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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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시간적으로는 일본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떠나 독일에 정착하고 미국에 거주하기까지의 여정을, 정체성적으로는 이방인으로서, 두 나라 언어를 넘나드는 비인간적인 글쓰기의 실험자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의 경험과 사유를 담고 있다. 그녀는 글쓰기와 번역, 현대 사회의 문제의 뿌리, 자신을 ‘영혼 없는 작가’라 부르는 이유를 밝힌다. 비틀린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문장은 언뜻 난해하지만, 곱씹을수록 철학적 공명을 일으켜 강한 공감을 불러낸다.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그녀가 겪은 유럽의 첫 이미지가, 2부 부적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사회적 문제, 글쓰기에 관한 생각과 작가로서의 정체성, 3부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번역과 번역가의 마음가짐을 그리고 있다. 모든 글에서는 국가와 국가, 의미 언어와 소리글자, 원본 텍스트와 번역 텍스트 사이 경계에서 바라본 시각이 담겨 있으며 이런 내용이 사소한 물건부터 신체를 끌어와 말하고 있다.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큰 틀에서 보자면 세 가지 축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다름의 축, 두 번째는 글쓰기의 축, 세 번째는 번역의 축이다. 이후 그녀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축으로 통합할 수 있으며 이 세 축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제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각 축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언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널리 알려진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냈으며 글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넓고 깊게 다루고 있는 첫 번째 다름의 축부터 살펴보자. 



다와다 요코가 발견하는 다름은 겉으로는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언어의 억양, 단어의 성별, 발음의 중첩 같은 작은 차이 속에는 사고와 문화 전체를 뒤흔드는 균열이 숨어 있다. 그녀는 이 다름을 낯선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양쪽을 이해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로서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 이런 다름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하며, 다와다의 글쓰기는 바로 이 균열, 그 별것 아닌 듯한 다름에서 출발한다. 이는 작게는 한 사람의 정체성에서부터 넓게는 세계의 문제로까지 파급된다.



필립 K. 딕의 눈동자는 알고 있다(The Eyes have it)에서 딕이 같은 언어 안에서의 오해를 보여줬다면, 다와다는 서로 다른 언어가 뜻밖의 공통점으로 만들어내는 오해를 파고든다. 동일한 발음인 나스(일본 : 가지, 독일 : 축축하게 젖다)에서 오는 오해, 의미를 모르기에 소리만으로 언어를 감각적으로 피부로 느끼는 괴셰넨에서 개인이 느낀 이해 방식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사전 마을 챕터로 옮겨 오면 사회적 언어가 권력의 언어로 변할 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동화 같은 분위기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언어 속에서 발견한 다름은 곧 두 번째 축인 그녀의 글쓰기 방식과 맞닿아 있다. 경계적 삶 속에서 언어의 혼란과 의미 없는 소리를 모국어 화자보다 더 섬세하게 감각한 그녀는 언어를 의미와 소리로 나눈다. 그녀의 글쓰기는 소리에 근거한다.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떨림이기에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영혼 없는 귀신의 것으로 불린다. 그녀가 스스로를 ‘영혼 없는 작가’라 명명하며, 이런 이유로 비인간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목에는 또 다른 의미가 겹친다. 그녀는 글쓰기를 설명하기 위해 일곱 어머니 이야기를 끌어온다. 사람들은 흔히 태아와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 보며, 그 몸속에 고유한 원본 텍스트가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담아두는 방을 ‘영혼’이라 부른다. 그러나 다와다는 태아와 아기를 동일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본 텍스트 또한 존재할 수 없고, 그 방으로서의 영혼도 없다. 『영혼 없는 작가』라는 제목은 바로 이 부정에서 비롯된다.



일곱 어머니의 비유는 곧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녀의 시선을 보여준다. 궁극적 근원은 '어머니 대지'라는 물리적 모성이며, 인간은 그 위에 언어라는 껍질을 입혀 존재를 기록한다. 그러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존재는 소멸을 향함을 이 과정을 ‘어머니점’에서 설명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 어머니는 ‘어머니조차없이외로이’인데 존재의 최종 근원이 외로움이며, 언어는 이 외로움에서 태어나고 언어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외로움만 남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글쓰기는 취미나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이다. 



