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남의 시선 따위로 흔들려선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진실을 기반한 사실일지라도 나는 어디서건 존중받고 대접받아야 마땅합니다. 내가 겪은 모욕이 근거가 있든 없든 나에게수치를 줄 순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주변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사람들은 내 인생을 겪어본적이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들의 준거기준에 합당할 필요는 없으니 너무 괘념치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이내 사라지는 것들일 뿐이며, 나를 결코 무너뜨리거나 무기력하게 만들 힘이 없는 것들일 뿐이니까요. - P87

만일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면 하나만 기억하세요. 나는 모욕을 겪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런 시선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설령그 말이 진실된 것이더라도 그들은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 또 수많은 사람과 상황이 지금의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언젠가 그것조차 나를 지탱할 아주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것. 그러니 내인생에서 타인의 비중과 영향력을 높이지 않아야합니다. - P89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완벽한 인생을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절대적인 ‘적‘이 존재할 테지요. 이들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미워하고,
시기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고 싶은 일이 명확하다면 어떠한 부정적인 시선에도 "그래서, 뭐?"라는 태도를 보여주세요.
결국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재단되고 휘둘리고 상처받을지라도, 언제나 나는 계속해서 나와 함께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애써 맞추며 살아갈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기준과 잣대는 내 앞에선 전혀의미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죠.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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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감정은 불완전합니다. 사소한 변화에도휩쓸리고 망가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 후회하는 모든 일들은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연이아닐 겁니다. 이런 감정을 다스리려면 감정에서 한걸음 물러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갖는 게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저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을 맞이할 때 감정적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 아닌, 상황을 내 손에 넣고 ‘관광‘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 P60

‘반응‘이 아닌 ‘생각‘, 그것을 우리는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저녁에 의자를 사지 마라. 어느 것이든 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배고플 때 장보지 마라, 무엇이든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힘들 때 아무나 만나지 마라, 누구에게든 기대고 싶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감정을 생각하고 관찰하려는 노력이 수반된다면 즉흥적이고 위험한 감정적 선택을 어느 정도 막을 수있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본질을 파악하는 순간힘을 잃기 마련입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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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이다. 이를 믿고 안 믿고에 상관없이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십자가‘가 사랑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십자가형(Crucifixion)은 예수 당시 로마의 잔인한 사형 집행 방법 중 하나였다. 원래는 아시리아, 페니키아, 페르시아 등에서 사용하던 처형 방법이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십자 모양이 아니라 T자모양에 죄수를 매달았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나무에 묶어 놓고 체벌하는 도구였지만, 1세기부터는 흉악한 살인자나 로마에 대항하는대역 죄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렇게 끔찍한 형벌을 받은 사람을 구세주
로 믿는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구절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형당한 죄인을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에게는 꺼림칙한 일이 되었고, 그 그리스도를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가 예수님처럼 고난을 잘 참아야 한다는 도덕적 본보기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과연십자가에는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음을 믿는다는 사도신경의 구절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자.
1. 영적 상태의 기준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죄수는 살이 찢기도록 채찍질을 당한 후에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의 가로목인 패티블룸(patibulum)을 메고 골고다까지 간다. 그 무게가 약 40-100kg 정도였다고 한다. 죄수가 골고다에 도착하면, 십자가의 세로목인 스티페스(stipes)에 눕혀 18cm나 되는 못을, 양쪽 어깨를 잡아당겨 탈골시킨 후에 양손에 박고 양발에도 박았다. 그 상태로 십자가를 세우면 죄수의 횡격막이 아래로 처져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숨을 쉬려고 팔다리에 힘을 주면 체중 때문에 근육의 결을 따라 살이 찢어져 버린다. 그렇게 겨우겨우호흡하다가 결국은 탈진하여 질식사하는 것이 십자가형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보니 가족들이 죄수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로마 군병들에게 부탁하면 그들이 죄수의 무릎뼈를 망치로내리쳤다고 한다. 그러면 더 이상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들어 올려숨을 쉴 수가 없어서 질식사한다고 한다. 그 당시 죄수의 다리를 쇠망치로 치는 행위는 ‘크루리프라기움(cruitarguna)‘이라고 해서 관습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다리가 꺾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다(시 34:20). 이는 그 끔찍한 고통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스란히 다 겪으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영적인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상태였다.
그 죄로 인해 난생처음 하나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겪으실 수밖에 없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746), 이 구절은 상상하기도 힘든 육체적 고통보다 예수께는 하나님과 단절된 그영적인 고통이 더욱 힘드셨음을 나타낸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가장 잔혹한 고통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게 한다. 기도하지 않아도, 말씀 읽지 않아도 우리는 영적인 고통을 잘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스마트폰과 TV를 못 보게 하면 고통스러워한다. 그런 우리에게십자가는 나는 무엇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게 해 주는잣대와 같다. 영에 속해 사셨던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민감한 삶을살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나의 영적 상태가어떠한가?‘를 돌아보게 하는 신앙의 기준이다.


