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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이 아름답다, 새로운 삶의 지도 너머학교 고전교실 13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 원작, 장성익 글, 소복이 그림 / 너머학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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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현대 자본주의의 성장 지상주의와 대규모 산업주의를 비판하며 인간 중심의 경제를 주장한 저작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낭만적 이상주의에 치우쳐 있으며, 경제학적 실효성이 부족하고 반(反)기술적인 편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판 받는 책이다. 


1.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적 발상 

저자는 탈중앙화된 소규모 공동체와 자급자족적 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는 고도로 상호연결된 현대 글로벌 경제 시스템과 세계화의 흐름을 역행하는 비현실적인 접근이다. 


2. 경제적 비효율성 초래 

대량생산과 규모의 경제가 가져온 생산성 향상과 빈곤 감소의 역사적 성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전통적인 소규모 생산 방식만을 고집할 경우, 현대 대중이 누리고 있는 전반적인 삶의 질과 편의가 저하됨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3.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호소 

책의 핵심인 '불교경제학'은 경제 문제를 영적, 윤리적 각성만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인간의 이기심이나 거대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을 간과한 채 개인의 도덕성에만 기대는 것은 구체적인 정책적 해법이 될 수 없다. 


4.구체적 실증 데이터의 결여 

저자의 명성에 비해 구체적인 사례 연구나 실증적인 경제 모델이 턱없이 부족하다. 주로 철학적이고 수필적인 어조로 주장을 전개하여, 실질적인 대안보다는 당위론적 선언에 머문다는 인상이 확연하다. 


5. 반(反)과학기술적 편향성  

거대 기술(핵에너지 등)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을 드러내며, 때로는 과거의 농경이나 전통 사회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야기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의 오용'임에도 불구하고, 기술 발전 자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6. 계몽주의적이고 권위적인 어조 

전통적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을 오만하다고 비판하는 저자 본인 역시, 대중의 소비 습관을 '탐욕'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일방적으로 설파하려는 계몽적이고 도덕적인 우월감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과거 농경사회의 소박함을 권하는 다수의 도덕-낭만주의의 책이 대개 그러하듯, 이 책 역시도 대규모=악=탐욕=파괴 vs 소규모=선=영성=공존'이라는 극단적이고 유치한 이분법적 프레임을 사용하고 있다. 거대 기업이 이뤄낸 기술 혁신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긍정적 측면은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인간의 영성과 종교적 가치를 강조하며 물질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당장 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절대 빈곤층에게 영성적 충족감을 우선하라는 주장만 내세우고 있어, 배부른 지식인의 오만한 훈수라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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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눈, 존재의 눈 - 메를로퐁티의 『눈과 정신』 강해
조광제 지음 / 이학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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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 대상에게도 인식이 있다. 화가들은 객관 세계에 자신의 의식을 투영한다. 


“그렇게 많은 화가들이 사물들이 자기를 노려본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클레를 좇아 앙드레 마르샹은 이렇게 말한다. ‘숲 속에서 나는 숲을 바라보는 것이 내가 아님을 여러 번 느꼈다. … 나는 거기에 서서 듣고 있었다. … 화가는 우주에 의해 꿰뚫어져야지 우주를 꿰뚫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 본문중에서 


존재자들은 모두 다 반사적인 성격을 발휘하면서 서로를 보면서-보이는 무한대의 시선들의 교차적인 네트워크로서 현존하는 셈입니다. 이 때 이 시선을 일컬어 메를로퐁티는 “선인간적인 시선”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교직-교차]에서 존재의 원소로서 살을 말하면서 이 살을 가시성과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는데요, 여기에서 말하는 이 “선인간적인 시선”이야말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말하는 바로 그 ‘가시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리 말하자면 繪畵는 화가가 바로 이 “선인간적인 시선” 내지는 “가시성”에 걸려들어 거기에 매혹되어 자신의 몸을 내어줌으로써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 본문중에서 


몸도 세계도 모두다 근본적인 ‘살’로 되어 있기에 보는 자도 보이는 자도 상호 교직,교접한다.


내가 볼 수 있다는 건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여질 수 있기에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세계가 보여진다는 것은 그 세계 안에서 보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귀머거리가 동시에 벙어리인 이유.

들을 수 있기에 듣게 할 수 (즉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식, 외계생명체가 존재하는 이유.

