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나는 현대미술 - 21세기가 사랑한 예술가들
김슬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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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21세기가 사랑한 24인의 예술가들의 이야기이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인물부터 매우 생소한 인물까지, 극 사실주의부터 극 추상주의까지 그 간극도 매우 크지만 그 내용은 현대인들의 심리와 사회적 고통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작품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애를 함께 짚어주어 작품 이해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름다움과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고전과 달리 개성과 위로 그리고 사회적 고발을 담고 있는 현대미술의 매력에 빠져보자.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21세기가 사랑한 24인의 예술가를 소개한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 작가부터 현대미술의 거장까지, 사실주의에서 추상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1부에서는 니콜라스 파티, 플로라 유크노비치, 아드리안 게니 등 현재 가장 뜨거운 초현대미술 작가들이, 2부에서는 요시토모 나라, 게르하르트 리히터, 데이비드 호크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등장한다.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며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작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삶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로 각인되는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책은 작가들의 궤적을 짚어 작품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그중에서도 개인의 이야기가 그림을 어떻게 입체화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작품을 깊이 이해하려면 언제나 그 뒤에 선 인간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림은 단순한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다.



그 대표적인 예가 캐나다 출신의 매튜 웡이다. 1984년에 태어나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는 ‘페이스북 시대의 반 고흐’라 불린다.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해 SNS를 통해 주목받았으나, 자폐증과 우울증, 투렛 증후군을 안고 살았다. 결국 요절했지만, 사후에는 천재로 각인되었다. 그의 그림에서 차분하고 공허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삶의 궤적과 맞물려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림과 인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하게 증명해 주는 사례로 읽힌다. 그의 비극은 곧 작품의 문법이 되었다.


특히 그의 우상이 반 고흐였다는 점은 더욱 상징적이다. 2024년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와 함께 전시된 장면은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현대미술은 종종 작품 그 자체보다 작가의 개인사와 비극적 운명이 열쇠로 작용한다. 웡의 삶과 그림은 고흐를 닮은 비극의 반복처럼 읽히며 관객에게는 작품 해석의 또 다른 통로를 제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미술은 고전과 달리 스토리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그림만 본다기보다 그림을 둘러싼 이야기를 함께 본다.



