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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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는 이야기의 의의와 역할, 그리고 사라짐의 역사를 말한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지혜였고, 이야기꾼은 그 지혜를 옮겨 심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대가 사람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들고 삶을 정보로 잘게 쪼개면서 이들은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로 인해 집단적 경험도 함께 끊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이 형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이들이 우리 곁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살펴보자.


『이야기꾼 에세이』는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근대 사회에서 ‘이야기’라는 형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소멸했는지를 다룬다. 그는 구전 전통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전하는 역할을 했던 ‘이야기꾼’을 중심에 놓고, 소설의 등장, 정보의 확산, 근대적 개인의 부상이 이야기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글은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 경험의 전달 방식, 기억과 전승의 역할 등을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탐구한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의 정의를 한 사람의 체험을 넘어선 경험을 건져 올려 지혜로 바꾸는 존재라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겪어온 시간의 결을 묶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이들이며, 삶의 무게를 말 한 줄로 정리해 건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설명이 아니라 전승이다. 이야기는 이 전승을 통해 변주되며 살아남고, 듣는 이가 다시 이어 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야기꾼은 바로 이 열린 서사의 흐름을 유지시키는 매개자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 이후 점차 사라진다.



근대 이후 그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경험지의 실종 때문이다. 전략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진지전에 의해, 경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신체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배고픔에 의해, 인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지면서 경험지를 잃어버렸다. 이후 인간은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고 더는 집단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문자로 된 소설은 왜 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벤야민이 보기엔 소설이 이야기꾼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이야기는 공동체가 축적해온 경험을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엮어내는 전승의 형식이지만, 소설은 고립된 개인이 만든 완결된 텍스트다. 서사가 끝나도 계속 변주되지만, 소설은 종이 위에 고정되는 순간 서사가 닫힌다. 이 닫힌 구조는 독자가 끼어들 틈을 거의 남기지 않고, 세대 간에 움직이며 변형될 여지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순환의 회로 바깥에 머무르며, 서사의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근대 이후 인간은 경험지를 잃고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다. 소설은 이 흐름 속에서 점차 정보의 형식에 가까워졌고, 경험의 농도보다는 재현과 설명을 우선하는 장르가 되었다. 이야기가 삶의 잔여물을 지혜로 압축해 건네는 작업이라면, 소설은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해 해석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은 전승의 구조를 수행할 수 없고, 결국 이야기꾼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적 차이는 장르가 세상과 맺는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근대는 경험을 해체했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경험 없이 살 수 없다. 이 모순이 내면에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 삶은 정보로 가득한데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적 경험을 갈망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정보는 즉각 사라지지만 경험은 시간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시대이다. 바로 이 공백이 다시 열린 서사를 불러들이는 힘이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잃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구조를 찾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서사가 제공하는 작은 질서와 위안을 무의식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이런 결핍은 결국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요구가 닿은 자리가 바로 웹이라는 공간이다. 웹 소설은 경험 그 자체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거의 완전하게 복원했다. 외전 요청, 다음 회차의 가능성, 댓글로 이어지는 참여는 독자가 서사의 회로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방식이다. 근대가 지워버린 순환하는 경험의 형식이 여기서 기묘하게 되살아난다. 웹 소설이 주는 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현실에서 사라진 감각을 대신 체험하게 하는 대체 경험성이다.


재미는 껍데기일 뿐이다. 독자는 웹 소설을 통해 좌절–보상–성장–위기 같은 감정의 리듬을 반복적으로 통과하며, 잃어버린 경험의 흐름을 감정의 회로로 흉내 낸다. 현실이 더 이상 경험을 축적하게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웹 소설은 이야기의 잔해를 감정의 패턴으로 모방해 살아남게 만든다. 이 반복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오래된 충동이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비틀린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비틀린 흐름 속에서라도 다시 경험을 되찾으려 몸을 기울인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충동은 결국 벤야민이 애도했던 자리를 다시 불러낸다. 이야기꾼이 사라진 시대에 웹은 ‘이야기의 형식’을 되살렸고, 그 형식은 셰에 라자드가 밤마다 이어가던 아라비안나이트의 구조와 닮아 있다. 끝이 열려 있고, 다음 이야기가 가능하며, 듣는 이의 개입을 허용하는 서사. 경험의 깊이는 아니지만 경험의 움직임을 다시 작동시키는 방식. 웹 소설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의 서사는 그 오래된 구조를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되살려 새로운 회로를 만든 것이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근대가 이야기꾼을 잃고, 사람들이 더 이상 경험을 전승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애도한 것은 바로 그 단절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떠난 뒤 웹으로 옮겨가 감정의 리듬을 반복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이어붙이고 있다. 이야기꾼은 죽었어도 이야기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란 형식보다 욕망이 먼저였고, 그 욕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레 귀환했다.