2. 최고의 자랑과 소망


당신은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스러운가?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걸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
"처럼 자랑할 게 많은 사람이 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하는 것일까? 지나친 겸손인가?
그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유일한 사건이기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더데레스타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망가진 창조가 이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에덴의길, 영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창조를 완성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바울은 십자가가 최고의 자랑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십자가가 완전한 소망의 도구가 되었다. 주님은 홀로 십자가를지심으로써 우리의 외로움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다. 극심한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고통을 못 박으셨고, 죄악을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못 박아 버리셨다. 십자가에 우리의 외로움과 고통과 죄악을 못 박으셨으니 십자가는 이제 우리의 행복의상징이요, 참소망이 되었다. 외로움과 고통, 그리고 죄 된 본성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십자가를 보라. 거기에 내 외로움과 고통과죄된 본성이 못 박혀 있다. 십자가에 그 모든 것을 못 박고, 참소

궁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러면 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불행복과 참소망이라는 날개가 등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될 것3.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셨을까?
다른 방법으로 죽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자 올럽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
이후로, 그 이유는 올럽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다. 십자가형은 하늘과 당 사이에 매달려서 죽는 모양새이다. 그러니가 영적으로 하나님께도 버림받고, 인간들에게도 버림받는 저주가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려서 죽는 것이다. 주님은 이 죽음의 의미를 너무도 잘아졌지만 올럽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면 이 올럽의 저주가 무엇일까?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신명기 2장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이스라엘 지파의 절반은 축복을 상징하는 그리심 산에서게 하고, 절반은 저주를 상징하는 에발 산에 서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율법을 실행하면 축복을 받고, 그렇지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내용을 낭독하면 온 백성이 ‘아멘‘ 하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디욱 넘쳤나니"라고 말한다. 율법의 기준으로는 우리의 범죄만 드리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축복의 그리심산대성수 없음을 아셨다.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게된제를 드릴 것이며"(신 27.5.6). 그래서 저주의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지키지 못한 율법으로 인해 받을 저주를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써 우리가 속량받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이 제단을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만 받으라고 하신다. 인간의 방법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제단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단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는다는 고백은 ‘이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우리를 속량하셨음을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된다.



4. 속량받은 사람의 특징

1) 죄인임을 안다

여기서 죄인이란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는 차원의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힘으로는 죽어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고, 결국은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인정하는 죄인이다. 마치 에발 산에서 선포했던 저주에 대해 ‘아멘
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죄인은 저주에 대해 아멘 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이런 죄인을 위해서 죽으셨다. 당신은 자신의 노력, 자신의힘으로는 결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는가? 진심으로 이 사실에 아멘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은 당신의 것이 맞다.

