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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작업 - 나를 잃지 않고 엄마가 되려는 여자들 ㅣ 돌봄과 작업 1
정서경 외 지음 / 돌고래 / 2022년 12월
평점 :
지난 금요일, 2022년의 공식적인 일정이 모두 끝났다. 새해가 될 때까지 더 이상 수업과 회의와 원고를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휴가가 없’는 법. (지인이 알려준 말인데, 누가 한 말인지 까먹음) 나는 둘째가 아침에 등교해 오후 늦게 돌아오는 월요일을 기다렸다. 새해 계획도 세우고, 새로 써야 하는 원고 기획도 마무리 할 참이었기 때문이다. 오롯이 혼자서! 아침 시간을 즐기며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러나 이런 계획은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늘 무용지물이 된다. 아이가 아파서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이다.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하루 종일 아이와 함께 있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예정했던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화요일!이 있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화요일에도 아팠다. 아침부터 이 병원 저 병원으로 투어를 했고, 아이와 함께 수 시간을 병원에 묶여 있었다.
이런 일은 두 아이를 낳고 키웠던 17년 동안 비일비재했다. 내내 건강했던 아이는 내가 지방 출장을 갈라치면 아프기 시작했고, 남편은 늘 바빴으며(그래서 혹자들은 내게 남편이 없는 줄 안다), ‘프리랜서’라는 이름 때문에 항상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은 항상 ‘프리’한 내 몫이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진짜 힘들고 서러운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대학도 가고, 책도 쓰고, 강의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돌봄’ 덕분이었다. 딸의 ‘작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돌봄’을 해준 엄마 덕분에 나는 ‘학생’도 되고, ‘작가’도 되고, ‘강사’도 되었다. 엄마의 ‘돌봄’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 한 곳에 묵혀두었던 지난 시절들을 다시 떠올린 것은 《돌봄과 작업》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수많은 ‘나’를 만났다. 어쩌다 한 두 명의 생각에 ‘공감’한 것이 아니라, 책을 쓴 11명의 저자들에게 깊이깊이 공감했다.
먼저 이 책의 첫 문장을 읽고 빵 터졌다. ‘내게 아직 아이가 없었을 때 아이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설마 그 아이를 내가 키우게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p29, 정서경), 라는 문장이었다. 그렇다. 나도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될 줄 몰랐다. 어른들이 말하던 것처럼 아이는 낳기만 하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아이는 엄마의 24시간, 할머니의 25시간을 잡아먹으며 컸다. (우리 아이들은 종종 말한다. ‘엄마는 우리를 낳기만 했지, 할머니가 다 키웠잖아’라고. 으허허허.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서유미 작가가 쓴 ‘아이는 마트료시카처럼 어릴 때 모습을 품고 있고’ 라는 문장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팠다. 자다 깬 아이가 자리에 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아이를 재우고 작은방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원고를 쓰고 책을 봐야했다. 자기가 잠들면 엄마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고, 겨우 잠들었다가 이내 깨서 서럽게 울었다. 시험을 보고, 마감을 해야 하는 나는 아이를 안고 같이 울었다. 이제 나보다 훨씬 큰 아이지만, 그 아이의 모습 속에 울고 있는 작은 마트료시카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부모에게 잔인한 양육 지침들’에 대해 꼬집은 홍한별 작가의 글도, ‘남자 학자나 지식인을 보면 존경심보다는 ’밥은 누가 차려줬는지, 아이는 누가 키워줬는지‘ 등이 궁금해지며 코웃음이 나왔다’던 임소연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의 글도, ‘육아란 스스로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변화의 과정이며, 때로는 그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선택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적 공감을 원한다’는 전유진 아티스트의 글도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특히, 내가 가장 깊이 공감하고 위로 받은 부분은 인터뷰어 엄지혜의 글이었다. 그는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회사를 다니는 워킹맘인데, 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같은 여성으로서 미안했다’고 한다. ‘돌봄을 끝낸 시기에 또 다른 돌봄을 시작하게 만든 당사자가 나라서.’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엄마의 시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엄지혜는 친정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한 창 일 때 정신과 전문의이자 정신분석학 전문가가 해 준 말을 듣고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나도 이 글을 읽고 엉엉 울었다.
“자식이 부모에게 신세를 질 때가 있고, 부모가 또 자식에게 신세를 질 때가 있어요. 그때 잘하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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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작업》을 읽으며 생각했다. ‘돌봄’은 결국 ‘돌아봄’일지도 모른다고. 누군가를 돌보며 내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누군가의 돌봄에 기대어 살며, 내가 돌볼 또 다른 누군가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돌봄’과 ‘돌아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이 책을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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