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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바움가트너의 의미는 독일어로 나무를 가꾸는 사람, 정원사를 뜻한다. 폴 오스터의 유작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이의 기억을 돌보고, 사라진 이의 자리를 가꾸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상실의 아픔보다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상징으로 읽힌다. 이 소설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남겨질 아내를 위한 다정한 이별 지침서로 다가온다. 평생 존재론적 질문과 정체성, 우연, 언어의 구조 같은 걸 다룬 작가의 마지막으로 남긴 투박스럽지만 사려 깊은 사랑 고백을 따라가보자.

시모어 바움가트너는 일흔이 넘은 철학자이자 교수이다. 아내 애나는 활동적이고 고집스러운 인물로 궂은 날씨에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핑을 나갔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녀를 잃은 지 9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며 그녀가 남긴 시를 정리하여 출판 준비를 하면서 보낸다.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은 물론 그보다 더 이전의 부모의 어린 시절부터 회고하며 아내와의 추억 전반을 돌아본다. 아픔뿐인 이별이 전화 통화 한 번으로 인하여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가 나 애나의 서재로 내려간 그. 갑자기 연결도 되지 않은 전화기가 울려 받으니 거기에서는 애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죽음 후 자신이 도달한 곳과 그가 자신을 기억하는 한 그곳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며 전화는 끊어진다.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진다. 연애도 하고, 자신의 글도 써서 출판하고 애나의 책도 출판한다. 그녀를 잊는 것이 아닌 온전히 살아 있는 상태로 자신을 만들면서. 그러다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정체불명의 편지가 한 통 도착하는데...

폴 오스터의 유작 바움가트너는 읽기에 따라 철학적인 요소로도, 감정 윤리적인 요소로도 읽힌다. 에브리맨, 제5도살장, 선셋 리미티드를 번역하신 정영목 님은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 그동안 작가의 성향 그대로 분석, 철학적으로 해석을 하셨다. 그러나 몸이 아프기 시작한 2022년부터 집필을 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고 2023년 3월에 영문판으로 작품이 출간된 것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이 작품만큼은 감정·윤리적인 해석을 해본다.

#열린책들 에서 출간한 #폴오스터 의 바움가트너는 58세의 아내를 사고로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70대 노년 남성의 이야기다. 이제 곧 죽음을 앞둔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정리하는 동시에 자신이 떠난 뒤 혼자 남겨질 아내를 위해 마지막 인사를 준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선율은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되짚는 회고록의 선율이고, 다른 하나는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사랑의 선율이다. 전자에 방점을 두면 철학적인 작품이 되고, 후자에 초점을 맞추면 다정한 이별 지침서가 된다.

처음 아내가 죽고 난 후 바움가트너는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존재로 지낸다. 두뇌는 죽음을 이해하지만 심장은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어느 날 밤 연결도 되지 않은 전화가 울리며 그 안에서 애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공허한 공간이며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는 한 그곳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물론 이 작품이 판타지물이 아니기에 이것은 주인공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한 꿈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사건 이후 자신이 온전하게 살아 있어야 애나도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 최대한 건강한 삶을 유지한다. 그녀를 더 기억하기 위해 과거 그녀의 시를 찾아 읽어보고 그녀와의 연애 시간도 회상한다. 그들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부부로 평생을 지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성격이 달랐다.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감정형에 가까운 애나, 내향적이며 이성적 사고형에 가까운 바움가트너. 둘은 의외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한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녀의 시를 보며 그는 아내가 사라진 세계에서 아내가 다시 사라지지 않고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전화 한 통으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그는 점차 심장도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며 살아 있는 시체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삶으로. 이런 과정만을 뽑아 그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보면 그 삶의 방식 자체가 폴 오스터가 남겨질 아내에게 건네는 가장 조용한 작별의 언어가 된다. 나의 육체는 사라지지만 언제까지나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무언의 포옹이랄까?

또한 우크라이나 땅에 전해 내려오는 스타니슬라프의 이리들이라는 이야기를 그곳의 시인에게 들었을 때 그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무작정 믿는다고 선언한다. 물론, 이것을 역사적 사건에 대입하자면 단순하게 역사적 기록물은 없지만 나타난 현상이 있으므로 신뢰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애니에게로 대입하면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린 전화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고 그녀가 말한 세계에 대한 증언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전화를 믿기로 한다. 그것은 현실을 증명하려는 태도라기보다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믿음의 방식이다. 마치 누군가는 사라진 이리 떼를 믿고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 전화 한 통을 믿는 것처럼. 아내가 이 글을 믿어준다면 이별의 아픔 속에서도 헤매지 않고 조금은 다르게 나와 연결된 채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다정한 당부가 아닐까?

#폴오스터유작 바움가트너에서 등장하는 작품인 운전대의 신비는 언뜻 보면 육체와 영혼, 실체가 없는 어떤 것과 실체를 다룬 것처럼 보인다. 물론 철학적으로는 이런 해석이 맞다. 그러나 이 또한 아내를 겨냥한다면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이 작품에서 실체인 몸을 자동차로, 실체가 없는 영혼을 운전자로 비유하였다. 조금 더 독자가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오토라는 뜻 안에 자기라는 의미가 있으며 모터라는 말에 운동 근육이나 신경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모터는 자율주행을 하다가 큰 사고를 내고 차 안에 탄 가족이 모두 죽는다. 이때 #바움가트너 는 곧 발표될 경찰 공식 보고서가 참사의 원인을 인간(영혼)의 과실로 명시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서 인간은 영혼이다. 그는 다정하게 협박한다. 자율주행의 실패는 결국 영혼의 실수로 기록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니 그녀가 흔들리면 그의 존재 역시 그 어디쯤에서 참사를 맞게 된다며 너무 상실의 아픔에 휩쓸리지 말라며 평소에 그답지 않은 남겨질 아내를 위한 다정한 이별 지침서를 남긴다.