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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되는 순간들 - 이제야 산문집
이제야 지음 / 샘터사 / 2025년 5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장르가 바로 시이다. 모든 글 중 가장 언어의 밀도가 높기에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싫어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접근할 수 없는 장르. 이해를 기다리는 단어들은 시를 멀게만 느끼게 했던 문턱을 조금이나마 낮춰준다. 샘터에서 출간한 이제야 작가의 에세이 시가 되는 순간들에서 지독하게도 꺼리던 장르의 문턱을 조금이나마 낮출 수 있었기에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이제야의 시가 되는 순간들은 총 서른다섯 개의 이야기와 에필로그, 그리고 사진가이자 시인인 이훤 작가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으 그 안에는 오래도록 이해를 기다리는 단어들이 기다리고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 작가가 직접 찍은 흑백의 사진 한 장, 시 한 편, 압축된 그녀의 말과 모든 과정을 담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챕터마다 저자의 과거 경험을 따라가며 그 일상 속 깨달음들로 삶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시적 철학을 세워가는 모습을 섬세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전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려는 일이라는 말처럼, 이 책은 시인의 사적 체험과 그 감정들이 어떻게 언어로 변모해가는지를 기록한다. 예컨대 시를 쓰는 순간 기존의 믿음은 완전히 깨진다는 구절은 기존에 서로를 완벽하게 알아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 대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균열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시는 결과가 아니라 삶에서 다가온 감정의 잔해를 언어로 발굴하고 사라져 가는 기억 속 단어들의 모호함을 조심스럽게 모으는 작업이다.
말이 되지 못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어떤 감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제야 시인은 시가 되는 순간들을 다시 살아보고 싶은 시간, 잊고 싶지 않은 이름, 끝났지만 남아 있는 감정 등과 같은 것들로 구체화한다. 책 속 문장 하나하나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기 위한 섬세한 채집이다. 그 과정의 첫 번째는 오랫동안 바라봄이라고 정의한다. 어떠한 것을 끈질기게 바라보며 그 안의 감정과 언어를 해체하고 그것을 압축하여 재조립하는 것이 시라고.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언어에 대한 겸허함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를 지워가며 사랑의 애초를 소중히 하는 것이라는 문장에서 보이듯, 시인은 언어를 소유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잊힌 단어, 미처 붙들지 못한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언어를 다룬다. 이 언어의 선택은 쓰는 사람이 하지만 작가는 이것이 결코 자신만의 것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비밀스러운 감정을 던졌을 때 그것을 받아 독자 개개인의 현실에 맞게 공명하길 원한다. 가장 은밀한 단어가, 가장 보편적인 이해로 이어지기를.
시를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스스로의 언어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야의 에세이 시가 되는 순간들은 그 드문 목소리 중 하나다. 이 책은 그녀가 쓴 작품과 찍은 사진, 그리고 그녀의 작품이 태어난 구체적인 배경 이야기를 함께 엮어낸 기록이다. 그래서 이 책은 시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내면을 조심스레 따라가는 탐험에 가깝다. 읽으면서 먹먹했던 지점, 위로를 받는 부분, 무언의 말을 거는 듯한 포인트 등 다양하게 느낀 점을 하나씩 이야기해 보자.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사진이다. 서른 장이 넘는 사진 중에서 한 장 정도는 컬러가 있을 법도 하지만 모든 사진은 흑백이다. 사진은 대부분 인물 없이 풍경만을 담고 있다. 오래된 골목, 휘어진 나무, 창문을 닫은 방처럼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은 침묵 속에 그 순간을 증언한다. 흑백 사진이라는 선택은 그 기억들이 지금과는 다른 시간대에 있었음을 조용히 말해주는 장치다. 이 사진들은 시와 산문 사이의 여백을 메우며 독자로 하여금 페이지의 속도를 늦추게 만든다.
또한 흑백 사진을 작가가 말하는 대로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작품을 쓰게 하는 순간은 허기, 상실, 아픔 등 무채색의 시간들이라는. 그러나 막상 그녀의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오히려 이 무채색으로 인하여 독자 스스로의 경험과 어우러져 자신만의 색을 입히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글 전반에서 그녀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상호 연결성. 이는 마치 서로 다른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에 있지만 진심은 공명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언어로 다가온다.
이제야의 에세이 시가 되는 순간들에서 저자는 하나의 경험에 담긴 수많은 감정의 레이어를 벗겨 농축시킨 이해를 기다리는 단어들로 말하는 것을 시라고 정의한다. 다만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진술이 아니라 독자가 다시 느끼고 재구성할 수 있도록 열어둔 문장이다. 가장 내밀한 고백이 가장 넓은 감각으로 이어지는 것을 시라고 정의한 이 책은 장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는 결국 누군가의 진심에 귀 기울이는 사람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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