#이야기꾼에세이

#발터벤야민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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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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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는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자신 있게 자신의 삶에서 완벽하게 스스로 시나리오 작가, 감독, 주인공을 모두 소화하고 있을까? 얕게 생각한다면 여기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책을 읽은 후에는 아무도 여기에 'Yes'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표지의 귀여움과는 달리 마지막 반전에서 뒤통수를 맞으면서 독자는 자신의 인생을 리와인드 하게 된다.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줄거리는 여배우가 되어 첫 주연을 맡은 나을에게 학폭 증언 사례가 터지면서 시작한다. 학창 시절 나을은 아버지가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그녀 앞에 시우라는 예쁜 아이가 전학을 오게 되고 서로 친하게 지낸다. 둘의 엄마인 소영과 하영 또한 학창 시절부터 친구이다. 그러나 나을의 잘못에 대한 벌을 시우가 받으며 시우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각자의 삶에 크나큰 비밀을 품고 있는 그녀들의 얽힌 인생은 결말에서 크나큰 반전을 이룬다.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는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건 연기하는 일이고, 연기하는 동안 우리는 그 대본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이를 말하기 위하여 전면에 나을을 내세운 뒤, 그녀의 엄마 소영과 친구 하영, 그리고 하영의 딸 시우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이 독백의 묘미는 모두 다른 나이 대의 위치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소설은 네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지만, 결국 하나의 인격이 시대와 이름을 바꿔가며 스스로를 연기하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그럼 먼저 등장인물들의 역할부터 살펴보자. 모든 사건의 기원인 하영과 소영은 학창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서로에게 의지하고 집착하는 관계가 된다. 처음엔 완벽하게 두 명의 인물로 느껴지지만 페이지가 넘어가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이들은 외형만 다를 뿐, 한 인간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통제하려는 나와 보호받고 싶은 나로서의 두 욕망의 충돌로 읽힌다. 소영은 자기 불안을 다스리려는 방식으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하영의 경우는 더욱 복잡하다.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몰린 상태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소영에게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딸을 살리기 위한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하여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려고 작정한다. 작품 속 주인공이 손가락을 하나 잘라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그녀가 되기 위하여 자신도 동일한 행동을 할 정도로. 이런 그녀의 행위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구원을 얻기 위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인 부분인 고등학교 3학년 때 똑같이 임신하여 같은 나이의 딸을 낳는 설정은 단순히 개연성이 없다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개연성의 파편들이 오히려 하나의 인물이라는 해석으로 수렴된다. 이는 표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서로의 얼굴이 겹쳐 통과되어 하나가 되는 장면에서. 결국 소영과 하영은 자아의 욕망이 서로를 미러링 하며 부딪히는 내면의 전투가 아닐까? 그렇기에 서로를 소름 끼쳐 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상대의 소름 끼치는 실체를 알아도 같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다음으로 나을과 시우는 모성 세대가 남긴 내면의 분열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복하고 정화하는 인물이다. 이 둘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겪는 경험은 그녀들의 어머니인 소영과 하영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시우의 경우는 시나리오 속의 여주인공의 삶을 훔친 엄마 하영의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타인의 시선 속 나’로 살아간다. 그러나 나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삶에서 시련이 닥쳐오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타인의 시선, 시간의 통증을 견디며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자아로 남는다.



