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 - 중국인들의 한국전쟁
백지운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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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매체로 보는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데 중국 또한 마찬가지. 한국인으로서 통탄하지만, 앞으로 이런 양서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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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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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203호는 '세계서사' 특집을 다뤘다. 쉽게 말하자면 미사담론이 아니라, 거대담론을 다룬다는 의미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거대담론은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다. 이는 임헌영 문학평론가가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서 문학이 거대담론을 버리고 미세담론만 다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번 창비는 어떤 거대담론을 건드렸을까?

이일영 교수의 <세계체제 카오스와 한반도경제>는 흥미로운 글이다. 현재 한국경제는 패권 경쟁으로 심각한 압력을 받고 있다. 수출 중심국가 대한민국은, 역동적이며 다양한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안정성이 떨어지고 다양한 위험을 겪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당장, 우크라이나 -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 - 하마스 전쟁, 미국의 금리 인상 등 외부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면역력이 약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달까···.

그렇기에 이일영 교수는 한국경제를 이해하는 한 가지 틀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변화의 전모를 알 수 없다는 데서 불안을 느낀다. 개인이나 사회나 변화의 전체 상을 그리지 못하면 삶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경제의 총제적 인식틀로서 '한반도경제'를 논의해왔다." 46면

한반도경제론은 세계체제의 일환이다. 지구상 유일 분단국가인 한반도는 '분단'이라는 기형적 체제를 갖고 있다. 물론, 지금은 대한민국이라는 건실한 국가가 됐지만, 한반도인 심층에는 '분단국가'라는 무의식이 남아있다. 이를 결손국가(defective state)라 말한다. 북한은 공산주의 이룩을 실패했고, 세습을 통한 왕정국가가 됐다. 대한민국은 많은 이해충돌 후, 민주화를 이룩했다. 급속한 성장 속에서 발전의 빛을 보긴 했지만 그림자도 짙어졌다.

"한반도경제론의 중요한 문제의식은 남북 분단경제가 지속 발전 불가능성의 위기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일국 민족경제를 택하자는 주장은 흡수통일 논의로 귀결되기 쉽다. 양국 국민경제를 택하자는 주장은 적대적 양국 전쟁상태를 고착화할 수 있다. 한반도경제론은 양자택일의 진영 논리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일국 민족경제와 양국 국민경제 이외의 체제 해법을 탐색해보자는 것이다." 48면

저자의 주장은 언뜻 낭만주의, 이상주의 같다. 현재 통일은 논하기는 쉽지 않다. 만약 지금부터 통일을 논한다면, 통일의 거센 파도를 2030세대가 직접적으로 받아내야 한다. 현재, 미래를 점칠 수 없는 세대에게 통일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짊어지게 하는 것은 잔인한 내용이 아닐까? 하지만, 역사를 보면 어떠한 세대는 강제로 짊어지는 짐이 있었다. 편안한 일생을 보내고 싶다면 20세기에 태어나면 안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처럼.

저자는 세계체제의 붕괴로 인해 한국경제가 여태까지 받아왔던 특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저자는 미-중 갈등이 세계에 카오스 상황으로 빠트리고, 한국은 체제혁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한반도경제론'이지 않을까 싶다. 이일영 교수님의 주장의 옳고 그름의 떠나, 체제혁신의 필요성은 부정하지 못한다. 세계는 변동하고 있다. 출판되는 서적만 봐도 패권 흐름에 관한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한, 지정학이 부상하면서 그것에 관한 책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 거대한 흐름 속에 있어 느끼지 못할 뿐이다.

저자의 결론은 결국에는 공존과 공영을 말한다. 사실, 복잡한 문제일수록 해답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세계를 위한 공화를 누가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대한민국 단독으로는 절대 시작할 수 없다. 잔인한 말이지만, 한반도는 대한민국 소유가 아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심지어 대만. 한반도의 변동은 세계를 잡고 있는 강대국들이 지켜보고 있다(북한은 강대국이라 보기 힘들지만,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은 크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다. 그러나 여러 층위에서 공화주의 경제 영역을 늘려가다 보면, 세계공화국으로 향해가는 길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교수의 희망으로 글을 맺고 싶다.