마지막 세 번째 축은 번역가로서의 입장이다. 이때 그녀는 일반 번역가와 달리 경계 위에 선 번역가로 자리한다. 그녀가 말하는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이격자' 챕터에서 보여주듯 번역은 보는 것의 해석과 듣는 것의 감각, 즉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침투까지 포함한다. 그녀는 언어를 단순한 개념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신체 전체로 겪어내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의미보다 신체의 반응이 먼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번역자는 여전히 “의미 ↔ 의미”를 기준으로 옮기지만, 원문 화자가 실제로는 “소리 ↔ 몸의 반응”으로 경험한 경우 번역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번역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감각까지 완벽히 번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 지점을 그녀는 “언어의 구멍”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구멍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틈새를 헤집을 수 있는 힘은 그녀 자신이 바로 언어의 경계에 선 사람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비인간적 글쓰기를 하는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그녀의 정체성, 즉 경계에 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일상의 사소한 물건과 현상에 대입해 언어적 비틀림으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그녀의 언어 코드를 인지하지 못하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장을 한 줄씩 해독하며 깨닫는 순간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몸을 던진 듯한 압도적인 경험이 찾아온다.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에 매혹되기보다 다름·글쓰기·번역의 세 축을 따라가며 스스로 경계에 선 감각을 체험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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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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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그의 사후에 자비네 아이켄로트, 에르하르트 쉬츠가 숲에 관련된 그의 산문과 시를 엮은 책이다. 주제는 동일하게 숲으로 귀결되며 한 제목 당 글의 길이는 매우 짧다. 그 이유는 그가 매일 숲으로 산책을 하고 난 뒤 느낀 점을 일기처럼 적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다양하지만 그의 감각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닌 느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독특함이 있다.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형 카를 발저의 삽화와 동생의 글이 어우러져 감각적 깊이를 더한 작품이다. 자연과 산책, 일상에 대한 에세이와 시를 모은 이 책에서 작가는 숲을 통과하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다. 줄거리보다는 관조와 감각, 탈속의 기운이 중심을 이루며 독자는 매 글마다 그의 산책자적 내면을 함께 걷듯 따라가게 된다. 작고 조용한 것들을 주목하는 그의 글은 사소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작중에 등장하는 단편의 제목이다. 모든 작품의 주제는 숲을 산책하는 저자이며, 각각의 글은 그가 매일 산책을 하며 느낀 점에 무한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나 사람은 실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으며, 곳곳에서 신화적 은유가 등장하였다. 가장 큰 예가 바로 아래의 문구이다. 이때 등장한 여인은 생명과 죽음, 치유와 재생, 출산과 포용의 상징인 대지의 여신을 상징으로 읽힐 수도 있다.



조금 더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그 여인은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무의식, 죽음, 재탄생으로 향하는 공간으로의 은유인 지하의 중재자로 볼 수도 있다. 그 외에 야생의 수화자인 숲의 정령으로도 읽히는 등 매우 복합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주변의 몇 가지 문장이 있다. 첫 번째로는 몸을 숙여 두 다리에 입을 맞추었다는 부분과 순간 다정하고 환영하는 강물이 행복한 내 몸 안에서 흘러갔다고 하는 양립하는 문장의 화법 차이이다. 인간의 능동적 행동에서 자연에 흡수된 후 수동적 감각의 서술어가 대표적이다.


이후로 각자의 고요한 황홀경을 즐기기 위해 한참을, 정말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에서는 영적인 상태로의 돌입 및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약물에 취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닌 자연과의 일체로 인하여 신비로움에 취함을. 그 외에 반짝이는 별, 크고 신성한 달 등에서는 우주적 질서와 생명, 그리고 아르테미스의 속성을 은유하기도 한다. 즉, 그가 말하는 여인이나 아이 또한 숲이며, 지구의 증언자 또한 하이덴슈타인(고대의 사람으로 지구의 깊은 시간을 기억하는 자를 의미)이라는 이름의 바위로 의인화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언어적 상징성이나 은유를 찾기보다 직접 눈을 감고 그가 말하는 숲에 들어가서 느껴야만 한다. 그가 들어간 숲은 언제나 고요하고, 웅장하지만, 포용성이 강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심리에 따라 그곳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곳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도, 자신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치유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쉽게 변하지 않고 아주 느리게 변하는 곳이지만, 그곳에 입성하는 자의 심리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곳임을. 이런 곳에 있는 모든 것은 지구의 태곳적 시절부터 있었던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기억하는 인류의 고향 같은 공간이라고 발저는 말한다. 한 개인의 고향이 아닌 전 인류의. 특히 그의 초록이라는 컬러에 대한 묘사는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기존의 것을 죽이는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그.