사실 작품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이는 나을이다. 그녀의 위치였던 학폭 사건의 희생자도, 스타의 자리도, 사랑마저도 모두 시우에게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을은 끝내 타인의 서사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이, 남의 말이, 남의 행동이 규정한 각본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대에 남아 있는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아마 대부분 이런 상황에 닥치면 "그래서 어쩌라고?"이지만 나을이 보여준 것은 "그럼에도 산다"였다.



이것이 바로 이전 세대가 서로를 통제하고 복제하며 누가 더 주인공인가를 다퉜다면 나을은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이 선언이 바로 타인의 시나리오에서의 삶을 벗어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너에게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도 이런 초연함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견뎌낸다. 플라톤적 수용의 경지를 넘어, 존재의 시간성을 인정하며. 역설적으로, 그녀가 타인의 각본을 인정한 순간 비로소 자기 각본이 생겨버린 순간인 셈이었다.


결국 소영은 통제와 복제, 자기 파괴로, 하영은 믿음과 몰입, 자기 상실로, 시우는 욕망과 회복, 자기 초월로, 나을은 수용과 지속, 자기 확립으로. 결국 이 넷을 한 인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허구의 과장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바꿔가며, 타인의 시나리오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사랑하고, 통제하고, 무너지고, 견디며 같은 욕망을 반복한다. 소영이 하영이고, 하영이 시우이며, 시우가 나을인 것은 이들이 닮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런 순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의 남의 시나리오에 따른 삶에 구속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타인이 건네는 격려 한 마디에 사로잡힘마저도 엄밀히 말하면 타인의 시나리오로 둔갑하게 됨을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한번 물어보려고 한다. 당신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여기에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없는 이라면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모든시간이나에게일어나

#김나현

#은행나무

#은행잎2기

#은행잎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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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신
리즈 무어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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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이다. 이 작품은 펜테우스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옮겨와, 스스로 대자연의 신이 되고자 한 피터 반라 가문에 내린 대자연의 응징을 다룬다. 겉으로는 실종과 추적의 스릴러처럼 흘러가지만, 그 긴장감 속에는 여성의 삶을 옭아맨 시대의 폭력이 숨겨져 있다. 리즈 무어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직접적인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감추면서, 오히려 더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오만과 여성의 상처를 드러낸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피터 반라 가문의 딸 바버라의 사라짐으로 시작된다. 이 가문은 피터 반라 1세가 숲을 매입해 꼭대기에 집을 짓고 ‘에머슨 캠프’라 이름 붙인 곳에서 자신들만의 성을 세우며 역사를 시작했다. 현재는 3세가 그곳에 살고 있으며, 4세였던 베어는 어린 시절 숲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들을 대신하듯 태어난 딸이 바로 바버라다. 첫아이를 잃은 앨리스에게 다시 닥친 두 번째 상실, 과연 이 아이들을 사라지게 한 것은 누구이며, 왜 10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일까?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큰 틀에서 세 가지 축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째, 그리스 신화 펜테우스의 서사 구조를 따라 드러나는 인간의 오만과 그에 대한 대자연의 응보. 둘째, 오로지 절대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여성들의 상처와 침묵 속에 깃든 페미니즘의 목소리. 셋째, ‘에머슨 캠프’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즉 자기 신뢰를 말한 철학자의 이름 아래 정반대의 삶을 이어가는 왕국의 사람들이다. 이제 각각의 이야기를 조금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자.



먼저 신화적 서사를 따라 드러나는 인간의 오만과 그에 대한 대자연의 응보부터 살펴보자. 작품의 원제에는 숲을 뜻하는 단어 뒤에 복수형 S가 붙어 있다. 이는 한 구역의 그것이 아니라, 모든 숲, 즉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아우르는 대자연 전체를 가리킨다. 저자는 그 단 한 글자 S로 숲의 규모를 확장하며, 제목 속에 이미 세계의 스케일을 담아두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진정한 숲의 신과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이라는 두 힘이 대립하는 신화적 무대로 기능한다.



