들어본 일 조차 없다고 공언한 말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165)

 

성자와 성부의 동일 본질을 주장하되, 성령께서 신격 안에 들지 않고 창조된 천사의 위계 중에서 맨 윗자리에 계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었다 …… 콘스탄티노플의 마케도니우스는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집단을 이끌었다 …… 정통 신학자들은 그들에게 성령과 싸우는 자들’, 즉 프뉴마토마키 혹은 마케도니우스파라는 별명을 붙였다.’(171)

 

‘381 5월에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에큐메니컬공의회를 소집했는데 …… 콘스탄티노플 주교로 저명한 정부 관리인 넥타리우스를 선출했다. 넥타리우스는 과거의 논쟁에서 어느 진영에도 연루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세례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세례를 받은 직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 공의회는 매우 중요한 교회법 조항에 합의했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의 서열을 갖는다는 조항이었다 …… 공의회의 교리적 결정은 제국의 교회를 장악하려던 아리우스파의 시도에 마침표를 찍었다. 아리우스주의는 그 진영의 선교사들에 의해 개종한 고트족 가운데 살아남았다. 아리우스파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울필라스로서, 그는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고, 그 자신이 …… 고트족이었다.’(177)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도 이교는 소멸하지 않고, 오히려 족히 4세기 후반까지 제국 인구의 다수를 점한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각주. 이교도paganus …… 이 단어를 세속적으로 사용할 때는 1. ‘촌스러운이라는 뜻과, 2. 군대와 반대되는 민간이라는 뜻을 지녔다 …… 정확한 설명은 이교도들이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의 군인들이 되지 않은 사람들, 따라서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신앙의 전사들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켰으리라는 것이다. 동방에서는 비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킬 때 헬레네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 교회가 사회 관습이라는 타성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다.’(178)

 

로마의 공식 종교가 일으키는 종교 감정은 애국심과 어떻게든 관계가 있었고, 따라서 순수한 종교 감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시스교, 미트라교, 아티스교, 퀴벨레교, 그리고 시리아 여신 숭배로 눈을 돌리기 십상이었는데, 이 종교들은 모두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브리타니아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에 이르는 제국 전역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하드리아누스 장벽 이북으로는 해로운 것들만 존재한다고들 믿었다).’(179)

 

콘스탄티누스는 비록 초기에는 태양 유일신교와 기독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지만, 그의 종교 자문을 맡은 주교들이 기독교가 태양을 신의 거처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즉시 말해주었음에 틀림없다 ……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 대에 가서는 이교를 제재하는 한층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졌다. 제사가 금지되었고, 중요하지 않은 여러 신전들이 철거되었다. 대체로 직접적인 해를 입은 대상은 동양의 신비 종교들이었다.’(180)

 

이교도든 그리스도인이든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고대에는 종교적 확신을 강요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 흑마술(나쁜 동기로 시행하는 마술).’(187)

 

다마수스 …… 이탈리아 복동부의 걸출한 학자 제롬에게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을 제작하게 하는 등[이 개정판은 아주 점진적으로 옛 역본을 대체하고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역본<불가타>이 되었다] …… 고대 로마의 문민적이고 제국적 자부심을 기독교와 융합시킨 것이 다마수스의 업적이었다 …… 다마수스가 순교자들의 성소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로마 교회를 설립한 사도들을 강조한 것은 로마의 진정한 영광이 이교의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것임을 웅변으로 강조한 것과 같았다.’(190)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에게 유언을 검증하고 분쟁을 조정할 수 있는 행정 장관의 권한을 부여했다. 313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그는 고위 성직자에게 저명자라는 높은 세속 직위를 수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314년의 아를 공의회는 로마 주교를 지극히 영광스러운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불렀는데, 이것은 세속적 용례로는 서열이 황제 가문에 버금가는 사람들에게 쓰이던 칭호였다. 주교들은 …… 표장을 갖게 되었다 …… 이런 경위로 주교들은 홀장과 삼중관과 아마 영대까지도 얻었다. 주교의 손에 입을 맞추는 관습은 4세기에 첫 모습을 드러낸다. 반지는 7세기 …… 가슴의 십자가는 13세기 …… 키프리안 때부터 주교들을 부를 때 당시 상류 사회의 용어를 채용하여 추상적인 칭호(이를 테면 성하聖下holiness)가 쓰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의전이 심지어 촛대를 사용하는 등 성찬식의 양태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 서방에서는 성직자들이 심지어 예배를 인도할 때조차 평신도와 구분되는 성직복을 입지 않았다 …… 서방의 성직복은 고대의 평상복이 일반 사회에서는 더 이상 착용되지 않은 뒤에도 교회의 보수성 때문에 교회에 그대로 남은 데서 비롯되었을 뿐이다.’(192)

