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그의 본모습을 전부 알아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늪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찾는 수밖에는 없다. 내 시시한 농담에 웃어주고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해주었던 사람들, 이제 끝장이라는 선명한 감각조차 사치일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내 장황하고 자신 없는 설명을 듣고도 나를 재워주고 내 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덕에 나는 아주 멀리까지 갔다 왔고, 잘 지냈을 뿐 아니라 번영했고, 내가 누군지 확신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길 찾는 능력과 주소 기억하는 능력을 대신하는, 말 찾아가는 능력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우리는 사방의 창이 모두 푸른 숲을 향해 나 있는 박사의 주방에서 마호가니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시작했다"처럼 삼차원 공간 정보를 포함한 시각적 묘사를 중히 여긴다.
(중략)
또 하나 중요한 영어 서사의 특징은 인물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감정에 대해, 생겨났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쾌한 끝맛을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 별로다"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어 보이는 그 감정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그에 맞는 언어를 찾는 것은 영어를 내 언어로 구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억울’이 등장하는 여러 상황을 보면 오늘날 억울함은 그저 부당함unfairness에 대항해 생기는 감정을 지칭하는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억울함은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남용되고 별로인 기분을 가장 잘 알리는 한마디이며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중략)
수업에서 어떤 수강생은 불만족unsatisfied과 무력감feeling helpless이 동시에 느껴지는 감정을 억울이라 정의하기도 했다.

감정을 언어화하고 더 나아가 두 언어를 오가며 그 감정의 스펙트럼을 시험해보는 일은 당신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소통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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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찾아보면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막상 사랑을 논할 때 사용되지는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너에게 정이 있다"라고 사랑 고백을 대신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사랑이 끝날 때나 "사랑이 없으면 정은 있어?"라는 이상한 문장에 등장하는 것. 사랑까지는 아니고 애착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또 애착보다는 뭔가 거대하고 끈질긴 무언가를 칭하는 듯한, 그 ‘정’이 진짜 무언지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인터넷에서 한 댓글을 읽기 전까지는.

나는 그 순간 ‘정’이 ‘말로 하지 않는 무언가를 헤아리는 일’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중략)
정이 쓰일 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는 감정은, 그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향해 무기로 쓰일 수 있기에.

언어는 실제로 있었던 일과 나 사이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내가 자주 접하는 언어가 폭행 대신 손찌검을 자꾸 쥐여준다면 내가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문장에서 손찌검이 들어오는 자리는 내게 천막으로 가려놓은 웅덩이 같다. 누가 왜 가려놨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래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발을 디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걸음을 멈추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너 나 무시해?’라는 마음속 외침이 내게 떠넘기는 바깥의 관찰자를, 말 그대로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름을 붙일 만한 감정을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 사람에게 재차 질문하기로 했다. 나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는 스스로를 탓하거나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다만 그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재고해보았다. 내가 가진 것을 깎아내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를 가엾게 여기기로 했다. 그러자 내가 ‘무시당하는’ 일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외부에서 오는 진짜 모욕과 내부에서 울리는 자기혐오를 구분할 수 있게 되자 무시란 별게 아니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고 이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도, 더 생각해볼 만한 미진한 감정을 남긴다 해도 그걸 전부 "참 감동적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깃털처럼 상쾌하게 정리하는 인식의 습관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일까?

다만 인간이 인간에게 말을 걸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으나 상대가 알아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하는 말’은 참을 수 없다.
(중략)
내가 아무렇게나 말해도 상대가 알아들을 거라는 전제, 더 나아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나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믿으며 자의적으로 만드는 이상한 생략들, 혹은 돌려 말하다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일이 한국어에는 꽤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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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현상’이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1978년 조지아 주립대학교의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잰 임스가 만든 말로, 이 현상은 성공한 사람들이 느끼는 세 가지 유형의 감정을 말한다. 첫째,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느낌, 둘째, 자신의 성취는 순전히 운이 좋은 덕택이라는 생각, 셋째, 자신이 일군 성공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

가면현상에 대한 글을 찾아 읽어볼수록, 누가 보기에도 의심의 여지없는 능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조차 이런 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받고 타인 앞에 나서는 일이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은 여성들이 자주 겪는 감정 상태라는 것도.

왜 이런 생각에 빠져 있을까. 언제 ‘익숙한’ 실패가 다시 찾아와도, 스스로를 불신하고 성공을 불신하는 사람은 덜 실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성공에 도취했다 추락하기보다는 애초에 도취되지 않고 경계하면 추락할 때 충격이 덜하다. 나 스스로를 사기꾼 취급해서 얻는 것은 추락할 경우를 위한 자기환멸 정도다.

이것 하나만 명심하려고 한다. 내가 얻는 좋은 기회는 (미래의 퍼포먼스가 아니라) 과거의 퍼포먼스의 결과다. 과거의 내가 열심히 해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내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미래의 내가 더 좋은 기회를 얻으리라.

흥미롭게도, 많은 이들이 자기가 싫어하는 ‘자기과시형 사기꾼형 미치광이’처럼 되기 싫다는 이유로 자기 홍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자기 홍보가 아니어도 충분히 일해서 먹고 사니까 굳이 그 방식을 선택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견실한 당신이 침착하게 ‘관심 비즈니스’를 손에서 내려놓으면, 그것을 ‘자기과시형 사기꾼형 미치광이’들이 냉큼 채간다.

대면하고 지내는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박하다고 실망할 일이 아니며, 직접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나를 키울 거라는 말.