작품 속 신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말하는 존재처럼 대자연 그 자체를 뜻한다. 그 대척점에는 반라 가문이 있다. 피터 반라 1세는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모두의 숲을 돈으로 사들여 자신만의 영역으로 바꾸고, 그 위에 성전을 세운다. 길도 차도 없는 깊은 숲속에 세운 그 집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켜, 그의 오만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반라 2세와 3세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사실상 자신의 노예로 삼으며, 지배와 징벌만이 존재하는 테바이로 완성한다.


이 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름이다. 단 한 명의 남자 후손만 낳는 룰을 암묵적으로 수행하며, 그 남자 후손의 이름은 모두 피터 반라이다. 1세, 2세, 3세, 4세. 이 장치는 이들을 모두 한 인물, 즉 펜테우스로 묶는다. 이들은 외부에서 돈을 벌어와 그들의 성전에서 권위를 세운다. 그들의 집에서 일하지만 단 한 번도 현관을 통과해 본 적 없는 일꾼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파티에 초대해 이용한 뒤 존재를 지우는 일, 존재의 지움을 당하는 아내까지, 그 모든 행위가 그들이 세운 신전의 윤리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신에게 오로지 복종하는 존재로 재창조되는 그의 아내 앨리스는 무려 열두 살이나 많은 남자인 피터 반라 3세와 결혼한다. 앨리스에게 그는 가슴 두근거림이었지만, 그에게 앨리스는 외부의 명성을 위해 옆구리에 걸기 좋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집안에 큰 피해를 주고 아들을 잃은 뒤 무너진 아내와의 이혼 대신 바람을 택하는 피터. 그에게 이혼은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처음부터 관계가 아주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신혼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가스라이팅을 위한 초반의 러브 밤(love bombing)에 불과했다. 약 2년간 이어진 그의 러브 밤은 아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퍼붓던 데메테르를 오직 피터만 바라보는 메데이아로 바꾸어 놓는다. 이후 남편은 폭군으로 변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잃고 복종만 할 뿐이다. 모든 윤리를 저버린 남편의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시선만 돌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앨리스와 목소리를 잃은 다른 여성들은 당시(1950~70년대)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성인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피터 반라 4세인 베어의 실종 이후 대용품으로 태어난 바버라. 그리고 반라 가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입이 막힌 테시 조까지. 그러나 이들은 이미 메데이아로 변한 앨리스처럼 지내지 않는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인다. 이들의 모습은 숲의 신의 비호를 받으며 신인 척하는 인간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결과, 바버라는 오빠 베어처럼 또다시 사라지고 경찰이 투입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저자가 깔아 놓은 블랙 코미디이다. 바로 피터 반라가 가장 좋아하는 에머슨의 『독립독행(자기 확신)』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에머슨의 『자기 확신』은 “신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라는 사상이다. 그런데 피터 반라 가문은 이를 “내가 곧 신이다”로 뒤집어 숲을 사유화하고, 그 위에 독립독행과 에머슨 캠프를 세운다. 본래 인간의 내면을 해방시키려던 철학이 권력과 소유의 언어로 변한 셈이다. 이 뒤틀린 신앙심이야말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블랙코미디이다다.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한 끝에 스스로의 피로 제단을 쌓는 이야기다. 저자는 숲이라는 원초적 공간 안에서 오만과 폭력, 구원과 희생을 교차시키며 인간 문명이 감히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그어 둔다. 그 경계선을 짓밟는 순간, 신은 더 이상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가장 잔혹한 얼굴로 되살아난다. 이 책은 스릴러물이지만 오히려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숲의신

#리즈무어

#은행나무

#은행잎2기

#은행잎서재

#스릴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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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 바스티유의 포성에서 나폴레옹까지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5
한스울리히 타머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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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프랑스혁명』은 오랫동안 교과서가 남긴 민중의 자발적 대봉기라는 낭만적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한스울리히 타머는 이 사건을 신화적 이미지를 벗긴 현실로 재구성하며, 권력 다툼과 정치적 동원이 얽힌 복합적 실체를 드러낸다. 자유·평등·박애의 구호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계급 이해와 냉혹한 계산이 부딪힌 전장, 현실의 피비린내 속에서만 살아 있었다. 혁명은 이상을 실현한 순수한 열망이 아니라 이해관계와 이념, 야망이 교차하는 대규모 정치 실험이었다.