 

교회는 그리 오래지 않아 이교 정권 때보다 기독교 황제들 치하에서 자유와 자결에 더 큰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지어 콘스탄티누스 때부터 주요 지역의 주교 임명에 황제의 입김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 니케아 교회법(325)은 수도대주교에게 거부권을 부여했다. 381년부터는 수도대주교보다 더 높은 차원,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경향이 완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5세기에는 예루살렘도 이 그룹에 합류할 수 있었다.’(193)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관행이 굳어진 곳은 그리스 동방이 아니라, 서방, 특히 6세기 메로빙거 왕조 치하의 갈리아였다 …… 세월이 흐를수록 제국의 법률에는 비국교도들에게 불이익을 가하는 내용이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194)

 

암브로시우스는 …… 374년에 아리우스파 주교 아욱센티우스가 죽자 그는 군중의 압도적인 갈채에 의해 주교로 선출되었다.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몸으로 말이다.’(195)

 

훌륭한 예술품들이 소장된 아름다운 신전들은 훼손하지 말라는 특별한 지침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미학을 고려한 주장은 강렬한 도덕적 지탄 앞에서 무력했다 …… 민중의 애착이 지나치게 강하여 파괴할 수 없는 이교 성지에는 옛 터를 정리하고 그곳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 아테네에서는 파르테논이 결국 성모마리아 교회가 됨으로써 파괴를 면했다.’(197)

 

테오도시우스가 법으로 규제한 이단 종파들 가운데 가장 심한 탄압을 받은 종파는 마니교였다 …… 바빌로니아인 마니가 …… 세운 영지주의 형태의 이원론 종교였다.’(197)

 

유대인들에 대해서 테오도시우스의 법은 그들의 지위를 약간 향상시킨 듯하다 …… 법률상 회당은 예배의 자유를 위해 보호되었다 …… 대체로 유대인들은 두려움 없이 살면서 직업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제국에서 살던 유대인들의 상황은 꾸준히 열악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그재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띠었다.’(200)

 

대체로 당시 기독교 사회는 이교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이교 문학을 보급하는 행위를 제재하지 않았다 …… 시와 역사에서 고전의 관습이 대단히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때조차 당대의 대표적인 역사가 두 명은 …… 여전히 마치 기독교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그래서 에둘러 논할 수밖에 없는 현상인 것처럼 여기면서 글을 썼다.’(202)

 

‘4세기 말에 접어들면, 교회가 사실상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세상적인 표준으로 볼지라도, 어지간한 도시의 주교직은 딱히 종교적인 동기가 아닐지라도 한 번 꿈꾸어 볼 만한 좋은 직위가 되어 있었다. 많은 지역 교회들이 실질상 지주들이 되어 무수한 지역 빈민들의 생계를 지원했다.’(203)

 

‘400년경 교회 관습으로 주교들에게 의무가 된, 아내와의 이별 …… (그리스 동방에서는 하급 성직자들에게는 이런 의무가 부과되지 않았다).’(204)

 

허영의 시장에서 발을 돌이키는 것은 역사가 계속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재산도 있는 사람들보다는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예상하는 사람들에게 한결 쉬운 일이었다 …… 2세기에는 지교회들에서 결혼을 포기하고 지극히 작은 재산만 남기고 모두 포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었었다. 이들은 스스로 앞에서 그리고 지교회 앞에서 세상을 버리고 기도와 자선 사업에 힘쓰겠다고 서약했다 …… 3세기에 교회가 급속히 확장되면서 이중적 윤리 표준을 채택하는 경향이 급격히 증가했다. 세상에서 사는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의 교훈을 지킬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리스도의 계명은 지키려고 했고, 문자적으로 명령된 최소한의 계명보다 더 많이 행하면 이후에 큰 상급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205)