가장 인상 깊었던 제목의 글은 산불이다. 모든 글은 그가 숲으로 들어가 직접 보고 느낀 것, 그리고 그곳에 융화되어 자연과 물아일체가 된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면 산불은 오히려 그가 높은 하늘에서 인간들을 관찰하는 느낌이 강하다. 저무는 태양빛을 압도하는 불타는 숲의 빛깔. 땅에서 불타는 것이 어느 순간 하늘의 그것으로 옮겨간 듯한 느낌. 이를 지켜보는 인간들의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정지된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언제나 잔잔한 그의 이미지를 지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책을 보면 저자가 단순히 글을 쓰기 위하여 산책한 것이 아니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지지 않고 숲으로 달려간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해가 떠있는 낮에만 간 것도 아니다. 그 시간의 흐름에서 그는 매번 다른 것을 느끼고 서술했다. 봄의 생명,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쓸쓸함, 겨울의 허망함과는 거리가 먼 모든 것에서의 생명을.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는 숲을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처럼 대하고 있다. 인간을 낳고 기른 원초적 지구라는 존재로서. 


즉, 태고의 존재와 짧디짧은 한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이 언제나 풍덩 빠지는 곳이 숲이다. 하찮은 존재가 거대한 존재에게 다가가지만 그것에 압도되기보다 그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의 거울이 되어주는 거인으로서의 숲은 경이롭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게 다가온다. 읽다가 당장 저자가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잎이 무성하고 거대한 산으로 달려가고 싶음을 매 페이지마다 달래야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이 많은 책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단순히 초록으로 뒤덮인 자연의 한 공간을 매일 걸은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소임에도 매번 다름을 느끼면서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다독이고 지켜주는 마법 같은 일화를 피톤치드에 취해서 쓴 글이다. 그래서 독자 또한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상의 숲에 빠져 그곳의 분위기에 취해 피부로 느껴야 한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발저식 독법 즉 자연의 감각을 몸에 새기는 독자의 체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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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
김민지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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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김민지 작가의 에세이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는 한 여성이 자신의 이름 외에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살면서 경험한 것과 느낀 것을 담은 책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김민지 작가는 아나운서로 시작하여 붉은 악마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박지성 선수의 아내이다. 덕분에 글로벌한 그녀의 삶과 더불어 확장된 그녀의 시선을 고스란히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함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우리의 시선에 셀럽이지만 지극히 일반적인 그녀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김민지의 에세이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는 삶의 전환을 극적인 사건이 아닌 작은 변화로 보여주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방송국의 긴장감, 육아의 고단함, 사회적 위치에서의 불안 등은 정제된 문장으로 기술된다. 그 문장들은 감정을 부풀리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전달한다. 저자는 학생에서 방송인으로, 방송인을 그만두고 결혼과 육아 그리고  타국에서의 일상과 내면에 대한 기록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서사를.


총 네 개의 장을 통해 10대 후반부터 20대의 치열한 취업 전쟁, 이후의 일터에서의 경험, 가족 안에서 딸, 아내, 엄마로서의 행복과 고충, 낯선 타지에서의 심리적 불안감 등을 다양한 그녀의 일상을 소개하며 그리고 있다. 자극적인 서사 없이, 가장 일반적인 인간의 삶에 대한 기록에 가까운 이 책은 오히려 그녀의 특별함을 상쇄시킨다. 특히 방송을 떠나 글을 쓰는 시간, 육아 속에서의 침묵, 관계의 압력 아래에서 주체를 유지하는 방식이 담담하게 기술하며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된다.




김민지의 에세이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는 그녀의 역할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역할은 당연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변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나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고 있어 책임의 무게가 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으로서의 그녀, 딸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 엄마로서의 그녀로 총 네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그녀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엄마로서의 모습이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닿은 부분은 딸의 입장과 개인으로서의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다.