2) 율법으로 살지 않는다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성경은 십자가가 율법을 못 박아 버렸다고 설명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2:14). 여기서 ‘법조문으로 쓴 증서‘가 율법이다. 그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은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지 못하게 하셨다.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할 증서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매여 율법주의를 따라 살면 안 된다. 속량받은 사람은 율법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자신과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다.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신 용서를 믿는 사람은 법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최고 상위법은 은혜이다. 은혜 따로 법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 법이 은혜이다.
3) 용서하면서 산다
주님은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째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하자 "일곱 번을 일혼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로 밝히셨다. 만달란트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 주인이 모두 탕감해 주었더니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는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는 그이야기이다.
만 달란트를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일까? 일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니, 만 달란트는 육천만 데나리온이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므로 만 달란트는 육천만 일, 연수로 따지면164,384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돈이다. 그 당시 로마에 바쳤던 일 년 세금이 팔백 달란트였으니 얼마나 엄청난 액수인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하루 일당을 오만 원으로 쳐도, 약상조원이다. 만 달란트는 쉽게 말해 절대 갚을 수 없는 돈을 상징한다.
백 데나리온은 오백만 원 정도로, 만 달란트와 비교할 때 매우 적은 금액이다.
주님은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죽어도 갚을 수 없는 만 달란트와 같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이다. 그에 반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가치는 다 합쳐도 고작 오백만 원어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안다면 이 세상에서용서 못 할 일이 없다. 내가 삼조 원을 탕감받았다면 누가 나에게 오백만 원을 안갚는다 해도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혹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는가? 혹시 사기를 당해서 가족이모두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았는가? 그렇다면 상처를 주고, 사기를 친 사람이 쉽게 용서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가치는다 합쳐 보아도 오백 만원어치의 값어치밖에 안 된다고 가정하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용서는 삼조짜리 가치가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분노는 성도에게 맞는 옷이 아니다. 십자가의 속량을 생각하면서 참아 주고, 용서해 주자. 그러면 놀랍게도 하늘의 자유가주어질 것이다. 십자가를 생각함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또한 그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를 시작해 보라. 완전히 다른 세상이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용서가 주는 기쁨을 만끽할 테고, 샬롬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자유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자기 십자가‘가 무엇일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도 주님을 힘들게 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였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다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야 할 것이 있습로 용서이다. 용서는 결국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다 이루고 죽어야 자기십자가이다.용서는 사명이다.

4) 주님과 함께 산다

성경은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우리와 함께 살기록서라고 설명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자 쿠크로 하는깨어 있는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였느 낮은 주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뜻이 건식전히 죄가 내 삶 가운데 있지만 그것의 찌꺼기가 좋고 나를 정조를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이 조화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리라 믿으며 사는 것이다. 다시 죄를 정하도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았음을 기억하고, 다시 추스르고 다시감사하며, 다시 죄 짓지 않으려 애쓰는 삶을 사는 것이다. 포기하지않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의 모습이다. 십자가는생명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도 송두리째 바꾸는 은혜인 것이다.
가의 은혜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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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학습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 즉 ‘어떤 것에 대해 아는 것‘ 그 자체가 학문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삶의 창으로 인간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점ㄷ바로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운다"라는말에 부합하는 공부의 길이 될 겁니다. - P56

‘어떤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얼굴은 오른쪽(왼쪽)이 더이쁘게 나온다며 그쪽으로 찍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모습을 보여저 사람은 어떻게 해야 자기 모습이 예쁘게 비치는지 알고 있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이 찍힌 사진이나 화면을 찾아보고 고민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단점은 드러내지 않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일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선 무엇이 나의 장점이고 단점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나요? 
알고있다면 한가지를 더 생각해보세요. 10년 전의 자신과 비교해보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장단점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을 겁니다. - P59

라틴어의 성적 구분Summa cum laude숨마쿰라우데 최우등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 우수Cum laude 쿰 라우데 우등Bene 베네 좋음/잘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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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 책에 설명했듯이 교회들이나 종교 기관들이 종종 아주 불쾌감을 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있다. 비유에 나오는 형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때문이다. 그렇지만 형들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를멀리한다면 이 또한 방식만 다를 뿐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행동에 불과하다. 게다가 다른 신자들의 공동체에깊이 동참하지 않고는 당신은 결코 영적으로 성장할 수없다. 일단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반드시 신자들의 가족에 속해야만 한다. - P176

루이스는 한 개인을 알아 가는 데 공동체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데는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관계를 맺고 ‘그분을 더 잘 알아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와기독교 공동체에 깊이 동참하여 사랑과 책임의 견고한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본받고 섬기고 사랑하려 애쓰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당신은 그분을 알아 가고, 닮아 갈 수 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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