 

수도원 운동은 소박한 평민들뿐 아니라 플라톤과 그의 이상적인 순교자 소크라테스의 전승, 견유학파의 자족 원칙, 그리고 얻지도 지키지도 못할 것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는 데서 행복이 생기므로 합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려는 집착도 버리라고 가르친 스토아주의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까지 파고들었다. 고전 그리스의 영향이 금욕주의의 개인주의적 성향을 자극했다 …… 민중은 독거 수도를 하는 은수자들을 크게 존경했다.’(207)

 

수도원 운동은 사회의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 과중한 세금을 못 이겨 파산한 사람들, 혹은 탈옥수들이나 동성애자들, 혹은 보다 많은 경우로서 고행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손쉬운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209)

 

역사의 우연에 의해서 베네틱투스라는 이름은 금욕 및 학문과 연관을 갖게 되었다. 베네딕투스 자신은 참회적 금욕주의자와 자기 학대적인 고행자가 아니라, 절제를 하면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한 사람이었다 …… 베네딕투스의 수도회칙은 한 곳 이상의 수도원을 상정하긴 했지만, 베네딕투스가 수도회를 설립할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213)

 

‘375년경에 오리겐의 정통성에 본격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공격을 가한 사람은 367년부터 키프로스 살라미스(파마구스타)의 주교가 된 에피파니우스로서 …… 그는 과거와 현재에 걸친 모든 기독교 이단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권위자가 되었다 …… 에피파니우스가 오리겐에게서 단죄한 점은 무엇보다도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한 문자적 진술들을 영적 상징으로 재해석하는 그의 경향, 특히 부활을 영적으로 해석한 그의 교리였다.’(215)

 

제롬은 …… 과거에 오리겐의 저작 중 몇 권을 번역하고 그를 사도 시대 이후로 가장 위대한 교회의 교사로 칭송했다가, 이제는 그를 격렬하게 반대하게 되었다. 제롬은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신랄하고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다. 간혹 자신의 호방한 학문을 동원하여 증오와 질투를 퍼붓곤 했다. 비판을 견디지 못했으며,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한 사람일수록 후에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독설을 내뱉되 아주 탁월한 방식으로 내뱉고 큰 학식을 가지고 성경 주석을 썼기 대문에 누구나 그의 책을 일고 싶어했다.’(216)

 

요한 크리소스톰 ……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뒷공론과 음모가 난무하는 대도시의 주교에는 적합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 광야에서 금욕 생황을 하다가 고질적인 위장병을 얻었던 지라 늘 혼자서 식사를 했고, 그로써 그 동안 주교의 집에서 성대한 식사를 해온 사람들에게 깊은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 금욕적이고 초연하고 혈기 왕성한 인물로서, 강단에서 흥분을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노골적인 비판을 토해냈다. 이런 기질 때문에 세련되고 유복한 도시에서 편하게 살기가 쉽지 않았다 …… 유배길에 오른 요한은 407 914일에 코마나(토카트)에서 죽었다.’(221)

 

‘378년에 타르수스의 주교로 임명된 안디옥의 금욕주의적 장로 디오도루스 …… 예표론(typology. 특정 인물들과 사건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구체적인 표상들로 보는 해석)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무절제한 알레고리 사용에는 반대했다.’(224)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 …… 동정녀 탄생을 교리에서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고, 3세기 이래로 개인들이 마리아에게 사용한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에 심오한 진리가 있다고 보았다.’(225)

 

테오도루스는 요한 크리소스톰의 친구이자 리바니우스의 제자였다. 그는 392년에 길리기아 평원에 자리잡은 몹수에스티아의 주교가 되었다 …… 수많은 메시야예언들과 시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예고라는 점을 부정하고, 아가서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간의 초자연적 결합과 상관이 없는 자연적인 연애시라고 평가함으로써 전통주의자들을 당혹하게 했다.’(225)

 

‘412-444년에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전임자 테오필루스의 조카로서 예리한 신학자요 과단성 있는 교회 정치가인 키릴루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 삼촌이 이집트의 이단과 이교를 진압하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그는 성격이 관용과는 거리가 멀었고, 주교직에 오르자마자 몇 차례에 걸쳐 과격한 사건을 일으켰다.’(227)

