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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
마자 멩기스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살만 루슈디가 극찬하고 오펜하이머 제작사가 영화화를 확정한 마자 멩기스테의 역사 소설 그림자 왕은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본질은 전쟁이 아니다. 이 작품은 진실을 쥔 자와 기록을 조작하려는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전쟁, 즉 기억을 둘러싼 역사 기록 패권 쟁탈전에 가깝다. 누가 이름을 남기고, 누가 잊힐 것인가. 가장 치열한 싸움은 말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서사를 두고 벌어진다. 그럼 그 장대한 서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다. 어린 하녀 히루트는 군 총사령관 키다네의 집에서 일하다 전쟁에 휘말린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식량을 나르고 무기를 나르지만 곧 전투에 직접 참여한다. 황제가 망명하자, 전사들의 사기를 위해 한 농부가 그림자 왕으로 위장돼 세워지고 히루트는 그의 호위병이 된다. 이 과정에서 히루트는 무고한 민간인 학살과 수용소 포로 생활까지 겪으며 전쟁 한복판을 통과해 나간다. 어린 소녀였던 히루트는 점차 이름 없는 전사로 성장하며 스스로 운명을 선택하는 인물로 자리 잡는다.
역사 소설 마자 멩기스테의 그림자 왕은 1935년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전쟁을 단일 사건으로 두고 본다면 작품이 주는 메시지의 크기가 확연하게 줄어든다. 왜냐하면 이것의 이면에는 1895-6년에 벌어졌던 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의 패배 기록을 지우고 그 위에 승리의 역사를 덧씌우기 위한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대외 국가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며 향후 국제 사회는 이탈리아에 경제 제재만을 가하게 된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의 씨앗으로 작용한다.
이런 기본적인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작품 속에서 몇 가지 포인트를 인지하고 읽는다면 작품이 주는 메시지의 깊이가 다르게 다가온다. 먼저 이 작품 속에는 책 제목을 의미하는 그림자 왕이 엄밀하게 따져 두 명 등장한다. 바로 실제 전쟁 전 실제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와 그와 닮아 국민들의 구심점이 되도록 만들어진 가짜 왕. 전자는 기억을 잊은 왕으로 후자는 기억을 지키기 위한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 왜 굳이 당시의 황제가 책 제목에 부합하는 인물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전쟁 발발 전,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가져 종교적 정통성과 정치적 절대성이 있었다. 대외적으로도 아프리카 통합과 반제국주의 상징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망명이라 쓰고 도망이라고 읽는 행위를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왕국이 붕괴되어 기억의 유령으로 남은 그림자 왕에 불과했다. 이런 위상의 변동은 이후 에티오피아 내전이 발발하는 발판이 되었다.
다음으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림자 왕인 농부 미님의 가짜 황제 만들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깊다. 이들은 도망간 황제를 대신하여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구심점이 필요했기에 닮은 이를 황제로 만든다. 이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공동의 상상과 연결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가 믿기로 한 허구라는 개념을 작중 주인공들은 전쟁 속에서 뼈저리게 겪었기에 가짜 왕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는 크게 두 명의 여전사가 나온다.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이 책은 억압받고 멸시받던 여성들의 활약을 다룬 전쟁 소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살만 슈디가 극찬한 내용과 연계한다면 단순히 젠더 갈등보다 훨씬 깊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다룰 여전사는 아스테르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부모들끼리의 계산으로 현재 남편과 결혼한 케이스이다. 결혼식 전에 요리사와 도망을 계획했다가 그녀 대신에 요리사가 고초를 겪었을 정도로 저항이 심했다.
첫 날밤을 묘사하는 부분이 꽤 긴 편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의 필력(물론 다른 부분에도 많이 드러난다)이 드러난다. 바로 그녀 자리에 에티오피아라는 국가를 대입함과 동시에 첫 날밤의 묘사는 당시 국가와 국민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스테르는 고귀한 혈통을 지녔기에 당시 당시 공식적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유일하게 사용했던 에티오피아와 흡사하다. 이런 그녀조차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 남자에게 유린당하다시피 첫 날밤을 보내게 된다.
아스테르 개인의 서사인 강제 결혼, 도망과 저항, 출산, 억압의 종말을 상징하는 아이의 죽음, 그리고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을 지키려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 자리에 에티오피아를 넣어 집단 서사로 바꾸면 강제 합병으로 인한 식민지화, 저항과 전쟁의 실패, 정복의 산물인 식민지 체제, 이후 식민체제의 붕괴로 독립의 조건 달성으로 대비된다. 아스테르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국가의 상태로 놓게 되면 그녀는 에티오피아라는 국가의 아이콘으로 신화적 상징으로 급부상한다.
마지막으로 작중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물인 히루트 이야기이다. 그녀는 살아남은 자이다. 신화로 봉인된 왕도, 죽음으로 상징화된 귀족 여성도 아닌, 육체로 전쟁을 통과한 이름 없는 병사다. 누구의 딸도, 누구의 아내도 아닌 존재로 그녀는 더 이상 대체되지 않는 국가의 현재를 상징한다. 기억과 생존이 그녀 안에 결합되며, 에티오피아는 왕도, 여왕도 아닌 그녀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일으켜 역사의 기억을 다시 쓰려 했던 이탈리아에 맞선 싸움의 최종 승자는 히루트가 아니었을까.?
살만 루슈디가 극찬하고 오펜하이머 제작사가 영화화를 확정한 마자 멩기스테의 역사 소설 그림자 왕은 단순한 전쟁 서사가 아니다. 이 작품은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기억이 어떻게 선택되며, 상징이 어떻게 권력을 잃는지를 기록한다. 왕은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복원하지 못했고, 여전사는 침묵 속에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병사만이 국가의 현재가 되었다. 이름을 잃은 이들이, 살아남은 자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마치 현대 에티오피아는 더 이상 왕의 나라가 아니라, 히루트들의 나라라고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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