고명재의 <하와이안피자>, 임유영의 <연해주>를 인상 깊게 읽었다. 시란 현실의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눈이 떨어지는 풍경 묘사도 시가 되지만, 어떠한 사물을 보고 전혀 다른 것을 떠올리는 것도 시다. 때로는 시의 심상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취향에 맞는다면 전혀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시는 찰나를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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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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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가장 큰 매력 인간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뒤표지에 적혀있는 허버트의 글귀다. SF를 읽는 이유가 뭘까? 이 물음은 더 나아가 문학의 의미까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의의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근대 시기에는 계몽과 선전의 역할을 맡았고, 군사독재 시기에는 자유를 속삭였다. 그렇다면, 현대에는 어떨까? 이제 거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문학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얘기, 소소한 얘기를 다루는 문학이 많아졌다. 개인으로 초점이 맞춰진 문학은 좋은 점도 있지만, 지나치게 내부로 매몰되는 경우도 보이는 것 같다. 외부로 열기가 빠지지 않으면 곪아서 염증이 생길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다면 SF는 어떨까? 본인이 생각하기에 거대한 이야기 속 '개인'을 그려내는 것이 SF소설의 묘미인 것 같다. 거대한 이야기란 SF소설의 주요 장치 '과학적 요소'라 본다. 과학은 세세하지만, 결국 인류로 펼쳐진다. 최근 <삼체>를 읽었다.

조만간 넷플릭스에서 <삼체> 드라마가 개봉된다. 세세하게 말하면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겠다. <삼체> 속에 등장하는 인류는 하나의 '개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류는 하나의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이다. 프랭크가 말했듯이 SF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인간됨'을 보여준다.


표제작 <생명의 씨앗> 고향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한 '지구인' 이야기다. 행성에 도착한 지구인들은 3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식민지화하지 못했다. 지구에서 가져온 자원은 바닥이 났고, 사람들은 병들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지구'기준으로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얘기 같지만 마지막에 인간의 의지로 보여줬다.


"크로다는 호나다의 손을 잡고 다시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로 이끌었다. 나란히 걸으며 크로다가 말했다. '이곳에 이름을 붙여야 해요.'

'당신이 돌아온 후에요.' 호나다가 말했다."


때론 직접적인 표현보다 간접적인 표현이 큰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최근 <듄 PART2>가 개봉했다. 원작에서 생략된 얘기가 많았지만, 충분히 원작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폴'은 고뇌에 빠진다. 프랭크의 말마따나 인간됨을 생각하는 것일까? 수록작 <듄으로 가는 길>은 하나의 안내서다.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는 '듄'에 방문한 관광객 입장을 느끼게 해준다.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는 충분히 읽을 만하다. 듄의 유일한 단편집이 수록됐다는 점도 있지만, <원시인>, <생명의 씨앗>, <존재의 기계>, <GM 효과> 등 프랭크 허버트의 세계관을 잘 담아낸 수록작들을 읽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프랭크 허버트의 두꺼운 <듄> 읽기가 망설여진다면, 이번 '황금가지'에서 출판된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을 먼저 접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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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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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허버트의 작품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어떤 단편은 다소 불친절하지만, 상상하는 작업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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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이용주의 고전 강독 2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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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은 이용주 학자가 정성 어린 해설을 담은 역작이다. 보통 철학 원문 해설서는 두께와 빽빽한 텍스트 때문에 읽기가 버겁다. 하지만, 이번 "이학사"에서 출판된 <노자 도덕경>은 번역-원문-독음을 보기 쉽게 편집해서 독서에 큰 피로감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이용주 학자는 어려운 용어로 해설하지 않고, 문외한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간편한 문체를 사용했다. 제법 두꺼운 철학서이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노자는 우선 '도'가 어떤 것인지 말한다. 물론 노자는 '도'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용주 학자는 이런 해설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인가? 도는 어떤 초월적인 장소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본질인가? 아니면 도는 항상 '사물의 도'로서 구체적인 사물과 존재하는가? '도'는 그 제는 항상 존재한다. 동시에 그 도는 '만물의 도'로서 존재한다. (중략) 그런 의미에서 도는 '일자'이면서 동시에 '다자'다. '일즉다. 다즉일'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나와 네가 다르고, 개와 고양이도 다르다. 서로 다른 '도'를 갖고 있다. 그런데 노자는 어떻게 일자 이면서 다자라 말하는 걸까? 생각해 보면 단순하다. 서로 다른 '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같은' 도를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저자의 말을 빌려보자면, 우린 "생명의 도"를 공유하고 있다. "다르지만 동시에 모두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유튜브 <충코의 철학>에서 이용주 학자의 인터뷰를 들으면, 학자들 사이에서 <도덕경>이 정치적 해석과 도덕적 해석으로 갈리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단순하게 한 쪽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고전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독자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이것이 고전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인터뷰를 들으면서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고, 평생에 걸쳐 조금씩 도덕경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실천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게 된다."