 

‘428 4월에 황실은 훌륭한 설교자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초빙하기를 원하여 네스토리우스라는 안디옥의 수사를 영입했다.’(227)

 

아랍인들은 6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안디옥(638), 이집트와 알렉산드리아(641)를 함락하고 ……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화약을 사용하여 간신히 아랍인들을 격퇴했다. 아랍인들은 707년에 북아프리카를 정복했고, 4년 뒤에 스페인을 정복했다. 이렇게 노도와 같은 이슬람의 정복으로 수많은 주요 지역들이 기독교 제국에서 떨어져나갔다. 이로써 기독교 세계의 지형은 바뀌었고, 장차 때가 되면 무게 중심이 서방 유럽으로 옮겨가게 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248)

 

라틴 기독교는 4세기 말까지는 원숙한 경지에 올랐던 그리스 교회들의 수준에 비해 훨씬 처져 있었다.’(249)

 

제롬(Jerom.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 …… 그가 베들레헴의 라틴계 수사들에게 행한 설교 중 한 편은 그리스 교회가 성탄절을 12 25일 대신에 1 6일로 지키는 관습을 비판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룬다 …… 제롬의 정신 세계는 라틴이었다 …… 제롬은 그리스 실력이 탁월했지만(히브리어에도 능통했다), 그리스 고전 문학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지식이 없었다 …… 이제 바야흐로 독립된 라틴 신학이 등장할 때가 무르익었다. 제롬은 성경적 학문을 내놓고 있었지만, 사상가는 아니었다. 이 과제는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젊은 아프리카인의 몫으로 남겨졌다.’(253)

 

아우구스티누스는 354 11 13일에 누미디아 지방의 소도시 타가스테에서 중하층의 부모 파트리키우스와 모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모니카는 베르베르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듯하며, 경건한 신자였으며, 총명한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 고대에는 대중 앞에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표시하도록 만드는 교육이 법률가나 관료로서 성공하려 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253)

 

‘386년 여름에 기독교로 개종 …… 13년 뒤에 쓴, 기독교권에서 가장 감동적인 저서의 한 권인 [고백록] …… 그가 태어났을 때 모니카는 그를 교회로 데려가 유아세례를 받게 했고, 조금 자란 뒤에는 교리문답 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로서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다소 보기 드문 일이었다) …… 사춘기에 …… 신앙을 버리고 성적 쾌락에 탐닉하게 되었다 …… 9년간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져 지내면서 여러 친구를 진지한 마니교 신도로 개종시켰다 …… 387년 부활절 전야에, 그는 아들과 함께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255)

 

게다가 주께서 비유로써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14:23)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은 주저와 고통을 안은 채 탄압 정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움직였다.’(261)

 

‘410년에 로마가 알라릭과 고트족에게 함락되었다 ……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질문들이 다급하게 제기되었다. 어찌하여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자기들의 도시를 구원하는데 무력했는가?’(263)

 

펠라기우스는 브리타니아의 수사로서, 여러 해 동안 로마에서 살면서 도덕주의자와 영적 지도자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사람 …… 갓 태어난 아기에게 악의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데로 나아갔다. 아담의 죄가 초래한 결과는 치명적으로 악한 불순종의 시범을 보여준 것일 뿐, 후손에게 죄나 사망을 전가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담은 죄를 지어 필멸의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지음을 받을 때부터 그런 존재였다고 했다 ……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이렇게 유아에게 죄가 없다고 해서 갓 태어난 아기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3장에 비추어 볼 때.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아기들은 자연의 복이 거하는 제3의 장소 곧 림보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267)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삼위일체 교리에서 어떻게 해서든 아리우스주의와 성자 종속설의 요소를 제거하려고 했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고수하기 위해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께로부터 나오신다고 주장해야 했다 …… 사람의 인격 안에는 기억’ …… 과 지성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삼중 요소가 있다고 다소 자신 없게 주장했다. 지성은 성자이신 신적 이성의 반영이고 의지는 성령이신 사랑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라고 했다.’(276)

 