그와 얽힌 또 다른 화가는 스콧 칸이다. 그는 70세가 넘도록 사촌의 다락방에서 그림만 그리며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왔다. 매튜 웡이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면서 칸은 단숨에 스타 화가가 되었다. 인터뷰 속에서 그는 “세상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매튜가 내 삶을 바꿔주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은 예술의 우정과 연결이 지닌 힘을 감동적으로 드러냈다. 두 예술가의 관계는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선 서사로 남았고, 예술사에 작지만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이 일화는 동시에 현대미술이 자본과 시장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드러낸다. 한 사람의 시선이 예술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현실은 따뜻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남긴다. 칸의 삶은 해피 엔딩처럼 보이지만, 그 기회가 특정한 계기로만 열렸다는 사실은 질문을 남긴다. 결국 이 책은 예술가의 이야기 속에서 현대미술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비추고 있었다. 예술은 자유로운 듯 보이지만, 자본의 질서 안에서 철저히 움직이는 구조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킨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 Unknown Pleasures 〉이다. 알려지지 않은 기쁨이라는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하다. 책 속에 이 작품에 대한 직접 해설은 나오지 않지만 그의 서사와 포개어 보면 여러 가지 연상이 떠오른다. 혜은이의 노래 ‘파란 나라’, 동화 ‘파랑새’ 같은 이미지가 자연스레 스쳐 간다. 작품만 놓고 본다면 화면을 가득 메운 푸른빛은 우울과 고독의 상징이지만 그 끝에는 희망의 그린, 생명의 그린, 빛의 그린이 기다린다. 현재의 고통을 넘어서는 길 위에서 결국 기쁨을 향한 작은 확신이 스며들어 오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에 그의 삶을 대입하면 풍경은 달라진다. 힘들고 불행한 삶 속에서도 타인에게는 행복을 전해주었던 예술가의 모습이 겹쳐진다. 저 멀리 빛과 생명의 그린으로 채색된 공간은 막상 다다르면 다른 풍경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착시를 자주 경험한다. 붉은 노을이 번진 서해에 도착했을 때 그 땅은 여전히 무채색의 현실을 내뿜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작품 앞머리를 차지한 파란 영역, 지금 이곳이야말로 진짜 행복의 자리일 수 있다.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고, 늘 가까운 발밑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또 다른 층위로 본다면 그는 현재의 우울한 길을 서둘러 걸어 마지막 눈 덮인 산을 넘어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천국에 대한 염원, 곧 고통을 끝내려는 욕망으로 읽힌다. 이처럼 같은 그림이라도 작가의 삶을 알고 보는 것과 모른 채 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의 비극적 현실을 떠올리는 순간 단순한 풍경은 곧 내면의 고백이 되고, 색채는 존재의 목소리를 품는다. 결국 이 작품은 “알려지지 않은 기쁨”을 말하는 동시에 그것을 끝내 붙잡지 못한 예술가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21세기가 사랑한 24명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는 김슬기의 『탐나는 현대미술』은 개별 화가의 이야기와 그들의 작업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예술이 결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작품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사회적 맥락이 켜켜이 스며든 이야기이다. 이 책은 단순히 미술가의 삶을 엮은 기록이 아니라 21세기 현대미술이 놓인 자리를 비추는 작은 지도이기도 하다. 고전과 다른 맛의 현대 그림 너머를 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 번쯤 펼쳐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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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고쇼 그라운드
마키메 마나부 지음, 김소연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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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판타지 소설이다. 일반적인 판타지에서 현재 인물이 과거와 미래로 이동하는 설정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과거 인물들이 스스로 현재로 넘어온다. 책 속에는 두 갈래 이야기가 등장한다. 겨울 마라톤에 참여한 여고생과 한여름 야구 경기에 뛰어든 대학생. 얼핏 계절적 대비처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청년과 교토라는 일본의 근간을 매개로 하나로 포개지면서 오히려 더욱 풍성한 서사를 빚어낸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 줄거리는 두 개이다. 첫 번째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내리는 날 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여고생 사오리. 후보 선수였던 그녀는 선배의 사정으로 출전하게 된다. 그녀는 달리는 동안 인도에서 함께 달리는 에도 막부 말기에 활동했던 신센구미들을 보게 된다. 두 번째는 갑자기 친구 다몬의 요청에 의해 야구 경기에 참여하게 된 구치이. 사실 그는 여자친구와 여름 방학을 보내려 했지만 직전에 차여 숨 막히는 더위를 자랑하는 교토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 야구 경기에 참여한 구치이는 인원이 부족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는 이들 덕분에 아홉 명을 맞춰 경기를 진행한다. 같은 학교 선배 샤오가 나타나기도 하고, 야구를 구경하던 샤와무라 에이지, 엔도 미요지, 야마시타 세이치까지 갑자기 합류한다. 그러다 야구를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 샤오에 의해 이들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바로 2차 세계대전 때 청년이었으며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징병되어 전사했다는 것. 이들은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 함께 야구를 하게 된 것일까?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일본 판타지 소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제목에서 이미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고쇼는 과거 천황이 살던 황궁과 땅이라는 의미이다. 즉, 작품 명에서 현재 발을 디디고 사는 땅 위에 일본의 천년 고도라고 하는 교토의 천황이 살던 황궁을 얹어 놓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 평범한 청춘의 장면이 과거 고쇼의 의미, 즉 역사와 권위, 오래된 기억의 무대 위에서 펼쳐짐을 의미한다. 이는 현재의 경기장이 과거의 궁궐과 포개지면서 시간과 기억이 겹쳐지는 판타지적 효과를 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단순히 에도 막부에서 곧바로 현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센구미는 에도 말기에 정통 사무라이가 아닌 자들로 이루어진 황제 호위 조직이다. 그들이 들던 깃발에는 정성 성(誠)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집단이 스스로를 진심이라는 미덕으로 정당화하려 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신센구미의 깃발은 권력과 폭력 속에서 ‘진심’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아이러니하게 소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등장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시대적 배경으로 2차 세계대전 말이 등장한다. 일본 야구의 전설이자 메이저리그에서도 눈독을 들였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비롯해, 당시 대학생이던 수많은 청년들이 강제 징집으로 원래의 꿈뿐 아니라 삶 자체를 빼앗겼다. 작품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몇 명뿐이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매번 이런 식으로 경기에 참여해 왔던 다른 이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최소 인원인 아홉 명이 언제나 어떻게든 채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두 이야기는 에도 막부 시대, 군국주의 시대, 그리고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층위를 교토 고쇼라는 무대 위에 겹쳐 놓는다. 세 시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청년이며, 열정과 꿈을 품었지만 시대의 폭력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내몰린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결국 작품은 청춘의 빛남과 시대의 폭압이 교차하는 아이러니를 고쇼라는 장소와 야구와 마라톤이라는 경기를 통해 선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망자들이 청춘의 현장 속에서 함께 숨 쉬는 순간 독자는 단절된 시간을 넘어 이어지는 일본사의 무게를 체감하게 된다.