특히, 그녀가 어머니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마음을 울렸다. 그녀의 어머니는 예술인으로서 혹독한 안동 김씨 집안의 시집살이를 겪어낸 분이시다. 아마 많은 분이 이 부분을 읽을 때 드라마 낭랑 18세의 시집살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을 것이다. 시집살이로 인하여 나날이 말라만 가던 어머니가 드디어 숨통을 트이게 된 것이 자신의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자식들은 이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옆에서 듣기에도 모진 말을 내뱉는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이기에 매일, 매 순간 함께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이런 그녀가 이제 엄마가 되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읽다가 보면 웃음이 터지는 구간들이 있는데 어릴 적 그녀가 어머니에게 내뱉은 말처럼, 이제 그녀의 딸도 비슷하게 저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그 순간, 과거의 엄마와 현재의 자신이 겹쳐진다. 이 부분을 보면 사람은 누구나 그 자리에서 동일한 상황을 마주해야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사회를 보면 자식이 부모를 이해하는 것을 잘 볼 수가 없다. 어쩌면 이것이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모습이지 않을까? 사는 것이 각박해지면서 비혼 주의가 늘고, 딩크족이 늘었기에 부모와 자식 같의 이해가 줄어든 것이 아닐까? 그녀의 글을 보면 그녀가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것은 역할이 전복되면서부터이다. 이런 점을 보면서 더 이상 아내라는 자리, 엄마라는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없어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세대 간의 이해도가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다음으로 개인으로서의 그녀를 지키는 모습들이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지만 깊은 울림을 주지 않을까 한다. 외부에서 볼 때 셀럽의 삶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녀의 책을 보면서 그 또한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 중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삶에 치여 20대 나이에 대상포진에 걸린다거나, 부족함이 없는 삶일 것 같지만 그 안에서 번아웃이 온다거나 하는 모습 들에서.


이런 그녀가 내놓은 해답은 의외로 특별할 것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타인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서 여행을 하는 것. 여기에 그녀는 한 가지를 더 말한다. 사랑은 할수록 늘어나는 감정이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할애하라고. 솔직하게 말해서 쉽지 않은 말일 것이다. 좋은 대학을 위해서, 좋은 직장을 위해서, 승진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언제나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는 여성의 삶을 보면. 물론 이것은 남성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녀 또한 대한민국에서 남들만큼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의 이런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그녀가 번아웃이 오면서 드디어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는 부분을 보며 독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와 동시에 유명한 축구 선수의 아내가 쓴 책에서 나와 동화가 되는 작품으로 승화하게 된다. 언제나 좋은 게 생기면 가족을 위해 양보하고 노후를 위하여 현재에 언제나 자린고비가 되려고 노력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민지의 에세이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는 셀럽의 삶을 다뤘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겪는 고단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이 담겨 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조용한 언어로 다가와 격려를 건넨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자기 자신을 포함한 주변에 친절과 사랑을 베풀자는 것이다. 삶이 벅차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거나, 자기 안이 텅 빈 듯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이 책 속 문장들이 마음속에 작은 불빛 하나쯤은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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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꽃
제임스 서버 지음, 강무홍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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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원작자가 쓴 그림 동화라는 타이틀에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게 된 제임스 서버의 마지막 꽃이다. 특히 T.S 엘리엇과 E.B 화이트의 극찬이 붙은 책이기에 기대감이 두 배로 치솟았던 책.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두 달이 지난 시점에 출간된 반복된 전쟁을 일으키는 인류의 아이러니를 러프한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단순하게 전쟁 풍자로 인한 음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결말은 희망을 말하고 있어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누구나 읽기에 좋은 책이다.


제임스 서버의 그림 동화 마지막 꽃은 제1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발발한 후 문명의 붕괴가 일어났다. 세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건물, 자연, 예술 작품도. 인간의 위치는 벌레만도 못하게 되었고 개들은 타락한 주인을 버렸다. 순종하던 토끼들은 사람들에게 달려들었으며 책과 그림과 음악이 사라진 지상에서의 사람은 그저 빈둥거리기만 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은 인간들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잊어버렸고 마음속에 사랑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송이 꽃을 발견한 소녀로 인하여 희망이 생기는데...



제임스 서버의 그림 동화 마지막 꽃은 비록 형식은 우화적이고 단순하지만, 폐허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인간 문명과 그것의 반복적 자멸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후 본격적인 전후 폐허 문학의 한 갈래로 볼 수 있다. 전쟁의 고통을 겪고 모든 것을 잃어 인간성 자체를 들이밀 물리적, 정신적 공간이 사라짐을 겪었지만, 망각의 동물답게 모든 것을 잊고 이 과정을 무한 루프로 반복한다는 것에서 리얼리티 폐허 문학보다 더 강렬함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마지막 꽃은 생명의 선이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태에서 소녀에게 발견된다. 그러나 사랑과 희망, 낭만이 모두 사라진 인간들은 소녀의 도움 요청에 모두 무감하게 반응한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둘이서 마지막 꽃을 가꾸고 돌보면서 한 송이를 두 송이로, 두 송이를 꽃밭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숲으로 커지게 된다. 그런 후에야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고, 마음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 모든 것을 전쟁 이전으로 서서히 돌린다.