『프랑스혁명』은 독일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타머가 대변혁의 10년을 압축적으로 탐구한 개론서이다. 그는 바스티유 함락부터 나폴레옹 집권까지의 정치·경제·문화를 간결하면서도 정밀하게 다루며, 짧은 분량 속에서도 복잡한 흐름을 날카롭게 정리한다. 타머의 문장은 학술적이면서도 서사적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단순한 연대기를 넘어 항쟁에 덧씌운 신화적 이미지를 벗기고 현실의 결을 드러내는 치밀한 분석을 선사한다. 혁명의 폭발과 변주, 그 사이사이의 인간적 욕망까지 촘촘히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은 늘 민중의 위대한 봉기로 요약되어 왔다. 그러나 한스 울리히 타머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 신화는 금세 벗겨진다. 항쟁은 굶주린 농민의 순수한 봉기가 아니라 왕권을 둘러싼 귀족과 부르주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됐다. 세력 확장을 위해 지식인과 언론이 민중을 선동했고, 처음엔 단순한 몸집 불리기로 동원된 시민과 농민이 집회와 팸플릿 속에서 변혁의 주체로 변해 갔다. 타머는 이를 정치의 원시적 실험실이라 부르며 권력의 언어가 군중을 흔드는 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혁명의 동력은 시간이 흐르며 위에서 아래로 이동했다. 1792년 이후 상퀼로트와 농민은 독자적 분노를 폭발시켜 의회를 압박했고, 그 격렬한 움직임은 속도를 앞당겼다. 귀족 간 대립에서 출발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시민과 농민이 정치에 직접 참여했다. 지도층은 이를 억누르려 했으나 거리 시위와 자발적 조직의 힘을 꺾지 못했다. 타머는 이 변화를 항쟁의 진정한 심장으로 지목하며 민중 없는 혁명은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분노를 가장 빠르게 달군 것은 언제나 식탁의 빵이었다.



실제 맥박은 경제였다. 국가 부채와 세금 불평등, 빵값 폭등은 봉기의 불씨였다. 특히 1794년 풍작으로 곡물 가격이 안정되자 민중의 급진성은 잠시 누그러졌고, 흉작이 닥치면 거리의 함성은 다시 고조됐다. 경제 상황은 봉기의 시작뿐 아니라 강도와 속도를 조절한 실질적 동력이었다. 저자는 곡물 가격과 정치 폭력의 상관관계를 사례로 입증하며, 혁명의 열기가 언제나 식탁의 빵과 직결되었음을 짚는다. 그들은 허기를 달랜 뒤 항쟁은 삶의 표준과 시간을 새로 짜기 시작한다.



그래서 혁명은 정치·경제 제도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달력을 새로 만들며 언론과 출판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거리의 축제와 의례는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려는 실험이었고, 상징과 의례는 개개인의 시민을 하나의 민중 집단으로 묶는 데 결정적이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달력 속에서 시간을 다시 세고,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다. 문화는 변혁의 또 다른 전선이자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설계하는 창조의 현장이었다. 이런 집단적 무대 앞에서 개인의 초상은 자연스레 흐려진다.



바로 그 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라진다. 타머는 개인의 비극보다 구조와 제도 붕괴에 초점을 맞추며 대변혁을 특정 인물의 드라마가 아닌 집단적 사건으로 그린다. 왕비의 화려한 이미지를 지워낸 선택은 그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드러낸다. 개인 영웅담 대신 무수한 얼굴 없는 시민을 전면에 내세운 시선은 역사가 권력의 초상보다 집단의 힘으로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같은 맥락에서 루이 16세도 개인이 아닌 체제의 표정으로 등장한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한 인간의 몰락이 아니라 절대왕정 자체의 장례식이었다. 단두대의 칼날은 구체제의 죽음을 알리고 시민이 주권을 쥔 새로운 질서를 세계에 선포했다. 그의 체포와 재판, 공개 처형은 왕이 아닌 체제가 처벌받은 정치적 의례이자 근대 시민정치의 탄생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저자는 단두대를 근대 정치의 최초의 무대로 규정하며, 권력의 얼굴이 어떻게 공포와 의식으로 재편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면을 지나 그들의 발자취는 곧 오늘의 권력 교체 방식과 직결된다.