로마 교회가 자연스럽게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기원 …… 1세기가 저물기 전에 로마교회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형제애를 가지고 개입 …… 좀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대해 지녔던 독립적인 태도 …… 로마 교회의 지위를 높이 올려놓은 것은 2세기에 이단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실과 …… 자신들이 사도적 전승의 수호자라는 인식이었다 …… 마태 16:18베드로 본문은 카르타고의 키프리안과 로마의 스테파누스가 세례 문제로 큰 갈등을 겪을 때 스테파누스가 그 본문을 변호 수단으로 삼은 3세기 중반 이전에는 로마의 지도권과 권위에 관한 논의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382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 베드로 본문이 수장권 주장에 신학적, 성경적 토대를 제공할 만큼 중요성을 띠지 않았다.’(278)

 

아리우스 논쟁으로 벌어진 투쟁은 교회회의의 신망을 약화시켰다 …… 대립적인 교회회의들이 양립 불가능한 선언들을 내놓는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278)

 

사도 베드로가 로마로 오기 전에 안디옥 교회를 감독했다는 전승 …… 역사적 계승이라는 이 사실은 마태 16:19에서 사도들에게 위임된 매고 푸는권세의 법적 유산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280)

 

다마수스 때 로마 교회의 관습을 따르도록 권장하는 정책이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에 의해서 크게 촉진되었다 …… 모니카가 교회마다 예배식이 다른 점 때문에 겪은 고충을 토로했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무엇이 됐든 지역 교회의 전승을 따르라고 조언했다. 밀라노에 있을 때는 밀라노 방식을, 로마에 갈 때는 로마의 방식을 따르라는 것이었다.’(281)

 

‘5세기의 가장 위대한 교황은 레오 1(440-61)였다 …… 그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 시의 수호성인으로서 지녔던 지위를 대체했다고 설명했다 …… 그는 교인들이 성 베드로 성당 계단에 기독교와 태양 숭배를 혼합하는 행위를 비판했다. 우연히 어떤 추문을 처리하다가 마니교가 자기 회중 사이에 상당히 깊게 침투한 사실을 발견한 그는 미사 때 잔을 받는가의 여부를 주의 깊게 살펴서 마니교도들을 가려냈다(마니교도들은 음주를 죄악시했기 때문에 성찬 때 떡만 받고 싶어했던 것이다) …… 레오는 스스로를 단순히 역사적 의미를 넘어서는 성 베드로의 계승자로 믿었다. 서신을 작성하거나 설교를 할 때도 성 베드로 자신이 말하고 쓰고 있다고 믿거나, 아니면 적어도 청중과 수신인들이 자신의 말을 성 베드로의 것으로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 레오가 성 베드로 성당에 묻힌 최초의 교황이었다.’(285)

 

‘6세기 전반에 활동한 로마의 교회법 학자로서 기독교 시대를 연대 계산 체계로 도입하게 만든 장본인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286)

 

야만족의 이주는 점진적이고도 통제를 받아가며 이루어졌다 …… 375년부터 상황이 돌변 …… 훈족 …… 고트족 …… 406 12 31일에 라인강이 얼자 반달족과 알란족과 수에비족이 인명 희생에 아랑곳없이 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반달족만 해도 강을 건너다가 2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2년 뒤에 …… 스페인 …… 429년에 반달족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로 밀려들어간 뒤 439년에 카르타고를 함락하고는 그곳에 해적 왕국을 세웠다.’(289)

 

처음에 서방 사람들은 야만족들을 자기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곧 제거될 하나님의 일시적인 회초리쯤으로 생각했다 …… 침략자들이 정착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 정치적 위협이 증가하자, 그들을 평화로운 사람들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 때문에 선교 사업에 큰 탄력이 붙게 되었다.’(289)

 

고트족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4세기에 울필라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정통 신앙이 아니라 아리우스주의였다 …… 서고트족을 대상으로 전도를 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트어 문자를 창안하고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했다 …… 문명화된 로마 세계 안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는 게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다.’(290)

 

제국을 침공한 게르만 부족들 가운데 프랑크족만 506년에 이른바 새 콘스탄티누스인 왕 클로비스와 더불어 처음부터 가톨릭 정통 신앙을 받아들였다. 부르군트족과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이 차례로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6세기 말에 가서나 이루어진 일이다.’(291)