이 책은 전쟁으로 인한 문명의 붕괴 과정을 비록 우화 형식이지만 놀라울 만큼 리얼하게 그려내어 오히려 더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전쟁은 외부적인 건물과 자연부터 파괴시키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영혼이 담긴 예술뿐만 아니라 스스로 우위라고 여기던 우리의 존재까지 자연에게 공격을 받는 계급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작중에는 그 대상이 개와 토끼이지만 조금만 상상의 나래를 펴면 그 대상의 종류와 행위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마음속에 남은 희망, 사랑까지 사라진 그들은 동물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그들에게 다 시든 마지막 꽃이 나타난다. 이 마지막 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인류에게 주어지는 생명선이 겨우 이어져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의미한다. 모두들 무관심하지만 한 커플의 노력으로 이 희망은 점점 싱싱해지고, 성장하고, 번성하여 온 지구로 퍼지게 된다. 그 결과 인간들은 다시 문명을 재건하게 된다.



이렇게 문명이 재건되면서 사람들은 공동체를 만들고 예술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여기에 서서히 욕망이 깃들기 시작한다. 단순한 개인의 욕망뿐만 아니라 통치자의 그것, 종교인들의 욕심까지. 그 결과 세상은 다시 전쟁터로 바뀐다. 이런 상황의 무한 루프.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저자는 비꼬고 있다. 이 책은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한 후 두 달 후 출간되었다. 그러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일반적인 책과 달리 저자는 마지막 꽃 또한 무한 반복이 됨을 그리고 있다.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우화라기보다 매우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작중에서 말하는 해방을 외치는 자들은 미국 남북 전쟁, 신의 이름으로 불만에 불을 지피는 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진보를 말하며 화약을 드는 자들로 나폴레옹 전쟁을, 문명을 전한다며 무너뜨리는 자들로 각종 식민지 쟁탈전, 체제를 지키겠다며 인간을 버리는 자들로 제1차 세계대전, 평화를 위해 선제공격을 선택한 자들의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야말로 인간의 본성은 어떤 사상이나 이상으로 시작하건 인간은 곧 파괴로 흘러들고 폐허 위에 새로운 문명을 쌓지만 또다시 무너뜨리는 존재이다. 늘 그럴듯한 말을 입에 물고 신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문명의 이름으로 시작한 전쟁은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달리 언제나 무너진 거리와 그 위에 피어난 마지막 꽃 한 송이만 남길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저자는 이 전체가 반복된다고 하지만 과연 시들었지만 다시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마지막 꽃이 우리에게 언제까지 주어질 것인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원작자이기에 더욱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내용을 전한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라 세계대전의 문제점을 비꼬면서도 피해자인 지구 위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쓴 글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반 무기뿐만 아니라 생화학 무기까지 더욱 날이 벼려진 지금 우리에겐 더 이상 마지막 꽃이 남아 있을까? 지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며 먼 과거에 쓰인 이 책의 경고를 다시금 떠올려야 할 때이다.


제임스 서버의 그림 동화 마지막 꽃은 하나뿐인 딸에게 그녀가 살아갈 세상이 더 좋아지리라는 애틋한 바람을 담아 쓴 책이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그림이 아닌 러프한 연필 선으로만 그려져 더욱 심리적으로 절실하게 다가온다. 현실적으로 벼랑 끝에 서 있는 작금의 시대를 사는 눈으로 볼 때 최대한 많은 이들이 읽어야 할 고전 그림책이 아닐까 한다. 이미 고향인 별로 돌아간 작가의 평화에 대한 호소를 직접 피부로 느껴보길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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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6
찰스 디킨스 지음, 이세순 옮김 / 빛소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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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빛소굴에서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한 고아 소년이 갑작스레 신분 상승의 기회를 부여받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잃는 비극적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녔지만 계급의 허상, 왜곡된 감정 교육, 인간관계의 단절과 복원, 그리고 도덕적 성숙이라는 묵직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던진다. 단순히 과거 영국 사회의 이야기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도 날카롭게 파고드는 고전 문학이다.



