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평점 :
저기 악이 있다!”고 소리치자고 하신, 공지영 작가님께
- 『해리』를 읽고
수도원에 다녀왔습니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주인공인 요한 수사가 사는 왜관 수도원 말입니다. 세상살이에 지쳐 조금 조용한 곳에서 홀로 머물고 싶었습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서 멀어지면, 나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도 떨쳐내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제에 대한 믿지 못할 이야기들이, 어떤 분노가 계속해서 저를 잠식하고 있었습니다. 『해리』를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프고 힘들었는데, 실제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해 소희가 묵었던 ‘손님의 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저녁 기도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어서 먼저 대성전으로 올라갔어요. 오랜만에 보는 ‘왜관 예수님’ 아래서, 어떤 수사님이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걸레를 들고 의자를 닦아내고 있는 수사님의 모습은 경건해 보였어요. 오른쪽 의자를 다 닦은 수사님은 성전 가운데 길로 가서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건너편으로 옮겨 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맨 앞줄에 앉아 기도를 하셨어요. 아, 청소를 다 하신 거구나... 생각했는데, 기도를 마친 수사님이 다시 걸레를 들고 의자를 닦아내셨습니다. 계획했던 하나의 청소를 마치고 기도하고, 다시 걸레를 들고 성전의 다른 의자들을 열심히 닦아내는 수사님을 보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노동하는 수사님, 기도하는 수사님의 모습과 저를 분노하게 만든 사제들의 모습이 겹쳐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던 성당은 청소하는 날이면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 걸레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노동으로 갈라지고 부르튼 손에 걸레들 들고 성당의 의자며 바닥을 닦았지요. 부활을 맞아 대청소를 할 때도 신자들만이 성당의 곳곳을 쓸고 닦았습니다.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 곳도 성당의 신자들의 몫이었지요. 그럴 때마다 ‘성당은 신자들의 것’이라는 논리가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자로 살아온 37년 동안 성당의 그 어떤 것도 제 것처럼 써보지 못했습니다. 성당의 모든 것은 ‘사제의 것’처럼 관리되어 왔으니까요.
청소하며 기도하는 수사님을 보니, 굽은 허리로 청소하던 노인들이 떠올라 서러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아마 선생님이 쓴 『해리』를 읽지 않았다면, 울지는 않았겠지요. 성당에서 사제들이 차지하는 것들, 교회에서 성직자가 차지하는 것들에 ‘그렇지 머!’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해리』를 읽은 후, 작은 일에도 자꾸 마음이 쓰여 자주 앓게 됩니다. 『해리』는 저에게 너무 큰 아픔을 준 책이었어요.
사실, 『해리』를 읽는 게 두려웠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무너져가고 있는지, ‘선’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그들이 어떻게 ‘악’을 행하고 있는지 그걸 알게 되는 게 두려웠으니까요. 그래서 선 듯 책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예약주문을 해서 가장 먼저 받았는데도, 책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 두려움의 실체와 마주서는 것이겠지요.
『해리』는 ‘소망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습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사람들이 감금당하고, 급기야 죽어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상황이 묘사되었고, 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특별할 것은 없었다. 이것은 지난 6년 통산 312번째, 최근 2년간 일어난 129번째의 비슷비슷한 죽음이었다.’
숨이 턱 막혔습니다. 이 문장이 선생님이 지어낸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몇 해 전, 시사프로그램을 통해 저도 이 사건을 접했습니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6년간 31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제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어요. 12명이 아니라, 312명이라니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 이후 해명 자료들이 나왔지만, ‘생명 존중’을 위해서 낙태를 반대하는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태아도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곳의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처참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해리』에서 다시 만난 그 죽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소망원 이야기를 넘기자, 어느 술집을 묘사하는 글이 나왔습니다. 접대부들이 나오는 술집에서 벌어지는 일이었지요. TV나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었으니,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제가 있다는 것은 무척 생경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도 그런 자리가 어색했던지 문을 열고 조용히 나왔다고 했지요. 안개 속을 걷다가 그는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그때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유통기간이 막 지나서 곧 폐기될 음식들을 먹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읽을 때부터 마음이 울컥거렸습니다. 청년이 사제를 알아보고 말을 건네고 급기야 술이 깬다는 ‘바나나 우유’를 건네는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엉엉 울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위안해야 하는지, 가슴이 먹먹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어요.