저자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프랑스혁명』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정치 현장처럼 읽힌다. 어느 정권도 완전히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될 수 없고, 권력의 욕망이 커지면 균형은 무너진다. 과거엔 그 균형이 피와 살로, 오늘날은 투표와 제도적 교체로 조정된다. 세계 곳곳에서 폭력적 항쟁이 여전히 일어나지만, 민주국가의 선거 또한 투표로 하는 혁명이다. 정치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한쪽으로 기울면 스스로 반대편을 불러 중용을 되찾는다. 내 편이 영원히 옳을 수 없고, 그 올바름을 고집하는 순간 이미 반대의 힘이 자라난다.



이러한 권력의 순환과 시민의 역할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유·평등·박애는 18세기에 묶이지 않는다. 언론의 힘, 시민의 참여, 권력과 민중의 긴장은 지금의 민주주의에도 계속된다. 항쟁이 남긴 제도와 사상은 오늘 우리의 불평등과 갈등을 비추는 거울이며, 권력의 순환과 민중의 저항이 반복되는 현실을 성찰하게 한다. 저자가 그린 혁명은 과거의 박물관이 아니라 현재의 광장에 던져진 질문이다.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대답을 찾고 있다.



한스울리히 타머가 그린 『프랑스혁명』은 결코 끝난 역사가 아니다. 권력의 불평등과 시민의 저항, 경제가 좌우하는 민중의 분노는 오늘도 되풀이되며, 항쟁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솟구칠 수 있는 세계사의 영속적 흐름이다. 저자는 이 신화적 이미지를 벗긴 현실을 통해 투표가 혁명의 언어가 된 지금도 우리가 그 실험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일깨운다. 민주주의의 불안정한 뿌리와 권력의 순환은 여전히 반복되고, 과거의 피와 불은 투표의 잉크로 바뀌었을 뿐 시민의 저항은 새로운 얼굴로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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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을유세계문학전집 143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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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번에 을유문화사에서 인간 심연의 밑바닥을 훑은 문학,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을 출간했다. 포는 탐정 문학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여러 겹의 인간 심리를 벗겨 가장 안쪽의 추악함을 드러내지만 결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추악함을 토대로 가장 인간적인 이해를 끌어내며 읽는 이에게 소름 끼치는 공포와 함께 묘한 따스함을 남긴다. 덕분에 그의 단편들은 공포와 연민, 냉철한 추리와 시적 광휘가 한데 어우러진 독특한 고전으로 자리한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은 총 열세 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이성의 미스터리, 곧 추리의 묘미가 살아 있는 『도둑맞은 편지』, 『모르그가 살인 사건』, 『네가 바로 범인이다』, 『황금충』이고, 다른 하나는 무의식의 심연을 파고든 심리·광기·공포의 작품들이다. 후자에 속한 이야기들은 괴이한 존재가 튀어나와 놀라게 하기보다, 인간 심연의 밑바닥을 훑은 문학이 주는 섬뜩한 공포를 전한다. 이를 두고 샤를 보들레르는 자신이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이미 포의 작품 속에 있다고 고백했다.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은 그동안 포의 작품을 대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각종 은유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이슬람·유대교의 신, 문화적 양식, 다른 문학에서의 인용 등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보통 작품 전체의 해설은 있으나 이런 세세한 주석이 빠진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뒷면에 꼼꼼하게 첨부되어 있어 방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초심자도 포의 세계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지난번에 읽은 책에서 소름 끼치는 복수극을 그린 『아몬티야도 술통』을 후기로 다뤘기에 이번에는 『리게이아』의 초현실적 열병과 『모르그가 살인 사건』의 이성적 해부를 다루면서, 포가 어떻게 인간의 양 극단을 끌어올렸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극점을 비춘다. 하나는 죽음과 집착이 빚는 몽환적 열기를, 다른 하나는 차갑게 사건을 해부하는 이성의 칼날을 보여준다. 포는 이처럼 꿈과 논리, 광기와 추리를 넘나들며 인간이라는 미로를 끝없이 탐색한다.