철학자가 화가보다 더 느리다. 적어도 봄의 문제에 있어서는 철학자가 화가보다 항상 한 발 늦은 미숙아임을 역설하는 것 같다. 


생명체가 없더라도 7식, 8식, 우주심은 항상 존재하기에 식-경-근이 있다.


동일한 의식이 광물 속에서 잠자고 있으며, 식물 속에서 꿈틀거리고, 동물 속에서 움직이고, 인간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리고 깨어난 현자 안에서 스스로에 돌아간다.- 켄 윌버 


회화의 의미를 화가의 '봄'과 대상의 '보여짐'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틀로 해석한다. 

저자의 현학적인 설명문체가 읽기에 상당히 거슬리는 게 흠이지만, 현대 철학까지 동원하여 회화의 의미를 해설해준다. 

단지, 저자의 생각이 이 책의 저본인 <눈과 정신>의 원저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생각과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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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도덕경 - 철학으로 다시 읽는 노자
김형효 지음 / 소나무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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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의 도덕경만큼 후인(後人)들의 해석이 분분한 책이 또 있을까?

원문이 워낙 고문(古文)인데다가 그 자구(字句)마저 판본마다 다양한 탓에 그러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도덕경을 꿰뚫는 노자 사상 자체가 일반인이 파악하기 어려우리만치 심오하고 현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한 철학자 김형효 교수는 그 나름의 독특한 식견으로 노자를 해석하여 독자로 하여금 도덕경을 읽는 새로운 깊은 맛을 일깨워준다.


하이데거와 데리다 철학의 인식틀을 통하여 바라본 노자의 도덕경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우주가 인과론적 사유로 짜여져 있지 않고 상관적 사유(correlative thinking)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가장 불가사의한 문제는 바로 악(惡)의 문제일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은 이 악을 오로지 도덕윤리적 차원에서 선의 적이나 싸워야 할 투쟁의 대상으로 보지 말 것을 종용한다. 왜냐하면 악은 선의 바깥에 서 있는 이물질이 아니라, 선이 분비한 자기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악(惡)을 선(善)의 다른 측면으로 보면서 불선(不善)이라고 명명했다.


악은 불선이지만, 그 불선 개념은 선의 대대법적 차이와 같으므로 선/불선이 하나의 쌍으로 존립한다. 그래서 일자가 없으면 타자가 성립할 수 없다. 말하자면 선이 존립하지 않으면 불선 역시 성립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상선(上善)은 선/불선을 다 포용하는 포일(抱一) 개념과 유사하다.


선과 불선은 같은 유(有)의 이중적 모습에 불과하다. … 차라리 그 불선으로서의 악을 다르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노자나 불가의 처방전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인간의 욕심에 따라 好/惡, 利/害, 善/惡으로 대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대법적인 상관적 차연을 자연의 비상도가 지닌 대대법적인 차연처럼 생멸의 상생과 상극의 이중성으로 읽는 것이 더 현명한 인식이 아니겠는가? 인간이 마음의 욕심에 따라 모든 것에 대해 자기중심적으로 호/오, 이/해, 선/악을 나누어 대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연에서의 유욕이 드러내는 병작(竝作)과 자빈(自賓)처럼 상관적 차연으로, 즉 상생과 상극의 비동시적 동시성으로 유(有)를 읽는 것이 가장 무위적인 세상보기가 아니겠는가?


이 이중긍정의 상관적 차연이나 이중부정의 초탈과 해탈이 바로 노자가 도덕경에서 기술한 이 세상의 무위법과 무위지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노자는 선/악과 진/위의 분별 대신 자연의 근원적 사실대로 세상을 살기를 종용한다. ... 결국 세상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미혹과 깨달음의 문제이므로, 선악의 기준으로 흑백을 가리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무명(無明)이 악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 석가세존은 무명을 씻어내는 깨달음이 가장 긴급한 인간의 도리라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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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은 유시민의 평소 신념인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시민의 글쓰기는 저자 특유의 '논리적 매너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한계를 드러내보인다.

 

1. '명확성'의 강박이 낳은 단순화의 오류

유시민 문체의 핵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이다. 그러나 이 책 <표현의 기술>에서도 나타나듯, 복잡한 사회적 맥락이나 미묘한 감정의 결을 지나치게 선명한 논리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독자에게 명쾌함을 주지만, 대상이 가진 본연의 다층적인 입체성을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틀에 맞춰 단순화해버리는 매너리즘으로 작용한다.

