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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1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6
찰스 디킨스 지음, 이세순 옮김 / 빛소굴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빛소굴에서 출간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한 고아 소년이 갑작스레 신분 상승의 기회를 부여받으며 시작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잃는 비극적 여정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은 성장소설의 외형을 지녔지만 계급의 허상, 왜곡된 감정 교육, 인간관계의 단절과 복원, 그리고 도덕적 성숙이라는 묵직한 질문들을 정면으로 던진다. 단순히 과거 영국 사회의 이야기를 넘어 지금 우리 삶에도 날카롭게 파고드는 고전 문학이다.
고아 소년 핍은 어느 날 무덤가에서 탈옥수를 만나 음식을 건네준 일을 계기로 뜻밖의 후견인으로부터 신사가 될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가며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자 한다. 겉으로는 상류사회로 진입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핍은 자신이 무엇을 쫓았는지 그리고 그 대가로 무엇을 잃었는지를 깊이 반추하게 된다. 결국 핍은 한때 부끄러워했던 과거와 관계를 다시 돌아보며, 진짜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희대의 이야기꾼 찰스 디킨스의 입담 덕분에 스토리 자체의 즐거움도 있지만 그의 글에서는 당시 영국의 시대 상황을 섬세하고 묘사하고 있어 현대의 독자를 빅토리아 시대로 데리고 간다. 특히 단순한 서민의 삶이 아닌 상류층과 그들에게 기생하여 사는 범죄자, 그리고 최하층민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어 매우 입체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이야기의 처음은 아이인 핍의 목소리로 시작하고 있어 낯선 배경이지만 거부감 없이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런 핍의 일기와 같은 일화를 통하여 우리는 네 가지 정도 깊은 고찰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는 도덕성에 관련된 부분이다. 핍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두려움에 의하여 탈옥한 죄수를 도와준다. 이를 계기로 무사히 그 죄수가 탈옥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핍은 하층민이 꿈꾸던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삶은 풍성해지지만 이때부터 그의 도덕관은 안타까울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핍은 부모님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 다음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를 누나 가저리 부인과 그의 남편 조가 구해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키운다. 그러나 외부적인 모든 것을 얻고 난 후 그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가족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이런 도덕관의 무너짐은 현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가족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한 후 자신의 가족을 버리는 뉴스를 통하여. 시대적 간극이 크지만 우리가 이 작품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이다.
두 번째로 이런 그가 인지한 위대한 유산의 개념이다. 처음 자신에게 생긴 재산에 그것을 준 사람의 신분에 대하여 애써 모른 척을 한다. 그러나 도망자 매그위치의 죽음을 통하여 비록 범죄자이지만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낀 핍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화려한 언변, 눈에 띄는 행동은 없었지만 타인의 진심을 보게 된 핍. 그는 드디어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돈이 아닌 마음의 가치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이는 성장이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끝자락에 와 있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구간이다. 무조건 남보다 우위에 서기 위하여 물질적 가치만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잠시 질주를 멈추게 만들기 때문이다. 빛소굴 출판사에서 지금 이 시기에 먼 과거의 이 작품을 출간하게 된 이유와도 같지 않을까? 여기에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결은 다르지만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힌 하비셤의 전철을 밟게 될 테니까. 자신을 잃기 전 마지막 경종처럼.
세 번째로는 불건강한 가족 간의 영향력에 관한 부분이다. 핍이 마음을 준 에스텔라는 핍의 심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물질적 결핍은 있지만, 가족의 사랑은 풍성한 핍과 물질적 풍성함은 있지만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에스텔라. 그녀는 하비셤이 고통 속에서 키워낸 복수심 속에서 길러진 아이이다. 핍은 이런 에스텔라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감정이 사라진 마네킹에 가까운 인물이다. 주고 싶어도 속이 비어서 줄 게 없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나 정신병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예소연의 소란한 속삭임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정신병은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되며 이를 다스리지 못할수록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그 고통이 전가된다. 사랑을 나누면 배가 되는 것처럼 고통도 나누면 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한끗차이로 하비셤의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네 번째로는 성장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고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과 성장을 동일시한다. 핍 역시 상류층 진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며 외형적으로는 성장해 보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도덕적 기반을 잃었고, 가족과 멀어졌으며, 자신조차 낯설어졌다. 이는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성장의 그늘을 보여준다. 결국 성장이란 단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잃어버린 영혼에서 말하는 몸이 빠르게 달릴수록 영혼은 뒤처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핍이 외형적으로 성공을 향해 나아갈수록 그의 내면은 텅 빈 껍데기처럼 비어갔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사회적 지위를 좇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셈이다. 그 결과 그는 정말 중요한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무조건적인 전진은 오히려 자아를 잃는 지름길이 되며, 그것이 진정한 성장이 될 수는 없다.
결국 핍은 무언가를 획득할수록 자신을 잃어간 인물이다. 그를 다시 되돌린 것은 물질도 계급도 아닌 관계와 기억이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눈에 보이는 성장보다 내면의 흐트러짐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덕분에 독자는 자연스레 자기 삶의 속도, 감정, 관계를 점검하게 된다. 빛소굴에서 이 고전을 지금 다시 꺼내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지금 멈추지 않으면 우리의 다음은 핍이 아니라 하비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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