먼저 『리게이아』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은 광기와 집착, 부활과 영혼을 둘러싼 초월적 이미지가 핵심이며 문체가 유려해 꿈결 같은 환각을 느끼게 한다. 리게이아는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 세 자매 중 한 명의 이름으로, 세이렌은 바다에서 뱃사람을 유혹해 파멸로 이끄는 노래를 부르는 존재다. 이름의 어원은 맑고 울림 좋은을 뜻하는 ligys와 여성을 뜻하는 aia가 합쳐진 것으로, 죽음을 부르는 매혹적 노래와 영혼을 사로잡는 음성이 이미 제목 〈 Ligeia 〉에 겹쳐 있다.



리게이아의 줄거리는 주인공인 나의 아내인 리게이아의 죽음을 겪은 후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던 중 로위나와 재혼을 한다. 본처의 눈동자는 검은색이며 재혼한 로위나의 눈동자는 파란색으로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인지 나는 로위나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그에게 벌을 주려는 듯, 로위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앓아누워 숨이 붙었다 끊어졌다를 반복한다. 이렇게 아픈 아내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여전히 죽어서 세상에 없어진 전처만을 떠올리고 있는데 로위나가 눈을 뜬다. 검은색 눈동자로.


사실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 주인공의 끝없는 애착과 리게이아의 삶을 향한 집요한 집착이 끔찍하게 묘사된다. 한 생명체가 삶과 죽음을 오가는 경계와 그때의 주인공 상태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모호하게 만들어, 환상 문학의 선구자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독자로 하여금 실감하게 한다. 초현실적 열병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흔들며 드러나는 죽음과 부활의 집착은 겉으로는 병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우리 마음 밑바닥에 오래 잠든 본능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모르그가 살인 사건의 줄거리는 밀실에서 끔찍한 이중 살인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이 출동한다. 여러 목격자들의 말을 들으니 한 명의 프랑스인과 국적을 알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 사람들과 경찰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던 상황이기에 범인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이때 뒤팽이 경찰서장의 허락을 얻어 사건 현장을 살펴본 후 가볍게 범인을 찾아낸다. 마치 셜록 홈스처럼.


이 작품은 뒤팽의 냉철한 추리가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포의 첫 탐정소설이다. 흔히 『모르그가 살인 사건』을 현대 추리 소설의 출발점으로 부르는데 사건의 정교한 범행 동기와 치밀한 단서 배치, 그리고 이를 해부하는 뒤팽의 논리 전개까지 후대 탐정물이 따르는 거의 모든 기본 요소가 이미 이 한 편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관찰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이라는 핵심 구조는 셜록 홈스에서 아가사 크리스티까지 이어지는 모든 고전 추리의 뼈대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에는 경찰과 뒤팽, 범인을 잡는 핵심 인물 사이에 숨 막히는 추리 대결이 펼쳐진다. 뒤팽은 경찰이 미처 보지 못한 현장의 세세한 단서와 상식을 벗어난 가능성을 차근차근 짚어가며, 단순한 관찰을 치밀한 논리로 엮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다. 특히 범인의 정체가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순간, 추리 과정 자체가 하나의 서스펜스로 작동하며 독자를 끝까지 긴장시킨다. 포는 이 작품에서 범죄의 공포보다 이성이 어떻게 진실에 다다르는가라는 지적 쾌감을 중심에 두어 독자들에게도 동일한 전율을 선사한다.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한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은 인간 심연의 밑바닥을 훑은 문학의 정수다. 앞서 살펴본 『리게이아』의 몽환과 『모르그가 살인 사건』의 냉철한 추리뿐 아니라 『아몬티야도 술통』의 소름 끼치는 복수, 『검은 고양이』와 『고자질하는 심장』의 광기와 죄의식, 저자 자신이 최고의 탐정 소설로 꼽는 『도둑맞은 편지』까지, 포는 이성의 빛과 광기의 어둠을 동시에 끌어올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섬뜩하고 매혹적인 세계를 여름의 끝자락에서 꼭 느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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