작품 속에는 한국인 독자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8월 15일 종전 다음 날 열리는 오쿠리비다. 소설에서는 이 의식이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행사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원래 오쿠리비는 본래 오래된 불교·민속 행사로 일본 패전과 직접적 관련은 없다. 단지 날짜가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종전 직후의 영령 추모와 겹쳐지금의 의미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작품 전체의 메시지가 오쿠리비 장면에 가려지는 경향이 생긴다.



이 작품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도, 사무라이도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슴속에 열정의 불을 지닌 청춘들이 강제로 삶을 중단당했다는 사실이다. 천황에게 진심을 맹세하고도 일류 사무라이로 인정받지 못했던 청년들 역시 달리고 싶었고, 국가의 징집으로 생명을 빼앗긴 청년들 또한 그저 야구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비슷한 또래 청춘들이 품는 소망. 즉, 달리고, 던지고, 웃고 싶다는 그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고 끝까지 타오르는 것.



나오키상을 수상한 『8월의 고쇼 그라운드』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판타지적 장치가 전혀 가볍지 않다는 점이었다. 유령처럼 나타나는 과거의 인물들은 단순히 색다른 볼거리가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청춘의 상실을 눈앞에 불러온다. 소설은 교토라는 장소에 역사의 켜를 겹쳐 놓고, 달리기와 야구 같은 평범한 행위를 통해 청춘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동시에 얼마나 쉽게 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순간 독자는 과거와 현재를 가르는 경계가 사라지는 체험을 하게 된다.



마키메 마나부의 『8월의 고쇼 그라운드』는 특정한 역사와 배경을 넘어 청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달리고 싶고, 공을 던지고 싶고, 웃고 싶은 마음은 모두 같다는 것. 이 판타지 소설은 바로 그 단순하고 뜨거운 소망이야말로 가장 오래 살아남는 힘임을 일깨운다. 지금 청춘의 길을 걷고 있는 이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며 미소 짓는 이도 모두 기억 속 판타지로 빠진다. 현실에 지쳐 마음속 소망의 불씨가 꺼진 이에게 다시 불을 붙여 주는 세계, 그것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판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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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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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해문 클럽 첫 선정작은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이다.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헉의 동행자 짐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다시 써 내려가며, 2025년 퓰리처상을 거머쥔 화제작이다. 더불어 유니버셜 픽처스에서 영화화 계약까지 체결되어 머지않아 스크린에서도 만나게 될 예정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1부는 원작의 흐름을 따라 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2부와 3부에서는 원작을 비틀어 에버렛만의 시선을 펼친다. 따라서 1부는 원작과 2~3챕터씩 교차해 읽으면 보다 선명한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 줄거리는 원작처럼 각자의 사정으로 집으로부터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짐의 본래 이름을 드러낸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는 훨씬 깊은 의미를 품는다. 영어권에서 제임스는 흔히 어린 시절의 친근함과 귀여움을 담아 짐이나 지미라 부른다. 그러나 이 애칭이 가족이 아닌 외부인에게까지 고착된다면 그것은 친근함이 아니라 정체성의 축소로 변한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짐은 자유를 얻고도 끝내 짐으로만 남지만, 이 작품 속 그는 마지막에 스스로 제임스라 선언하며 주체성을 확립한다. 그 순간 독자는 강렬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이미 밝혔듯이 이 작품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침묵을 요구받은 짐에게 모든 발언권을 준 작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원작의 짐이 가진 생각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독자가 알아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야 했을 뿐. 그러나 이 작품은 그의 목소리로 진행되어 노예 짐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가진 어른으로서의 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노예이지만 타인에 대한 연민을 품을 수 있으며, 관대함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드러낼 수 있다.



