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을 찾아보면 "오랫동안 지내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이라고 하는데 막상 사랑을 논할 때 사용되지는 않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너에게 정이 있다"라고 사랑 고백을 대신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사랑이 끝날 때나 "사랑이 없으면 정은 있어?"라는 이상한 문장에 등장하는 것. 사랑까지는 아니고 애착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또 애착보다는 뭔가 거대하고 끈질긴 무언가를 칭하는 듯한, 그 ‘정’이 진짜 무언지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인터넷에서 한 댓글을 읽기 전까지는.

나는 그 순간 ‘정’이 ‘말로 하지 않는 무언가를 헤아리는 일’과 연관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중략)
정이 쓰일 자리에 무엇이 대신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었으면 한다. 너무 많은 것을 포괄하는 감정은, 그것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을 때 상대를 향해 무기로 쓰일 수 있기에.

언어는 실제로 있었던 일과 나 사이에서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한다. 내가 자주 접하는 언어가 폭행 대신 손찌검을 자꾸 쥐여준다면 내가 아무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어도 쉽지 않을 수 있다. 문장에서 손찌검이 들어오는 자리는 내게 천막으로 가려놓은 웅덩이 같다. 누가 왜 가려놨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래 정확히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발을 디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걸음을 멈추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너 나 무시해?’라는 마음속 외침이 내게 떠넘기는 바깥의 관찰자를, 말 그대로 무시하기로 했다. 대신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름을 붙일 만한 감정을 찾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 사람에게 재차 질문하기로 했다. 나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는 스스로를 탓하거나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다만 그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재고해보았다. 내가 가진 것을 깎아내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를 가엾게 여기기로 했다. 그러자 내가 ‘무시당하는’ 일은 놀랍도록 줄어들었다. 외부에서 오는 진짜 모욕과 내부에서 울리는 자기혐오를 구분할 수 있게 되자 무시란 별게 아니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효용으로 환산할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고 이것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놓은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아무리 비극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도, 더 생각해볼 만한 미진한 감정을 남긴다 해도 그걸 전부 "참 감동적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깃털처럼 상쾌하게 정리하는 인식의 습관은 어쩌다 만들어진 것일까?

다만 인간이 인간에게 말을 걸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으나 상대가 알아 들어줄 것을 기대하고 하는 말’은 참을 수 없다.
(중략)
내가 아무렇게나 말해도 상대가 알아들을 거라는 전제, 더 나아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나를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믿으며 자의적으로 만드는 이상한 생략들, 혹은 돌려 말하다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일이 한국어에는 꽤 많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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