 

‘476년에 야만족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라벤나로 귀양을 보내고 직접 이탈리아 으로 자임하기로 결정함 …… 르네상스 이후부터 476년이라는 해는 서방 제국이 최후에 멸망한 시점으로서 깊은 상징적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런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바뀐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 당시 사람들이 받은 심리적 충격은 410년에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했을 당시에 비해 대수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오도아케르가 동고트족 테오도릭에 의해 공격을 받고서 살해 …… 테오도릭의 치하(493-526) …… 로마의 유서 깊은 원로원 계층 지주들은 과거와 다를 바 없이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292)

 

청교도적 화상파괴론자들에 대해서도 교회 내의 그림들과 조각상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의 성경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둬야 한다고 변호했다. 교회가 고대 이교 신전들과 축일들을 접수하여 거기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96)

 

로마는 비잔틴 제국의 도시였고, 7세기 내내 그 상태로 남았다.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신민이었다.’(296)

 

‘6세기 말경에는 이교도 국가인 켄트(Kent) 왕국(켄터베리를 수도로 삼은)이 험버 강 이남까지 잉글랜드의 대다수 지역을 다스렸다 …… 켄트 왕국의 수도인 켄터베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구이자 선교 중심지가 되었고, 그 뒤로도 계속 그 지위를 유지했다.’(299)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유대교에 국한된 형태로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할 의도로 제정된 것이 아니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이방인 개종자를 유대교 회당에 받아들이는 의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세례는 그대로 견지했다. 유대교 유월절의 떡과 포도주 ……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 사건과 결부시킴으로써 강렬한 의미를 부여하여 받아들였다.’(300)

 

일찍이 사도 바울의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관습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주일이라는 주중의 하루를 부활과 결부시킨 것이 근거가 되어,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부활절을 유대인의 유월절(파스카)인 니산월 14일에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옮기게 되었다 …… 4세기에 접어들면 교회력에 승천일과 그리스도 탄생일이 포함되는데, 후자는 그리스 동방에서는 1 6일에, 서방에서는 12 25일에 지켰다.’(301)

 

유대교의 관습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이 금식일이었다. 적어도 1세기가 저물어갈 무렵에 그리스도인들의 금식일은 수요일과 금요일이었다 …… 4세기 초엽에는 부활절 전의 금식이 동방 그리스에서는 이레 동안 계속 되었으나 서방에서는 사십 일이나 계속되었다. 사십 일 사순절은 337년에 서방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아타나시우스가 서방 그리스도인들의 진지한 금욕 생활에 부끄러움을 느끼고서 최초로 그리스 교회들에게 보급했다.’(301)

 

성찬은 주로 주교가 집례했고, 그의 부재시에는 장로나 집사(부제)나 혹은 예외적인 경우에는 평신도가 집례했다. 아프리카에서도 그랬듯이 로마에서도 물세례가 끝난 뒤 수세자에게 기름을 발라주었다. 하지만 이 순서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302)

 

‘[디다케] 저자는 원칙상 강이나 호수에서 세례를 거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1세기가 넘어가기 전에 수세자의 머리에 세 번 물을 바르는 방식으로 세례를 거행하는 것이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했다. 그런 이유에서 부활절 및 오순절과 각별히 연관되었다. 같은 이유에서 세례당을 지을 때는 주께서 여덟째 날에 부활하셨음을 상징하기 위해서 팔각형으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이 여덟이라는 수의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베드로 전서 3:20을 참조하라).’(303)

 

‘2세기 초에 나타나는 본문들(디다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와 순교자 저스틴의 글)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드리던 대 예배가 무엇보다도 유카리스티아 곧 감사를 위한 예배, 즉 성찬을 위한 예배였다는 데 동의한다.’(304)

 

상투스(Sanctus. ‘거룩하다라는 문구가 세 번 들어간 찬송).’(309)

 

신조(the Creed)는 세례식에 고유하게 쓰였으며, 후기에는 성찬식에도 쓰였다. 어쨌든 서방의 세례 신조는 이른바 사도신경’(Apostles’ Creed)이었던 반면에, 동방 그리스는 세례식 때 325년의 니케아 신조를 사용했다.’(314)