이 작품 속 짐은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판사의 서재에서 철학서를 몰래 훔쳐 읽기도 한다. 물론 이런 설정은 시대적 사실성과 맞지 않아 일부 독자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연민의 대상으로만 이해되던 인물이 철학적 언어를 던지는 순간 그 간극은 시대적 이질감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거리를 좁히는 경험으로 변한다. 즉, 이 장치는 그 시대를 살지 않은 현대 독자에게 짐을 더욱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에버렛의 기묘한 장치로 기능한다.



작품 속 예로 헉은 짐에게 알라딘 램프의 지니에게 빌 소원에 관하여 물어본다. 이때 당연하게 가족과의 만남과 자유를 요구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그는 두려움으로 소원 빌기를 거부하며 '철학자 키르케고르라면 무슨 소원을 빌까?'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이 순간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짐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먼저 여러 부분에서 키르케고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 그가 왜 이 철학자에게 사로잡혀 있는지 살핀 후 소원 빌기를 거부한 이유를 알아보자. 



키르케고르는 실존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인간의 불안과 선택, 그리고 신 앞에서 홀로 서는 단독자를 강조했다. 짐이 이 철학자에게 매료된 까닭은 노예라는 신분으로 늘 불안 속에 놓여 있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삶을 바꿀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감히 빌 수 없는 상황은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과 도약의 문제와 겹쳐진다. 따라서 소원을 거부한 그의 태도는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존재가 선택 앞에서의 불안을 드러낸 것이다.



또 다른 장치로 짐은 겉으로는 백인들이 강요한 흑인 방언을 흉내 내지만, 내면 서술에서는 정제된 언어와 사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의 이중 구조는 언어 권력의 힘을 말한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박탈하는 것은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사회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며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챙길 수 있는 첫 단계를 거세하였다. 에버렛은 원작에는 없는 언어의 이중 구조 장치를 도입하여 발화 권력의 불평등을 드러내고 백인들의 편의로 지워졌던 평등을 작품 속으로 불러온다.


에버렛이 던지는 가장 강력한 질문은 노먼과 또 다른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노먼은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고 다른 인물은 백인 어머니에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은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다. 두 사람 모두 백인의 외형을 지녔지만 전자의 경우 자녀 역시 변명할 여지없이 노예가 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어머니의 노력에 따라 완벽한 백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흑인이기에 인간이 아닌 노예라면 같은 외모를 지닌 백인은 그 뿌리를 모를 때 어떻게 인간과 노예로 나눌 수 있는가?



