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제787호/2009년 11월 29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의 서평을 퍼온다. 작성자는 로쟈님이다. 



벌거벗은 난민의 생명에서 탈주하라 

조르조 아감벤, 김상운·양창렬 옮김, <목적 없는 수단: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난장, 2009)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 2008)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목적 없는 수단>(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로쟈 | 인터넷 서평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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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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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한국>(2003호/2009년 12월 1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 서평을 퍼온다. 

 




서구 정치 전통을 거꾸로 세우다

인민·인권·주권 등 주요 개념들의 전복적 해석 선보여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유럽지성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비평가다. 1966년부터 ‘르 토르’ 세미나에 참여하며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받은 그는 1979년 발터 벤야님 이탈리아어판 전집 편집자로 일하면서 하이데거와 비판적인 거리를 두게 된다. 그 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안토니오 네그리 등 20세기 대표 지성인과 교류한 그는 1995년부터 ‘호모 사케르’ 연작을 선보이며 사유의 거장 반열에 오른다.

신간 <목적 없는 수단>은 그가 미학자에서 정치철학자로 본격적으로 자리매김한 <도래하는 공동체>(1990) 발표 이후 약 5년에 걸쳐 집필한 책이다. 11개의 작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저자는 서구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어 온 주요 개념들(삶, 언어활동, 인민, 인권, 주권 등)을 전복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를 선보인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예외상태가 규칙이 됐음을 가르쳐준다- 벤야민의 이 진단은 벌써 50년이 지난 것이지만 그 시의성을 전혀 잃지 않았다. …… 주권의 벌거벗은 생명이 그동안 도처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17페이지) 

아감벤은 현 시점에서 정치의 본래 임무는 ‘행복한 삶’의 실현에 있지만, 정작 행복한 삶이라는 정치철학의 기초는 그동안 인간을 특정한 귀속 조건(국민, 시민, 프롤레타리아 등)에 속한 주체로 만들어왔던 국민국가에 의해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정치라는 개념 자체, 근대 지배적 국가형태로서의 국민국가, 모든 정치의 운영원리로 여겨지는 민주주의, 법에 근거한 권리와 인권의 보장을 다시 의심한다. 서구 정치전통의 모든 범주를 거꾸로 세움으로써 그가 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것은 정치 본연의 임무, 행복한 삶이다. 살아 있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 정치철학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말이다.

아감벤 사유를 관통하는 ‘예외상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목적을 위해 치달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주권권력의 작동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호모 사케르’란 이런 예외상태 속에서 주권권력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서막으로 이후 20년간 저자가 일관되게 사유하는 테마는 더 이상 주권권력이 자신의 고유한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 전제하는 벌거벗은 생명이지 않을 수 있는 삶, 행복한 삶의 구축이라 할 수 있다.

<호모 사케르>, <예외상태> 등 국내 막 쏟아지기 시작한 아감벤의 저서는 벌써 지성계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미학적 글쓰기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의 책을 액면 그대로 읽어내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책의 역자가 170매 가량의 한국어판 해설을 따로 덧붙인 이유다.

아감벤 정치철학 사유의 원형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 될 터다. (이윤주 기자 | misslee@hk.co.kr1)  


[출처] 서구 정치 전통을 거꾸로 세우다|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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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학보인 <대학신문>(2009년 11월 21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의 서평을 퍼온다. 역시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예외상태>와 패키지로 묶인 서평이다. ^^;; 로쟈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건인데, 로쟈님의 말마따나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와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최근에 출간됐지만, 리뷰기사는 아주 드물게 뜨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드문 서평기사 가운데 하나”인 이 서평이 무지무지 반갑다.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정치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긴급조치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한갓 생존에 지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가?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우리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던 이 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감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사유의 기존 개념들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독창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네그리를 비롯해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방대한 사유의 교류와 깊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예외상태>(2003)는 ‘호모 사케르’ 연작 중 Ⅱ-1권에 해당한다. Ⅰ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에서는 삶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가 감옥에서 수용소로 이행하면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주권의 본질임을 밝혔다면, 『예외상태』에서는 법과 폭력의 관계 속에서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예외상태’라는 장치야말로 국가주권과 법치의 통치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대외전쟁이나 내전 같은 비상시국에서의 긴급조치나 계엄령처럼, 예외상태란 정상시에 작동하던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아노미적 공간 속에 놓으면서 동시에 법의 힘에 포획시키는 주권권력의 정치적 장치다. 법 안에 법의 공백을 놓는 예외상태의 역설적 구조에 포획된 생명은 법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채로 법의 힘 안에 포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권력은 벌거벗은 생명과의 이런 배제적 포함 관계 속에서 삶을 통치하는 생명정치를 실행한다. 문제는 이런 예외상태가 더 이상 잠정적인 예외조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국가든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국가든 예외상태는 모든 국민국가의 정상적 통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분석이다. 예외와 정상규칙의 식별불가능성은 아노미를 창출해 법질서를 확정하려던 예외상태의 기능을 멈추게 하고, 결국 최종적인 법질서의 작동을 무화시켜 순수한 폭력의 아노미 지대로 들어서게 한다. 국가의 법이 폭력에서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아감벤은 마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 듯, 삶을 헐벗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기계 장치(예외상태)가 작동 정지되는 곳에서 오히려 ‘진정한 예외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전회(轉回)의 가능성을 본다.