 

온 교회가 사용한 최초의 사도적 전례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315)

 

‘4세기 로마에서는 이런 시골 소교구 교회들을 가리켜 명의교회들’<title-chruches>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 교회들은 설립 당시의 기부자들의 이름을 교회명으로 사용했고, 그들의 기부금으로 성직자들의 사례금을 주었기 때문이다.’(315)

 

히폴리투스는 [사도 전승]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루에 일곱 번, 즉 해 뜰 때, 저녁 등불을 켤 때, 잠자리에 들 때, 한밤중에, 그리고 혹시 집에 있을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된 시각들인 3시와 6 9시에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지침을 적었다 …… 400년경에는 적어도 주중의 특정 요일들에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교회에서 성직자와 함께 드리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 대바실리우스의 수도회칙에는 여덟 가지 성무가 있었다. 하지만 요한 카시아누스가 주교하던 마르세유 지방에서는 일곱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말한 시편 저자의 관습을 따른 것이다. 로마에서는 500년경에 성무일과가 여섯 가지였다.’(317)

 

초창기 기독교 찬송은 회당 찬송을 그냥 인수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예를 들어 히브리어 알렐루야가 번역되지 않은 채 찬송에서 계속해서 쓰인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318)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어떤 유형의 음악이 기독교적 용도에 적합한지를 논한 최초의 기독교 저자이다. 그는 찬송이 연애의 무곡과 비슷한 유형이어서는 안 되며, 선율은 반음계를 피해야 하며 엄숙해야 한다고 지시한다.’(320)

 

종교적 춤은 유대교 전승에서뿐 아니라 …… 디오니소스교 같은 이교 제의에서도 승인되었다 …… 예술 형태인 발레도 고대에는 저속하고 대단히 선정적인 행위로 간주.’(320)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신이 밀라노에서 불렀던 시편 찬송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가를 기록하면서, 찬송을 부를 때 가사보다 선율을 더 중시할 경우 큰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가사에 아름다운 선율이 붙을 경우 가사의 의미가 훨씬 더 크게 깨달아졌다고 토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음악으로 표현하지 못할 인간의 정서는 없으며, 교회 예배에서 음악을 제거하는 것은 쓸데없이 경직된 행위라고 주장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불렀던 찬송은 오늘날을 들을 길이 없다.’(321)

 

십계명의 제2계명은 하나님을 어떤 상으로 새겨 만들지 말라고 금했다. 터툴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모두 이 금령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 있는 절대적인 명령으로 간주했다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인들의 도장 반지에 적합한 그림에 관해 지침을 준다. 고대에는 도장 반지가 사치품이 아니라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이었다 …… 비둘기나 고기나 배나 수금이나 닻 같은 기독교적 해석이 가능한 문양을 도장에 새겨 넣도록 권한다 …… 이교 사회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것 …… 그 문양들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 관점에서 중립적인 것 …… 그리스도인들이 일찍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또 다른 전통적인 문양은 기도하기 위해 치켜든 손을 묘사한 오란스였다.’(323)

 

초기의 기독교 교회당들은 주로 개인의 자택들이었고, 콘스탄티누스 때까지 그런 형태를 유지했다 …… 초기 기독교 회화가 처음 등장한 곳은 교회당들이 아니라 로마 지하묘지(카타콤)였다 .….. 공작은 불멸을, 비둘기는 내세의 평화를, 무엇보다도 물고기는 헬라어 단어들의 머릿글자들을 모으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를 상징했다.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성찬 때 즐겨 사용한 문양이었다.’(324)

 

중세의 베로니카 전설 …… (각주. 베로니카의 전설은 여러 전설들이 아주 복잡하게 뒤섞여서 생겼다. 4세기까지는 혈루증 앓는 여인이 베레니케라는 여인이었다. 400년경까지 유행한 아브가르 전설의 한 가지 형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초상화를 베레니케라는 에데사의 공주에게 보내셨다고 한다. 두 명의 여인은 동일인이 되었고, 라틴 서방에서 그 이름은 베로니카가 되었다).’(327)

 