이를 노먼이 완벽하게 재연한다. 그도 도망자인 노예 신분이지만 그는 다른 주에서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또 다른 인물은 자신의 주에서도 다른 주에서도 언제나 백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 저자는 이 아이러니를 통하여 피부색에 따른 신분제의 허상을 고발한다. 또한 노예제의 폭력성이 단순히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을 구분하는 시선에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역사 속에 묻힌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다름의 시선으로 폭력을 느끼는 존재는 현대에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2025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는 단순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재해석한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에버렛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장치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넣음으로써 작품을 19세기에서 21세기로 불러내고, 그 결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의 경고장을 내민다. 말로는 다양성을 외치면서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과 멸시가 이어지는 현대 사회는 노예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차별에 대한 메시지는 충격적이게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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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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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 출판사에서 출간한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시간적으로는 일본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떠나 독일에 정착하고 미국에 거주하기까지의 여정을, 정체성적으로는 이방인으로서, 두 나라 언어를 넘나드는 비인간적인 글쓰기의 실험자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의 경험과 사유를 담고 있다. 그녀는 글쓰기와 번역, 현대 사회의 문제의 뿌리, 자신을 ‘영혼 없는 작가’라 부르는 이유를 밝힌다. 비틀린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문장은 언뜻 난해하지만, 곱씹을수록 철학적 공명을 일으켜 강한 공감을 불러낸다.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총 3부로 되어 있다. 1부에서는 그녀가 겪은 유럽의 첫 이미지가, 2부 부적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사회적 문제, 글쓰기에 관한 생각과 작가로서의 정체성, 3부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는 그녀가 생각하는 번역과 번역가의 마음가짐을 그리고 있다. 모든 글에서는 국가와 국가, 의미 언어와 소리글자, 원본 텍스트와 번역 텍스트 사이 경계에서 바라본 시각이 담겨 있으며 이런 내용이 사소한 물건부터 신체를 끌어와 말하고 있다.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큰 틀에서 보자면 세 가지 축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다름의 축, 두 번째는 글쓰기의 축, 세 번째는 번역의 축이다. 이후 그녀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축으로 통합할 수 있으며 이 세 축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제목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각 축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과 언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널리 알려진 그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냈으며 글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넓고 깊게 다루고 있는 첫 번째 다름의 축부터 살펴보자. 



다와다 요코가 발견하는 다름은 겉으로는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언어의 억양, 단어의 성별, 발음의 중첩 같은 작은 차이 속에는 사고와 문화 전체를 뒤흔드는 균열이 숨어 있다. 그녀는 이 다름을 낯선 타자의 시선으로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양쪽을 이해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로서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 이런 다름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하며, 다와다의 글쓰기는 바로 이 균열, 그 별것 아닌 듯한 다름에서 출발한다. 이는 작게는 한 사람의 정체성에서부터 넓게는 세계의 문제로까지 파급된다.



필립 K. 딕의 눈동자는 알고 있다(The Eyes have it)에서 딕이 같은 언어 안에서의 오해를 보여줬다면, 다와다는 서로 다른 언어가 뜻밖의 공통점으로 만들어내는 오해를 파고든다. 동일한 발음인 나스(일본 : 가지, 독일 : 축축하게 젖다)에서 오는 오해, 의미를 모르기에 소리만으로 언어를 감각적으로 피부로 느끼는 괴셰넨에서 개인이 느낀 이해 방식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사전 마을 챕터로 옮겨 오면 사회적 언어가 권력의 언어로 변할 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동화 같은 분위기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언어 속에서 발견한 다름은 곧 두 번째 축인 그녀의 글쓰기 방식과 맞닿아 있다. 경계적 삶 속에서 언어의 혼란과 의미 없는 소리를 모국어 화자보다 더 섬세하게 감각한 그녀는 언어를 의미와 소리로 나눈다. 그녀의 글쓰기는 소리에 근거한다.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떨림이기에 비인간적인 것으로 규정되고, 영혼 없는 귀신의 것으로 불린다. 그녀가 스스로를 ‘영혼 없는 작가’라 명명하며, 이런 이유로 비인간적인 글쓰기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제목에는 또 다른 의미가 겹친다. 그녀는 글쓰기를 설명하기 위해 일곱 어머니 이야기를 끌어온다. 사람들은 흔히 태아와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이어 보며, 그 몸속에 고유한 원본 텍스트가 주어져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텍스트를 담아두는 방을 ‘영혼’이라 부른다. 그러나 다와다는 태아와 아기를 동일한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에 생명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원본 텍스트 또한 존재할 수 없고, 그 방으로서의 영혼도 없다. 『영혼 없는 작가』라는 제목은 바로 이 부정에서 비롯된다.