숨을 고르고, 다시 책을 읽었습니다. 뉴스텐 기자 한이나와 그의 오래전 친구인 이해리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어요.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증은 또 다시 분노로 뒤바뀌었지만, 『해리』를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습니다. 선을 가장해서 오는 수많은 악들, 그걸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 그 속에 저도 있었으니까요. 저도 SNS에서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며 모금 활동을 하던 사제에게 돈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선’한 일을 하려고 선택한 일이었는데 ‘악’을 만드는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충격은 컸습니다. 어떤 것이 선이고 어떤 것이 악인지, 그 경계를 찾는 것이 무척 힘들어졌으니까요.
『해리』를 끌고 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저는 백진우 신부에게 가장 분노했습니다. 어쩌면 이해리보다 더 나쁜 악이 백진우 신부라고 생각했어요. ‘사제’라는 이름으로 악을 가리고, 선한 척 위선 떠는 그가 무섭고 슬펐습니다. 이해리를 악녀로 만드는데 백진우 신부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럽기까지 했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마트’하게 제 주머니를 채우는 백진우 신부를 보다 어떤 사제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독신서약과 순명 서약을 하지만, 청빈 서약은 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던 어떤 사제가요...
누가 찾아오기만 하면 다리를 절고 아픈 사람이 된다는 민들레마을 원장 신부도 절망이었습니다. 평생을 시장에서 장사하며 살아온 할머니에게 돈을 받아, 고가의 나무를 심는 그 원장 신부 말이에요.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자본을 숭상하는 원장 신부... 책을 읽는 내내 절망을 절망으로 덮으며 처참함을 쌓아가는 교회가 보여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가 아는 사제들 중에도 백진우가 있지 않을까, 내가 정말 ‘좋은 신부님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 중에도 민들레마을 원장 신부가 있지 않을까... 마음이 너무 심란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해리』에서 내가 읽어야 할 ‘희망’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사실 좀 암담했어요. 『해리』의 책장을 덮은 지 많은 날이 흘렀지만,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수도원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노동하는 수사님이, 기도하는 수사님이 저를 울린 것이지요. 3일을 수도원에 머물면서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기도를 하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자주 눈물이 흘렀어요. 그러나 전시관에서 눈물이 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지요? 수도원 대성전 아래층에 있는 수도원 전시관이요. 돌아가신 신부님과 수사님들의 소박한 유품을 비롯해, 수도원의 오래된 역사가 보관되어 있는 곳 말이에요. 그곳에서 오래된 사진과 낡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보다가, 조선으로 파견된 젊은 사제들이 함께 모여 찍은 기념사진을 보는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느님을 전하러 왔던 그 젊은 사제들, 결국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제들 말이에요.
누군가 목숨을 걸고 지켜온 교회를, 누군가 사리사욕을 위해서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너무 슬펐습니다. 가난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서약한 이들이, 부자로 살겠다고 나서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프고 아팠습니다. 그러다 『해리』의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안드레아’가 떠올랐습니다. 열 두 사도들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지만, 중요한 때에는 언제나 소외됐던 안드레아, 그러다 결국 성경에서 사라지는 안드레아 말이에요. 선생님이 안드레아 사도 이야기를 왜 그 부분에 넣었는지, 그때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추악하게 변하고 있는 교회가 망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안드레아 사도 같은 사제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보여지는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꼭 필요한 때에 간절히 원하는 이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하는 안드레아 같은 사제들이요. 이런 안드레아가 우리 교회를 정화하고 있는 거겠지요. 바다 속에 있는 소금처럼, 3.5% 밖에 안 되는 그런 안드레아들이요.
저는 교회가 온당하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이나가 강 변호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죄 짓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들은 거기서 좀 온당하게 남아있어 주기를’, ‘그래야 우리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그래야 언제든 돌아가고 싶어질 테니까요.’ 그러려면, 저도 소리쳐야겠지요. 살다가 악을 만났을 때, 그 악과 맞서 싸우지는 못해도 “여기에 악이 있다.”고 알려야겠지요. 그게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안드레아의 또 다른 역할일지도 모르니까요.
가톨릭 신자로서 『해리』를 쓰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용기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가니』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그랬듯, 언젠가 『해리』도 가톨릭에서 인정받는 작품이 되기를, 그리하여 가톨릭이 쇄신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꿔봅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선생님이 흘리셨을 수많은 눈물이 성모님 발아래서 아름다운 장미로 피어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2018년 9월 18일 독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