마리아 숭배는 400년에 접어들면 이미 개인 신앙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머지 않아 공식 전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로 알려진 최초의 교회는 431년에 공의회가 열렸던 에베소 교회이다.’(327)

 

단성론파의 신앙에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부활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와 나머지 인류 사이의 유대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갈수록 마리아를 구속받은 인류의 완전한 대표로 바라보게 되었다.’(328)

 

화상(icon)들은 수면 밑에서 깊은 불신과 의혹의 대상이 되다가 마침내 8세기에 격렬한 화상 파괴 논쟁을 촉발시킨 불씨가 되었다 …… 그리스도를 심판대에 앉으신 전능하신 주님으로 묘사한 화상은 제우스의 화상들에서 착상을 따온 것이었다. 하나님의 어머니를 그린 초상들은 고대 이교 세계가 숭배하던 지모신의 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반 대중의 마음에 성인들은 지역의 영웅들과 신들이 수행하던 역할을 수행해주고 있었다.’(329)

 

‘5세기 초에 활동한 최초의 교회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기독교 사회가 등장한 역사를 정부의 박해, 이단들의 이탈, 그리고 이교 같은 장애와 공격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간 과정으로 보았다.’(331)

 

사도 시대의 핵심 쟁점들은 교회와 이스라엘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것 …… 결과적으로 교회는 구약성경을 조금도 남김 없이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지라도 구약성경 없이 존립할 수가 없었다.’(332)

 

속사도 시대(대략 70-140) ……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 …… 유대 기독교 회중들은 중요성을 상실 …… 무게 중심이 대도시들에 자리잡은 이방인 교회들에게로 넘어갔다 ……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 로마였다.’(332)

 

‘2세기는 …… 성직 체계가 주교와 장로와 부제라는 보편적인 삼중 형태 …… 신약성경의 정경이 형성된 시기 …… 추측컨대 영지주의에 대한 투쟁과 정복이 교회사에서 가장 힘겨웠고 가장 결정적인 전투였을 것이다 …… 교회가 성직자 중심으로 변하면서 …… 사제는 …… 칸막이를 하기 시작한 4세기 이후부터는 평신도와 다소 동떨어진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적어도 8세기 무렵이나 혹은 그보다 이른 시기에, 라틴어 미사경본을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한 소리로 낭송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각주. 대 성체 기도를 조용히 낭송하는 행위는 5세기 시리아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 ) …… 신앙을 변호하고 해명하는 글을 쓴 순교자 저스틴과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 다음 세대에 리용의 이레니우스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은 기독교 교리를 이단들의 그릇된 주장들에 극명히 대조하는 방식으로 체계와 논리를 갖춰 진술하기 시작했다.’(333)

 

‘3세기 중반에 이르면 교회가 보다 일반 사회의 시선을 의식했고, 기독교는 식자층과 지배 계층 사이에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 박해는 기독교 내부의 분열이라는 불행한 유산을 남겼다. 특히 북아프리카에서는 도나투스파가 7세기에 이슬람교의 침공을 받을 때까지 가톨릭 형제들과 첨예하게 대립한 상태로 공존했다. 콘스탄티누스가 회심했다고 해서 기독교가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지는 않았다. 기독교는 그 세기말에 테오도시우스에 의해서 최초로 국교가 되었다.’(334)

 

‘4세기는 그리스 교회들의 위대한 시대로서, 훗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아타나시우스, 바실리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톰 …… 이들은 교부, 즉 권위 있는 전승의 공인된 해석가들이었다 ……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 부흥보다는 지루하게 계속된 아리우스 논쟁이라는 폭풍에 더 큰 곤란을 겪었다 …… 4세기에 새로운 지지자들이 교회 안으로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사회 생활을 등지고 고립된 공동체들로 은둔하게 된 한 가지 동기였다 ……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 사이의 간격은 갈수록 넓어졌다.’(334)

 

동방 교회들이 밖으로는 이슬람 정복의 타격에 직면하고 안으로는 화상 사용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 …… 이 사건들은 교회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그었으며, 교부들의 시대가 대개 서방에서는 대 그레고리우스로, 동방에서는 다마스쿠스의 요한으로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습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뒤로는 동방과 서방의 기독교 세계의 역사를 마치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쓰기가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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