일곱 어머니의 비유는 곧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그녀의 시선을 보여준다. 궁극적 근원은 '어머니 대지'라는 물리적 모성이며, 인간은 그 위에 언어라는 껍질을 입혀 존재를 기록한다. 그러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존재는 소멸을 향함을 이 과정을 ‘어머니점’에서 설명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 어머니는 ‘어머니조차없이외로이’인데 존재의 최종 근원이 외로움이며, 언어는 이 외로움에서 태어나고 언어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외로움만 남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녀에게 글쓰기는 취미나 선택이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이다. 



마지막 세 번째 축은 번역가로서의 입장이다. 이때 그녀는 일반 번역가와 달리 경계 위에 선 번역가로 자리한다. 그녀가 말하는 번역은 단순히 한 언어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이격자' 챕터에서 보여주듯 번역은 보는 것의 해석과 듣는 것의 감각, 즉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침투까지 포함한다. 그녀는 언어를 단순한 개념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신체 전체로 겪어내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언어는 의미보다 신체의 반응이 먼저 작동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번역자는 여전히 “의미 ↔ 의미”를 기준으로 옮기지만, 원문 화자가 실제로는 “소리 ↔ 몸의 반응”으로 경험한 경우 번역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번역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감각까지 완벽히 번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이다. 이 지점을 그녀는 “언어의 구멍”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구멍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틈새를 헤집을 수 있는 힘은 그녀 자신이 바로 언어의 경계에 선 사람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비인간적 글쓰기를 하는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는 그녀의 정체성, 즉 경계에 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일상의 사소한 물건과 현상에 대입해 언어적 비틀림으로 풀어낸 책이다. 이 책은 그녀의 언어 코드를 인지하지 못하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장을 한 줄씩 해독하며 깨닫는 순간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에 몸을 던진 듯한 압도적인 경험이 찾아온다.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에 매혹되기보다 다름·글쓰기·번역의 세 축을 따라가며 스스로 경계에 선 감각을 체험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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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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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그의 사후에 자비네 아이켄로트, 에르하르트 쉬츠가 숲에 관련된 그의 산문과 시를 엮은 책이다. 주제는 동일하게 숲으로 귀결되며 한 제목 당 글의 길이는 매우 짧다. 그 이유는 그가 매일 숲으로 산책을 하고 난 뒤 느낀 점을 일기처럼 적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다양하지만 그의 감각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닌 느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독특함이 있다.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형 카를 발저의 삽화와 동생의 글이 어우러져 감각적 깊이를 더한 작품이다. 자연과 산책, 일상에 대한 에세이와 시를 모은 이 책에서 작가는 숲을 통과하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다. 줄거리보다는 관조와 감각, 탈속의 기운이 중심을 이루며 독자는 매 글마다 그의 산책자적 내면을 함께 걷듯 따라가게 된다. 작고 조용한 것들을 주목하는 그의 글은 사소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로베르트 발저의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작중에 등장하는 단편의 제목이다. 모든 작품의 주제는 숲을 산책하는 저자이며, 각각의 글은 그가 매일 산책을 하며 느낀 점에 무한한 상상력을 가미하여 서술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나 사람은 실제가 아닌 경우가 많았으며, 곳곳에서 신화적 은유가 등장하였다. 가장 큰 예가 바로 아래의 문구이다. 이때 등장한 여인은 생명과 죽음, 치유와 재생, 출산과 포용의 상징인 대지의 여신을 상징으로 읽힐 수도 있다.