 

진정한 예외상태란 법이 삶 자체와 구별되지 않고, 법과 삶의 배제적 포함 관계 자체가 무화되며, 거꾸로 법이 단지 삶의 사용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법 바깥으로의 자발적인 내버려짐과 더불어 삶이 자기 고유의 잠재성을 회복하는 상태다. 이는 법을 정립하거나 보존하려는 목적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수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법과 삶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 ‘목적 없는 수단’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 전체를 압축해 놓은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 <목적 없는 수단>(1996)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외상태>보다 훨씬 이전에, <호모 사케르>Ⅰ권(1995)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이 저서는 현재 진행형인 ‘호모 사케르’  연작의 주제들과 공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기획을 예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난민’, ‘수용소’, ‘인민’, ‘경찰’, ‘스펙터클 사회’ 등은 국가-국민-영토의 삼위일체에 근거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래할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요소들이다. 국민국가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국적 비시민들의 전세계적인 양산이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용소의 확산은 결국 안정적인 예외상태의 실현 지대를 확장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형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 국가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언어활동 자체가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생명과 정치적 실존, 소통 불가능한 것과 소통 가능한 것, 규칙과 예외, 난민과 시민이 더 이상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어두운 지대의 확장 속에서, 아감벤은 국가주권으로 표시되는 어떤 역사적 시대의 마감을 예감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자연스런 몸짓’, ‘순수한 언어활동’, ‘삶-의-형태’.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인 ‘목적 없는 수단’의 요소들로서 회복돼야 할 것들이다.  

국가주권과 법에 의해 정해진 목적(내용, 코드, 문법)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어떤 목적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몸짓과 언어활동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통가능성 그 자체이기에 장차 도래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인간은 정해진 동일성과 정체성이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다. ‘삶-의-형태’는 자신의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으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순수 수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의 역량을 완성하고 소통하는 데 도달하는 삶.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충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연결을 해체하고 국가주권이 분리시킨 다양한 형태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다시 묶어 ‘삶-의-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래할 정치 역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잠재적 역량을 목적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가와 비국가(인류)의 투쟁이 된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으로부터 행복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해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시작돼야 할 곳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기계와 맞서고 있는 바로 우리의 용산, 거기가 아닐까.(김재희 | 대진대 학술연구교수)

[출처]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작성자 난장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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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제787호/2009년 11월 29일자)에 실린 <목적 없는 수단>의 서평을 퍼온다. 작성자는 로쟈님인데, 알라딘 서재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붙여놓았다. “이번 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글에 대해서는 두 역자가 자세한 해제(간주곡)를 붙이고 있어서, 나로선 “삶-의-형태”와 “인권을 넘어서,” “정치에 관한 노트” 등의 장을 중심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한겨레21(09. 11. 30) 벌거벗은 난민의 생명에서 탈주하라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 2008)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목적 없는 수단>(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09 11. 23.  



P.S. '인권을 넘어서'란 노트에서 아감벤이 주장하는 바를 좀더 적으면 이렇다.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리고 적어도 국민국가와 그 주권이 와해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난민은 오늘날 도래하는 정치공동체의 형태와 그 한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이다. 만일 우리가 맞닥뜨린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것의 주제를 대표해온 근본 개념들(인간, 권리를 가진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인민, 노동자 등)을 지체 없이 포기하고, 난민이라는 이 둘도 없는 형상에서 우리의 정치철학을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25-26쪽) 아감벤의 '난민'은 우리의 '철거민'으로 다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철학' 또한 철거민에서 바로 재구축되어야만 하리라. 그러한 정치철학이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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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정치사상의 주요 범주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며 도래할 정치의 윤곽을 제시한 책. 9.11 사건으로 문제의식의 적실성이 인정된 '호모 사케르' 연작의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을 스스로 '사유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저자의 실험실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칼 맑스, 미셸 푸코와 같은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인간의 자연적 생명, 강제수용소, 언어활동, 순수 수단과 몸짓의 영역 등의 경험과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수록된 각각의 텍스트는 특정한 정치적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유한다. 오늘날 정치가 하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정치가 그 자신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전제로 하여 저자는 흔히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경험과 현상 속에서 고유하게 정치적인 패러다임을 탐구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목적 없는 수단> 한국어판은 200자 원고지 170매 분량의 해설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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