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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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신간 『바임』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다. 그의 기존 문학이 수채화 특유의 맑고 투명한 층위를 겹쳐놓은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불투명한 미래를 유화처럼 두껍고 거칠게 덧칠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선명함 대신 흐릿함으로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현실보다 초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 삶과 더 닮아 있어 오래 남는다. 포세가 새롭게 쌓아 올린 이 낯선 질감 속으로 잠깐 빠져보자.



총 세 파트로 나누어진 욘 포세의 『바임』 줄거리는 단추 하나를 달기 위해 길을 나선 야트게이르가 오래전 사랑했던 여인을 예기치 않게 다시 마주치며 시작된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삶에 다시 들어오고, 야트게이르는 그 흐릿한 인연을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파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이어지며 야트게이르·엘리네·프랑크 세 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교차한다. 이야기는 바다와 항구를 오가며 세 사람의 인연이 어디에 닿는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은 느낌이 강한 욘 포세의 『바임』은 ‘바임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샤이닝』 이전의 작품들이 투명하게 번지는 수채화 같았다면, 죽음을 강하게 다루기 시작한 그 지점부터 포세의 문장은 불투명해졌고 이 소설에서 그 효과가 가장 짙게 드러난다. 문장의 불투명함이 깊어지면서 그가 오래 다루어온 침묵과 여백도 함께 농도가 짙어졌다. 서사보다는 감각을 따라 읽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은유들을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첫 에피소드의 단추, 바늘, 실이다. 언뜻 보면 어리숙한 주인공을 드러내려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초반 분량과 세 인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부분이 이후 이야기를 암시하는 은유였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포세가 독자에게 남겨둔 거의 유일한 힌트라고 해도 된다. 단추는 제자리를 잃은 야트게이르를, 바늘은 야트게이르와 프랑크 두 세계를 오가며 관통하는 엘리네를, 실은 남아서 모든 것을 묶어내는 프랑크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이 소설은 이 삼분 구조가 전체 서사를 움직이는 키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각 파트마다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등장한다. 파트 1에서는 엘리네가 야트게이르의 삶을 다시 두드리고, 파트 2에서는 죽은 야트게이르가 친구 엘리아스의 집 문을 두드리며, 파트 3에서는 엘리네가 프랑크를 향해 문을 두드린다. 이 작품에서 문은 삶과 죽음, 바다와 육지,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그 경계를 넘어오거나, 넘어가거나, 다시 돌아오려는 자들이다. 결국 문 두드림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오려는 징표이며,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다.


세 번째로 바임에서 가장 이상하게 흔들리는 건 인물의 이름이다. 세 주인공 모두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심지어 작중에서 본명은 누구도 부르지 않으며, 실제 이름이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름의 고정성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뜻이다. 즉,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삶에서 만난 타자가 불러주는 이름이 실제 이름이 되는 세계다. 작중에서는 이름이 누구와 연결되느냐,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이는 삶이 고정된 정체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재배치되고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진짜 이름은 거의 힘을 갖지 못하고, 대신 타인이 붙여주는 이름, 상황 속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이름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인이 역할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바임의 이름들은 인물의 내면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누구로부터 떠나며 어떤 세계에 발을 들이는지를 나타내는 표식에 가깝다. 이름은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적 상징이 아니라, 경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포세만의 장치다. 삶과 죽음, 육지와 바다, 붙잡힘과 떠남이 맞닿는 이 접점은 인물들의 흔들리는 존재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다는 이들이 표류하듯 살아가는 상태와 겹치고, 항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반복해 등장한다. 포세에게 해안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인물들이 흔들리고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세계의 구조 그 자체이다.



이 지점까지 오면 바임이 왜 그렇게 흐릿한 결을 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삶의 모든 과정은 안개처럼 번지는데 유독 죽음만은 또렷하다는 점이다. 무덤의 묘비에는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이름으로 흔들리던 인물들의 본명이 남고,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 이름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초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정박한 자기 배 옆에서 죽음을 맞는 야트게이르의 장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마치 삶은 흐려지고 죽음만은 형태를 갖는 세계처럼.


죽음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이 작품의 시간 역시 흐릿하기 때문이다. 『바임』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떠다니고, 인연은 맺어지는 순간보다 흐르는 과정이 더 길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 어떤 장면도 명확히 고정되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이 흐름을 멈추고 형태를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관계는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고 오래 번지는 잔향처럼 남고, 인물들은 이름처럼 존재도 안정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끝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단단한 지점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욘 포세의 『바임』은 선명하게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흐릿한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죽음의 형태만 또렷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처럼 번지고 덧칠된 문장 속에서 인물들은 이름도 삶도 쉽게 붙들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이해하는 순간보다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장면들이 더 오래 손에 걸리고, 포세가 그린 세계는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채 묵묵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깊게 밀려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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