고아 소년 핍은 어느 날 무덤가에서 탈옥수를 만나 음식을 건네준 일을 계기로 뜻밖의 후견인으로부터 신사가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가며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자 한다. 겉으로는 상류사회로 진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핍은 자신이 무엇을 쫓았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잃었는지를 깊이 반추하게 된다. 결국 핍은 한때 부끄러워했던 과거와 관계를 다시 돌아보며, 진짜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희대의 이야기꾼 찰스 디킨스의 입담 덕분에 스토리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그의 글에서는 당시 영국의 시대 상황을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어 현대의 독자를 빅토리아 시대로 데리고 간다. 특히 단순한 서민의 삶이 아닌 상류층과 그들에게 기생하여 사는 범죄자, 그리고 최하층민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어 매우 입체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이야기의 처음은 아이인 핍의 목소리로 시작하고 있어 낯선 배경이지만 거부감 없이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런 핍의 일기와 같은 일화를 통하여 우리는 네 가지 정도 깊은 고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도덕성에 관련된 부분이다. 핍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두려움에 의하여 탈옥한 죄수를 도와준다. 이를 계기로 무사히 그 죄수가 탈옥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핍은 하층민이 꿈꾸던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삶은 풍성해지지만 이때부터 그의 도덕관은 안타까울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핍은 부모님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 다음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를 누나 가저리 부인과 그의 남편 조가 구해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키운다. 그러나 외부적인 모든 것을 얻고 난 후 그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가족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이런 도덕관의 무너짐은 현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가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한 후 자신의 가족을 버리는 뉴스를 통하여. 시대적 간극이 크지만 우리가 이 작품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이다.



두 번째로 이런 그가 인지한 위대한 유산의 개념이다. 처음 자신에게 생긴 재산에 그것을 준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애써 모른 척을 한다. 그러나 도망자 매그위치의 죽음을 통하여 비록 범죄자이지만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낀 핍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화려한 언변,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지만 타인의 진심을 보게 된 핍. 그는 드디어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돈이 아닌 마음의 가치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는 성장이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끝자락에 와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구간이다. 무조건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하여 물질적 가치만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잠시 질주를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빛소굴 출판사에서 지금 이 시기에 먼 과거의 이 작품을 출간하게 된 이유와도 같지 않을까? 여기에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결은 다르지만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하비셤의 전철을 밟게 될 테니까. 자신을 잃기 전 마지막 경종처럼.



세 번째로는 불건강한 가족 간의 영향력에 관한 부분이다. 핍이 마음을 준 에스텔라는 핍의 심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물질적 결핍은 있지만, 가족의 사랑은 풍성한 핍과 물질적 풍성함은 있지만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에스텔라. 그녀는 하비셤이 고통 속에서 키워낸 복수심 속에서 길러진 아이이다. 핍은 이런 에스텔라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감정이 사라진 마네킹에 가까운 인물이다. 주고 싶어도 속이 비어서 줄 게 없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정신병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예소연의 소란한 속삭임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정신병은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되며 이를 다스리지 못할수록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그 고통이 전가된다. 사랑을 나누면 배가 되는 것처럼 고통도 나누면 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한끗차이로 하비셤의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 번째로는 성장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고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과 성장을 동일시한다. 핍 역시 상류층 진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며 외형적으로는 성장해 보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도덕적 기반을 잃었고, 가족과 멀어졌으며, 자신조차 낯설어졌다. 이는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성장의 그늘을 보여준다. 결국 성장이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잃어버린 영혼에서 말하는 몸이 빠르게 달릴수록 영혼은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핍이 외형적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의 내면은 텅 빈 껍데기처럼 비어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적 지위를 좇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셈이다. 그 결과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무조건적인 전진은 오히려 자아를 잃는 지름길이 되며,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 될 수는 없다. 



결국 핍은 무언가를 획득할수록 자신을 잃어간 인물이다. 그를 다시 되돌린 것은 물질도 계급도 아닌 관계와 기억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눈에 보이는 성장보다 내면의 흐트러짐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덕분에 독자는 자연스레 자기 삶의 속도, 감정, 관계를 점검하게 된다. 빛소굴에서 이 고전을 지금 다시 꺼내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의 다음은 핍이 아니라 하비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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