조금 더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그 여인은 지하세계를 의미하는 무의식, 죽음, 재탄생으로 향하는 공간으로의 은유인 지하의 중재자로 볼 수도 있다. 그 외에 야생의 수화자인 숲의 정령으로도 읽히는 등 매우 복합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주변의 몇 가지 문장이 있다. 첫 번째로는 몸을 숙여 두 다리에 입을 맞추었다는 부분과 순간 다정하고 환영하는 강물이 행복한 내 몸 안에서 흘러갔다고 하는 양립하는 문장의 화법 차이이다. 인간의 능동적 행동에서 자연에 흡수된 후 수동적 감각의 서술어가 대표적이다.


이후로 각자의 고요한 황홀경을 즐기기 위해 한참을, 정말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에서는 영적인 상태로의 돌입 및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약물에 취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닌 자연과의 일체로 인하여 신비로움에 취함을. 그 외에 반짝이는 별, 크고 신성한 달 등에서는 우주적 질서와 생명, 그리고 아르테미스의 속성을 은유하기도 한다. 즉, 그가 말하는 여인이나 아이 또한 숲이며, 지구의 증언자 또한 하이덴슈타인(고대의 사람으로 지구의 깊은 시간을 기억하는 자를 의미)이라는 이름의 바위로 의인화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언어적 상징성이나 은유를 찾기보다 직접 눈을 감고 그가 말하는 숲에 들어가서 느껴야만 한다. 그가 들어간 숲은 언제나 고요하고, 웅장하지만, 포용성이 강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의 심리에 따라 그곳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곳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곳으로도, 자신을 잊고 세상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치유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런 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쉽게 변하지 않고 아주 느리게 변하는 곳이지만, 그곳에 입성하는 자의 심리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곳임을. 이런 곳에 있는 모든 것은 지구의 태곳적 시절부터 있었던 것을 묵묵히 지켜보고 기억하는 인류의 고향 같은 공간이라고 발저는 말한다. 한 개인의 고향이 아닌 전 인류의. 특히 그의 초록이라는 컬러에 대한 묘사는 단순히 생명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기존의 것을 죽이는 죽음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그.


가장 인상 깊었던 제목의 글은 산불이다. 모든 글은 그가 숲으로 들어가 직접 보고 느낀 것, 그리고 그곳에 융화되어 자연과 물아일체가 된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면 산불은 오히려 그가 높은 하늘에서 인간들을 관찰하는 느낌이 강하다. 저무는 태양빛을 압도하는 불타는 숲의 빛깔. 땅에서 불타는 것이 어느 순간 하늘의 그것으로 옮겨간 듯한 느낌. 이를 지켜보는 인간들의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혀 정지된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언제나 잔잔한 그의 이미지를 지울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 책을 보면 저자가 단순히 글을 쓰기 위하여 산책한 것이 아니며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따지지 않고 숲으로 달려간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해가 떠있는 낮에만 간 것도 아니다. 그 시간의 흐름에서 그는 매번 다른 것을 느끼고 서술했다. 봄의 생명,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쓸쓸함, 겨울의 허망함과는 거리가 먼 모든 것에서의 생명을.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는 숲을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처럼 대하고 있다. 인간을 낳고 기른 원초적 지구라는 존재로서. 


즉, 태고의 존재와 짧디짧은 한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이 언제나 풍덩 빠지는 곳이 숲이다. 하찮은 존재가 거대한 존재에게 다가가지만 그것에 압도되기보다 그 작디작은 존재인 인간의 거울이 되어주는 거인으로서의 숲은 경이롭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게 다가온다. 읽다가 당장 저자가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잎이 무성하고 거대한 산으로 달려가고 싶음을 매 페이지마다 달래야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이 많은 책이다.



로베르트 발저의 에세이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은 단순히 초록으로 뒤덮인 자연의 한 공간을 매일 걸은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소임에도 매번 다름을 느끼면서 흔들리는 그의 마음을 다독이고 지켜주는 마법 같은 일화를 피톤치드에 취해서 쓴 글이다. 그래서 독자 또한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상의 숲에 빠져 그곳의 분위기에 취해 피부로 느껴야 한다.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발저식 독법 즉 자연의 감각을 몸에 새기는 독자의 체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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