첫 직장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가족과의 관계가 평생의 인간관계의 기준점이 되는 것처럼. 가족과 잘 못 지내는 사람은 이후 사람들과 사귈 때 친구든 연인이든 시행착오를 오래 거치게 되는데, 직장생활은 성인이 된 뒤에 시작하지만 그럼에도 처음 하는 일과 사람 문화의 기준점이 되기는 매한가지다.

내가 생각하는 큰 회사부터 다니는 것의 약점이라면 안주하기 쉽다는 점이다. 모든 게 적당히 좋으면 굳이 모험하고 싶지 않아진다. 그래서 큰 회사들, 정년이 보장된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한때는 총명했지만 이제는 분리수거도 안 되는’ 유형의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능력 있는 사람은 시범사업에 동원되었다가 사업부문이 물갈이되거나 폐지되면서 쓸려 나가는데,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직을 전전하다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

왜 같은 나이의 남자와 달리 여자는 이직이 불가능한가? 승진 형식의 스카우트가 왜 여성 경력자에게 잘 일어나지 않는가?경력을 키우고 싶은 사람들도 경력이 단절되는 나이가 존재한다는 현실은 한심할 정도로 개선이 더디다. 입사자 성비와 임원진 성비가 사회의 인구 성비와 비슷해지는 날이 오긴 할까?

불쾌함은 불안함과 다르다.
우울과 피곤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어려운 것은 다르다.
분노와 응석은 다르다.
배고픔과 외로움은 다르다.

내가 경험하는 갑작스러운 감정이 있다면 그게 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분노해야 할 때는 분노해야 하며, 나의 분노를 ‘여자의 징징거림’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인식에도 저항해야 한다.

번역가 김명남 씨는 40분 일하고 20분 휴식하는 세션을 하루 여덟 번 반복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트위터에서는 이 방법으로 효과를 본 사람들이 김명남 씨의 이니셜을 따 KMN라는 단위로 부르고 있는데, 방법은 간단하다. 일하는 40분 동안은 전화나 문자도 받지 않고 일에 집중한다. 인터넷을 쓰는 상황이어도 SNS에 접속하지 않는다. 40분 동안 타이머를 맞추고 일을 하다가, 알람이 울리면 일을 멈춘다. 휴식하는 20분 동안은 일과 관련된 게 아니면 무엇이든 해도 된다.

‘40분 일-20분 휴식’ 방법은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데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10년 뒤에도 일할 수 있는 몸 상태 유지를 위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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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달라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Don’t be afraid to be different."

질문하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슬퍼했다는 나 자신조차, 곧잘 말대답하지 말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걸 느끼고 아차 싶을 때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형제여, 그는 10분 동안 내게 눈을 맞추고 아주 조용히 들어주었어. 우리는 땅콩에 대해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고 이윽고 그는 나에게 가도 좋다고 하더군.

나는 이 인도계 미국인에게 마음 깊이 공감하면서, 세관에서의 땅콩에 관한 대화와 언어 시험장에서의 개 눈병에 대한 대화를 생각하면서, 미소 지으며 눈물지으며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읽었다.

그러나 눈치가 너무 많은 지시 사항을 생략하는 준엄한 백지이고 우리가 거기에 뭐라도 적어야 하는 수험생일 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말이란 하는 사람이 바꿔나가야 한다고 믿으며 눈치의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

단어가 내포하는 문화적 맥락이 큰 한국어를 구사할 때는 단 한 마디를 하려고 해도 ‘네’인지 ‘응’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그러니까 나이를 파악해야 한다), 학생인지 사모님인지, 아저씨인지 사장님인지, 나랑 친한지 안 친한지, 지금 내가 아쉬운 입장인지 상대가 부탁하는 상황인지를 순식간에 계산하고 판단해서 "주십시오"나 "줘봐요"를 선택한다. 눈치가 없으면 아주 능숙하게 구사하기가 힘든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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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이데아 님을 사랑한다는 것 말입니까? 사랑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분은 유일하게 나를 부술 수 있다."
블레이젝은 그 이상 분명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부술 수 있다고요?"
"나는 어떠한 순간에도 신념을 지킨다. 또한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반드시 수행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도 내 칼을 더 믿는다."
그는 딱 자기가 말하고 있는 사람 그대로였다. 결혼도 필요해서 했고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도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데아 님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덧붙인 말에 적잖이 놀랐다. 블레이젝은 그런 내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분 앞에서 내 신념은 무너질 수 있고 그분이 원한다면 어떤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일도 할 수 있다. 그분의 명이라면 내 책임과 의무 모두 저버린 채 굴복할 수 있으며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칼을 버릴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식으로 나를 부술 수 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극히 그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랑만이 당신을 부순다는 거군요."
"네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은 네 정의지 내 정의가 아니야." - P291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괴로움은 끝나지 않아. 이 길을 택하면서부터 준비된 수순이지. 그렇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축복에 가깝지.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매번 같은 길을 걸을 의지가 있는 것, 기꺼이 괴로움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증거하는 일이니까."
눈을 꽉 감았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진동하는 이것, 범람하는 이것을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잊고 싶지도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못 박아두고 싶었다.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입을 열어 물었다.
"이 천장화는 언제 그린 거지요?"
"스물세 살.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그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지. 그러고 보면 지금 딱 네 나이로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보이지 않을 끄덕임을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이 흘러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새벽이 온다. 내게는.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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