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데아 님을 사랑한다는 것 말입니까? 사랑하지 않으신다고요?"
"그분은 유일하게 나를 부술 수 있다."
블레이젝은 그 이상 분명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부술 수 있다고요?"
"나는 어떠한 순간에도 신념을 지킨다. 또한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반드시 수행한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도 내 칼을 더 믿는다."
그는 딱 자기가 말하고 있는 사람 그대로였다. 결혼도 필요해서 했고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도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데아 님은 그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덧붙인 말에 적잖이 놀랐다. 블레이젝은 그런 내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분 앞에서 내 신념은 무너질 수 있고 그분이 원한다면 어떤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일도 할 수 있다. 그분의 명이라면 내 책임과 의무 모두 저버린 채 굴복할 수 있으며 수백의 적을 앞에 두고도 칼을 버릴 수 있다. 오직 그분만이 그런 식으로 나를 부술 수 있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극히 그답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랑만이 당신을 부순다는 거군요."
"네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은 네 정의지 내 정의가 아니야." - P291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 괴로움은 끝나지 않아. 이 길을 택하면서부터 준비된 수순이지. 그렇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야. 오히려 축복에 가깝지. 그곳으로 가기 위해 매번 같은 길을 걸을 의지가 있는 것, 기꺼이 괴로움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증거하는 일이니까."
눈을 꽉 감았다.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진동하는 이것, 범람하는 이것을 도대체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잊고 싶지도 그대로 흘려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못 박아두고 싶었다. 나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입을 열어 물었다.
"이 천장화는 언제 그린 거지요?"
"스물세 살.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그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지. 그러고 보면 지금 딱 네 나이로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보이지 않을 끄덕임을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이 흘러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새벽이 온다. 내게는.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