위무위, 즉무불치(爲無爲 則無不治)

"인위적인 작위, 함부로 개입하고 간섭하는 정치, 즉 '망작'의 정치를 할수록 세상은 혼란스러워진다. 법이 번잡해지고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세상은 더욱더 혼란으로 빠져든다. 문제가 생겨도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다. 이럴 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손을 대면 댈수록 더 꼬인다. 규칙과 제도가 너무 복잡하고, 규칙과 제대로 규제하려는 현실도 너무 복잡해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물론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 노자는 어떤 무위, 즉 '손을 대지 않음'을 말하는 것일까? 복잡한 현대 세상은 이미 많은 손때가 탔다. 노자가 말한 '도'는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바랜 거 같다.


66장은 "무위정치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 정치에 관한 구절 중 제일 인상 깊어서 전문을 실어 보겠다.


1) 강과 바다가 모든 계곡의 왕이 되는 이유는

아래로 가는 것을 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다.

2) 따라서 성인은 백성 위에 서려고 할 때

반드시 말을 그들 아래에 둔다.

또 백성의 앞에 가려고 할 때

반드시 몸을 그들 뒤에 둔다.

3) 따라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은 무겁게 여기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은 해롭다 여기지 않는다.

천하는 기꺼이 그를 추대하고 미워하지 않는다.

4) 그는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무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사회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위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국민(백성)에게 과도한 제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지도자가 있지만 느껴지지 않고, 질서가 있지만 엄격하지 않고, 규제가 있지만 과도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의 정치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무위의 통치를 실행하는 성인의 정치는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거나, 통치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백성은 기쁜 마음으로 그를 통치자로 받들고, 그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다."


동양철학의 묘미는 "치우침이 없다."에 있는 것 같다.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 것 같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명쾌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그 또한 편파적이면 안 된다. <도덕경>은 할아버지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나 읽는 고전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현대 사회는 혐오가 가득 찼다. 여기저기 뻗치는 손길은 사람의 분노를 키우고, 혐오를 가지게 만들었다.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당신은 나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조금 더 예민하게 말해볼까?

여당은 야당을 죽이고, 야당은 여당을 죽인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혐오하고 사랑을 잃었다. 노자가 현대 사회를 바라봤다면, 이것이야말로 '망작'이라 하지 않을까?


<도덕경>은 읽기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이용주의 <노자 도덕경>은 깔끔한 문체로 해설을 곁들었다. 이용주 학자의 해설은 현학적이지 않고, 현대인이 어떻게 하면 <도덕경>을 편파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미 있게 받아들일지 고심한 흔적을 보여준다. 1장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좋다.(본인은 1장-6장까지는 순서대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노자의 '도'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알 수 있다.) 하루에 한 장씩 읽는 것이 좋겠다. 차근차근, 그것이 비움의 길, 다스림의 길. <노자 도덕경>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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