 

2. '답정너'식 전개와 설득의 과잉

그의 문체는 대개 확신에 찬 어조로 결론을 향해 직선적으로 달려간다. 이는 논리적 완결성은 높여주지만 반대로 독자의 사유가 개입할 여백을 지워버린다. '표현'이란 때로 모호함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기도 하는데, 유시민식 논리 기법은 모든 문장을 '증명 가능한 명제'로 치환하려다 보니 문학적 상상력이나 직관적 통찰이 끼어들 자리가 좁아진다.

 

3. 도구적 글쓰기에 갇힌 '기술'의 한계

책의 제목처럼 그는 글쓰기를 철저히 타인을 설득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Tool)'로 접근한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관점은 글쓴이의 고유한 개성보다는 '효율적인 문장 구조'에 집착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의 글은 누가 읽어도 매끄럽지만, 그 매끄러움이 오히려 작가 특유의 깊은 내면적 고뇌나 파격적인 스타일의 실험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자기 복제적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

 

결론적으로, <표현의 기술>은 똑부러지는 표현을 원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논리 교본'일 수 있으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그의 문법은 '언어의 예술성'이나 '사유의 불확실성'이 주는 미덕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계를 떠나 스스로 작가임을 선언했지만, 정작 본인의 작품 가운데 문학적/예술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은 하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저자 본인이 설정해버린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도구적 글쓰기 테크닉이 일종의 덫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기가 파놓은 함정이 스스로를 옥죄는 틀로 작용하여, 톡톡쏘는 사이다 직설 외에는 문학적 감수성이나 예술성이 자리잡을 틈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독후감 소매상" 이라는 별칭처럼 남의 작품에 대한 감상문이나 시류를 타는 경향성 에세이는 몇 편 더 써내겠지만 뭇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나 소설, 희곡 등의 본격 문학작품은 아마도 저자에게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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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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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은 유시민의 평소 신념인 '지식 소매상'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시민의 글쓰기는 저자 특유의 '논리적 매너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한계를 드러내보인다.


1. '명확성'의 강박이 낳은 단순화의 오류

유시민 문체의 핵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이다. 그러나 이 책 <표현의 기술>에서도 나타나듯, 복잡한 사회적 맥락이나 미묘한 감정의 결을 지나치게 선명한 논리로 재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독자에게 명쾌함을 주지만, 대상이 가진 본연의 다층적인 입체성을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틀에 맞춰 단순화해버리는 매너리즘으로 작용한다.


2. '답정너'식 전개와 설득의 과잉

그의 문체는 대개 확신에 찬 어조로 결론을 향해 직선적으로 달려간다. 이는 논리적 완결성은 높여주지만 반대로 독자의 사유가 개입할 여백을 지워버린다. '표현'이란 때로 모호함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하기도 하는데, 유시민식 논리 기법은 모든 문장을 '증명 가능한 명제'로 치환하려다 보니 문학적 상상력이나 직관적 통찰이 끼어들 자리가 좁아진다.


3. 도구적 글쓰기에 갇힌 '기술'의 한계

책의 제목처럼 그는 글쓰기를 철저히 타인을 설득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Tool)'로 접근한다. 이러한 기능주의적 관점은 글쓴이의 고유한 개성보다는 '효율적인 문장 구조'에 집착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유시민의 글은 누가 읽어도 매끄럽지만, 그 매끄러움이 오히려 작가 특유의 깊은 내면적 고뇌나 파격적인 스타일의 실험을 가로막는 전형적인 '자기 복제적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


결론적으로, <표현의 기술>은 똑부러지는 표현을 원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논리 교본'일 수 있으나, 논리가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그의 문법은 '언어의 예술성'이나 '사유의 불확실성'이 주는 미덕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정계를 떠나 스스로 작가임을 선언했지만, 정작 본인의 작품 가운데 문학적/예술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은 하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저자 본인이 설정해버린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도구적 글쓰기 테크닉이 일종의 덫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기가 파놓은 함정이 스스로를 옥죄는 틀로 작용하여, 톡톡쏘는 사이다 직설 외에는 문학적 감수성이나 예술성이 자리잡을 틈이 사라졌기 때문인 것이다. 


"독후감 소매상" 이라는 별칭처럼 남의 작품에 대한 감상문이나 시류를 타는 경향성 에세이는 몇 편 더 써내겠지만 뭇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나 소설,희곡 등의 본격 문학작품은 아마도 저자에게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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